목차
1. 해방 후 정국
1) 38선 이남지역
2) 38선 이북지역
2. 민족반역자 이승만·김일성
3. 유엔에 넘어간 한반도의 운명과 남북통일운동
4. 5.10단선과 4.3 항쟁
5. 스스로 자초한 분단과 정통성
1) 38선 이남지역
2) 38선 이북지역
2. 민족반역자 이승만·김일성
3. 유엔에 넘어간 한반도의 운명과 남북통일운동
4. 5.10단선과 4.3 항쟁
5. 스스로 자초한 분단과 정통성
본문내용
압작전에 투입하였다. 9연대장인 김익렬은 유격대와의 협상을 시도하여 전투를 중지하고, 귀순자를 받는 방향으로 인도하였다. 하지만 5월 1일에 오라리 방화사건과 5월 4일에 경찰총격사건이 발생하면서 평화협정을 깨지게 된다.
미군정은 김익렬에게 초토화 작전을 지시하였으나, 김익렬이 거부하자 퇴임시키고 연대장을 바꾼 후,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였다.
169개 마을 중 130개의 마을이 불태워졌으며, 일반민중에 대한 집단학살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제주도 인구의 10분지 1가량인 3만 명이 학살되었다. 3만 명이라는 많은 숫자가 학살되었지만 제주도는 5·10단선을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고, 남한 정부의 정당성에 위협을 주는 항쟁으로 기록되었다.
제주도에서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지던 시기에 이승만은 국회의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7월 20일에는 국회의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7월 24에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5. 스스로 자초한 분단과 정통성
다수의 민중들과 대다수의 지식인·정치인들은 통일정부를 갈망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분단설에는 외세의 개입, 일본 군대의 치밀한 작전으로 인한 분단설 등이 존재하고 있다. 외세 개입설은 여태까지 지배적인 이론이었고, 일본에 의한 분단설 또한 근거가 존재하고 있는 학설이다.
필자는 두 가지의 학설 모두 인정하지만, 그 것보다는 민족반역자들 때문에 분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남북의 지도자들이 미·소에 협력하는 것보다 통일정부를 구상하는데 힘을 쏟았다면 최소한 연방제의 국가는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고, 6·25와 같은 비극적인 민족전쟁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김두봉·김성수·이승만과 같은 몇 명의 사람들, 많아도 전 국민적으로 따지면 1%도 안 되는 세력들 때문에 나머지 99%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된 것이고, 이념으로 이루어진 분단 때문에 친일파와 같은 민족반역자들을 처벌할 기회조차 상실하게 된 것이다. 분단을 자초한 한민당의 후예들은 아직도 민족반역자인 이승만 일당을 추종하며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직·간접적으로 부정하고, 한국논단이라는 학술지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1945~1948년에 이르는 짧은 시간에서 범한 오류가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대한민국의 건국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세력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은 언젠가 스스로 정통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 연구서
서중석, 2003,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 연구논문
정병준, 2006, 「한국독립운동과 독립국가 건설의 역사적 의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6.
오금숙, 1998, 「제주 4.3항쟁-반세기를 돌아보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동사회 21.
서중석, 1993, 「좌우합작과 남북협상」, 일조각, 한국사 시민강좌 12.
이택휘, 1992, 「미군정에 관한 포괄적 객관적 분석 : 한국현대사와 미군정」,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서평문화 6.
미군정은 김익렬에게 초토화 작전을 지시하였으나, 김익렬이 거부하자 퇴임시키고 연대장을 바꾼 후,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였다.
169개 마을 중 130개의 마을이 불태워졌으며, 일반민중에 대한 집단학살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제주도 인구의 10분지 1가량인 3만 명이 학살되었다. 3만 명이라는 많은 숫자가 학살되었지만 제주도는 5·10단선을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고, 남한 정부의 정당성에 위협을 주는 항쟁으로 기록되었다.
제주도에서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지던 시기에 이승만은 국회의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7월 20일에는 국회의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7월 24에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5. 스스로 자초한 분단과 정통성
다수의 민중들과 대다수의 지식인·정치인들은 통일정부를 갈망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분단설에는 외세의 개입, 일본 군대의 치밀한 작전으로 인한 분단설 등이 존재하고 있다. 외세 개입설은 여태까지 지배적인 이론이었고, 일본에 의한 분단설 또한 근거가 존재하고 있는 학설이다.
필자는 두 가지의 학설 모두 인정하지만, 그 것보다는 민족반역자들 때문에 분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남북의 지도자들이 미·소에 협력하는 것보다 통일정부를 구상하는데 힘을 쏟았다면 최소한 연방제의 국가는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고, 6·25와 같은 비극적인 민족전쟁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김두봉·김성수·이승만과 같은 몇 명의 사람들, 많아도 전 국민적으로 따지면 1%도 안 되는 세력들 때문에 나머지 99%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된 것이고, 이념으로 이루어진 분단 때문에 친일파와 같은 민족반역자들을 처벌할 기회조차 상실하게 된 것이다. 분단을 자초한 한민당의 후예들은 아직도 민족반역자인 이승만 일당을 추종하며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직·간접적으로 부정하고, 한국논단이라는 학술지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1945~1948년에 이르는 짧은 시간에서 범한 오류가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대한민국의 건국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세력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은 언젠가 스스로 정통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 연구서
서중석, 2003,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 연구논문
정병준, 2006, 「한국독립운동과 독립국가 건설의 역사적 의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6.
오금숙, 1998, 「제주 4.3항쟁-반세기를 돌아보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동사회 21.
서중석, 1993, 「좌우합작과 남북협상」, 일조각, 한국사 시민강좌 12.
이택휘, 1992, 「미군정에 관한 포괄적 객관적 분석 : 한국현대사와 미군정」,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서평문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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