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머리말
2. 원 침공의 후유증과 호조(北条) 전제정치
3. 천황의 쿠데타와 겐무(建武) 신정의 파탄
4. 남북조의 동란과 아시카가 막부의 등장
5. 맺음말
2. 원 침공의 후유증과 호조(北条) 전제정치
3. 천황의 쿠데타와 겐무(建武) 신정의 파탄
4. 남북조의 동란과 아시카가 막부의 등장
5. 맺음말
본문내용
을 뛰어넘어 영국(領) 내의 토지를 점차 지배하에 넣고 심지어는 장원에 들어가는 권한도 획득한다. 이리하여 슈고는 국아의 기능도 흡수하며 1국 전체에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해 나가고 이들의 영국은 세습되었으며 막부조차 이들을 용이하게 해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렇듯 지방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슈고 다이묘는 때때로 그곳에서 오랫동안 지배권을 행사해 오던 재지영주의 저항을 받는 경우가 있어 쇼군의 권위나 막부라고 하는 정치조직을 필요로 하였다. 아시카가 막부도 직할 군사력이 약하고 직할령도 적어 내란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전국적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슈고 다이묘의 힘이 절실한 상태였다. 필요에 따라 대립하고 갈등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아시카가 막부는 쇼군과 슈고 다이묘의 타협과 균형위에 성립한 연합정권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수철, 2014, 「일본 중세 국가론의 현황과 과제」. 『일본비평』, (11), p.276~280
5. 맺음말
지금까지 가마쿠라 막부 말기의 혼란상과 이를 극복하고자 시도된 개혁의 좌절, 그것이 초래한 정변과 쿠데타, 신정부의 수립과 파탄, 그리고 남북조의 동란 속에서 나타난 지방권력과 막부정권의 제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아시카가 막부의 성립배경은 이처럼 하나의 중심으로 권력을 모으고 중앙의 권력을 통해 전국을 개혁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각 집단들이 각자의 입장을 때로는 투쟁을 통해 조율하고 조정해가면서 균형점을 찾고 각자의 영역에서 사회전체를 조금씩 쇄신해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아시카가 막부의 수립 과정은 이 시기를 하나의 맥락으로 풀어낸다는 것이 난망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위 권문체제론에서 거론되는 일본 중세의 행위자들, 공경귀족, 사원세력, 무가세력 등은 이 시기에도 일본사의 변치 않는 상수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 바로 무가세력의 중추이자 근간이라 볼 수 있었던 고케닌 계급이었다. 그들은 막부라는 무형의 권력을 사회에서 현현하고 있었던 존재들이었으며 동시에 필요에 따라서는 천황과 조정의 수호자가 되기도 하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 두 가지 면이 서로 공존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는 점이 무가정권의 성격을 규명하는 열쇠임은 명백할 것이다. 또한 천황가와 조정의 권력이 중세의 일본인들에게 물리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을 넘나들며 다채롭게 행사되고 있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조 시대를 다룬 태평기 등의 군담소설에서 당대의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난맥상이 상당수 백성들에게는 천황가 분열로 인한 천재지변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남북조의 동란이 단순히 무로마치 시대로의 이행을 위한 과도기로 해석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게 한다. 이들 모두를 고려한다면 막부정권 유무 혹은 막정 지도자의 가문이 하나의 시대를 대표할 수 있다는 시각은 분명 재고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중세사 연구의 첫발로서 아시카가 막부를 전후한 이 시기가 작지 않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지방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슈고 다이묘는 때때로 그곳에서 오랫동안 지배권을 행사해 오던 재지영주의 저항을 받는 경우가 있어 쇼군의 권위나 막부라고 하는 정치조직을 필요로 하였다. 아시카가 막부도 직할 군사력이 약하고 직할령도 적어 내란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전국적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슈고 다이묘의 힘이 절실한 상태였다. 필요에 따라 대립하고 갈등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아시카가 막부는 쇼군과 슈고 다이묘의 타협과 균형위에 성립한 연합정권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수철, 2014, 「일본 중세 국가론의 현황과 과제」. 『일본비평』, (11), p.276~280
5. 맺음말
지금까지 가마쿠라 막부 말기의 혼란상과 이를 극복하고자 시도된 개혁의 좌절, 그것이 초래한 정변과 쿠데타, 신정부의 수립과 파탄, 그리고 남북조의 동란 속에서 나타난 지방권력과 막부정권의 제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아시카가 막부의 성립배경은 이처럼 하나의 중심으로 권력을 모으고 중앙의 권력을 통해 전국을 개혁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각 집단들이 각자의 입장을 때로는 투쟁을 통해 조율하고 조정해가면서 균형점을 찾고 각자의 영역에서 사회전체를 조금씩 쇄신해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아시카가 막부의 수립 과정은 이 시기를 하나의 맥락으로 풀어낸다는 것이 난망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위 권문체제론에서 거론되는 일본 중세의 행위자들, 공경귀족, 사원세력, 무가세력 등은 이 시기에도 일본사의 변치 않는 상수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 바로 무가세력의 중추이자 근간이라 볼 수 있었던 고케닌 계급이었다. 그들은 막부라는 무형의 권력을 사회에서 현현하고 있었던 존재들이었으며 동시에 필요에 따라서는 천황과 조정의 수호자가 되기도 하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 두 가지 면이 서로 공존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는 점이 무가정권의 성격을 규명하는 열쇠임은 명백할 것이다. 또한 천황가와 조정의 권력이 중세의 일본인들에게 물리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을 넘나들며 다채롭게 행사되고 있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조 시대를 다룬 태평기 등의 군담소설에서 당대의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난맥상이 상당수 백성들에게는 천황가 분열로 인한 천재지변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남북조의 동란이 단순히 무로마치 시대로의 이행을 위한 과도기로 해석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게 한다. 이들 모두를 고려한다면 막부정권 유무 혹은 막정 지도자의 가문이 하나의 시대를 대표할 수 있다는 시각은 분명 재고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중세사 연구의 첫발로서 아시카가 막부를 전후한 이 시기가 작지 않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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