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면서.
2.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서론
3. 초기 바르트
4. A Change in the Later Barth? 후기 바르트는 변화했는가?
5. 나가는 말
2.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서론
3. 초기 바르트
4. A Change in the Later Barth? 후기 바르트는 변화했는가?
5. 나가는 말
본문내용
신학 명제는 개인 문장이기 때문에 개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교회의 사역자의 위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교회 사역자는 교회에 위탁된 복음을 지키고 전하는 일을 한다.
이것은 레탐은 바르트가 정통 기독론을 향하고 있다고 밝히는 부분이다(469쪽). 안휘포스타시아( the classic dogma of anhypostasia), 엔휘스타시아(enhypostasia) 구도이다. 레탐은 두 어휘는 모두 정통 교리 어휘로 채택하고 있다. 바르트가 두 쌍으로 만들었겠지만 정통 신학의 연속이 전혀 아니다. 로고스 아사르코스와 로고스 엔사르코스, 안휘포스타스, 엔휘포스타스로 연결된 개념이다. 안휘포스타시스는 서철원 박사의 저서에서는 ‘무인격적취택’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성육신하신 예수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신학적 묵상이다. 성육신하신 예수에게 인간 인격이 없고(impersonal humanity), 신적 위격(Divine Person)이 있는 구도로 성육신 논의를 종결시킨 어휘이다. 그리고 엔휘포스타시스는 인간 예수의 인격 안에서 구현된 신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혀 다른 개념인데, 레탐은 놀랍게도 연속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통신학을 인정한다면 바르트의 신학 어휘를 채택할 수 없다. 바르트의 신학을 정당하게 인정하는 부류에서는 반드시 종교다원주의 체계로 나간다.
레탐은 몰트만등 바르트보다 더 과격한 신학자보다 덜 과격하다고 밝힌다. 그것은 옳다. 바르트 신학이 보수적이라고 평가받은 것은 서구 신학이 역사적 기독론에서 우주적 기독론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우주적 기독론은 생태신학으로 창조와 영혼을 동일시키시는 구도인데, 필자는 세련된 범신론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균진은 우주적 기독론의 근거에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 있다고 주장한다.
Is the Holy Spirit a Person? 성령은 하나의 위격인가?(471쪽)
레탐은 바르트가 양태론이 아니며, 어거스틴주의를 계승한 사역자로 평가한다(471쪽). 바르트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을 맺어주는 사랑의 띠로 간주한다(471쪽). 레탐은 이 문장에 대해서도 이상함을 감지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로 발출되는 성령이 정통신학이고, 성령께서 예수와 백성을 연합시키는 끈이라는 것이 칼빈 신학이다. 사랑은 자유주의가 기독교를 구원 종교에서 사랑의 종교로 전환시킨 어휘이다. 더 나가 레탐은 바르트가 어거스틴의 약점을 보완했다고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471쪽). 필자는 레탐이 바르트를 일위격 신관(one person God)임을 밝히면서도, 어떻게 성령이 3위격 하나님(three person)이 된다고 진술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레탐은 더 나가 윌리엄스가 『교회교의학』 I/1에서 바르트 사상을 의심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474쪽).
Ambiguous Opposition to Modalism 양태론에 대한 모호한 반대
바르트는 양태론자가 아니다. 바르트는 양태론자가 될 수 없다. 그렇게 표출된 것까지도 거부 혹은 혐오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다신론 체계를 거부한다. 바르트는 개혁신학에서 영원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구원 경륜(구원협약)을 이신론으로 평가하여 다신론으로 규정하고 우상숭배로 거부했다.
5. 나가는 말
레탐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학생으로 삼위일체론 출판 소식을 듣고 바로 구입해서 칼 바르트 부분만을 읽었다. 레탐은 기독교 정통 삼위일체 교리와 바르트가 제시한 신 이해를 연속적으로 정당하게 평가했다. 정당한 배치가 될 수 없다.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말하지 못하는 쉴라이어마허의 그늘에서 신학한 학생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선생보다 더 용기있게 삼위일체 체계를 해체하고 유일신 체계로 체계화시킨 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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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레탐은 바르트가 정통 기독론을 향하고 있다고 밝히는 부분이다(469쪽). 안휘포스타시아( the classic dogma of anhypostasia), 엔휘스타시아(enhypostasia) 구도이다. 레탐은 두 어휘는 모두 정통 교리 어휘로 채택하고 있다. 바르트가 두 쌍으로 만들었겠지만 정통 신학의 연속이 전혀 아니다. 로고스 아사르코스와 로고스 엔사르코스, 안휘포스타스, 엔휘포스타스로 연결된 개념이다. 안휘포스타시스는 서철원 박사의 저서에서는 ‘무인격적취택’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성육신하신 예수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신학적 묵상이다. 성육신하신 예수에게 인간 인격이 없고(impersonal humanity), 신적 위격(Divine Person)이 있는 구도로 성육신 논의를 종결시킨 어휘이다. 그리고 엔휘포스타시스는 인간 예수의 인격 안에서 구현된 신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혀 다른 개념인데, 레탐은 놀랍게도 연속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통신학을 인정한다면 바르트의 신학 어휘를 채택할 수 없다. 바르트의 신학을 정당하게 인정하는 부류에서는 반드시 종교다원주의 체계로 나간다.
레탐은 몰트만등 바르트보다 더 과격한 신학자보다 덜 과격하다고 밝힌다. 그것은 옳다. 바르트 신학이 보수적이라고 평가받은 것은 서구 신학이 역사적 기독론에서 우주적 기독론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우주적 기독론은 생태신학으로 창조와 영혼을 동일시키시는 구도인데, 필자는 세련된 범신론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균진은 우주적 기독론의 근거에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 있다고 주장한다.
Is the Holy Spirit a Person? 성령은 하나의 위격인가?(471쪽)
레탐은 바르트가 양태론이 아니며, 어거스틴주의를 계승한 사역자로 평가한다(471쪽). 바르트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을 맺어주는 사랑의 띠로 간주한다(471쪽). 레탐은 이 문장에 대해서도 이상함을 감지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로 발출되는 성령이 정통신학이고, 성령께서 예수와 백성을 연합시키는 끈이라는 것이 칼빈 신학이다. 사랑은 자유주의가 기독교를 구원 종교에서 사랑의 종교로 전환시킨 어휘이다. 더 나가 레탐은 바르트가 어거스틴의 약점을 보완했다고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471쪽). 필자는 레탐이 바르트를 일위격 신관(one person God)임을 밝히면서도, 어떻게 성령이 3위격 하나님(three person)이 된다고 진술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레탐은 더 나가 윌리엄스가 『교회교의학』 I/1에서 바르트 사상을 의심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474쪽).
Ambiguous Opposition to Modalism 양태론에 대한 모호한 반대
바르트는 양태론자가 아니다. 바르트는 양태론자가 될 수 없다. 그렇게 표출된 것까지도 거부 혹은 혐오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다신론 체계를 거부한다. 바르트는 개혁신학에서 영원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구원 경륜(구원협약)을 이신론으로 평가하여 다신론으로 규정하고 우상숭배로 거부했다.
5. 나가는 말
레탐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학생으로 삼위일체론 출판 소식을 듣고 바로 구입해서 칼 바르트 부분만을 읽었다. 레탐은 기독교 정통 삼위일체 교리와 바르트가 제시한 신 이해를 연속적으로 정당하게 평가했다. 정당한 배치가 될 수 없다.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말하지 못하는 쉴라이어마허의 그늘에서 신학한 학생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선생보다 더 용기있게 삼위일체 체계를 해체하고 유일신 체계로 체계화시킨 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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