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삼국유사의 성격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2.신라의 민족통합과 향가의 발생,발전,쇠퇴 과정에 대해 서술하시오.
2.신라의 민족통합과 향가의 발생,발전,쇠퇴 과정에 대해 서술하시오.
본문내용
간략히 본다면 3명의 화랑이 유람을 떠나려자 혜성이 떨어지고, 융청사가 불교의 신통력으로 혜성과 함께 왜군을 물리치게 되면서 나라가 안정되었다는 설화를 배경으로 잡았다. 이 내용을 본다면 기본적으로 향가라는 특성 상 민간에서 주로 부르는 노래라는 점이 있겠지만, 같은 시기에 나온 서동요와 다른 성향을 띄고 있다.
서동요의 경우에는 형식을 4구체의 형식으로 민요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나 혜성가는 10구체로 들어가게 되며,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민요의 형식의 장점을 가져오고, 당시 기득권층이 요구하는 통합을 가져오기 위해 불교적인 가사와 기득집단인 화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오게 함으로써 민중이 자연스럽게 국가와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향가의 성행은 8세기라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향가 중 대다수가 8세기에 나온 향가들인데, 성덕왕 때부터 원성왕까지 지속적으로 향가가 만들어지고, 계층을 따지지 않고 알려졌다는 점이다. 당시 지어진 향가로는 헌화가, 원가, 재망매가, 도솔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도천수대비가, 우적가가 남아있는 향가로 있다. 민족 전체적으로 향가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고, 이를 만들어내는 집단 또한 단순히 지배층에 속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알리고 즐길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점이 엿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향가 또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통일신라가 저물어가는 9세기에 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신라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화랑집단의 변색을 통해 본래 향가에서 그려지는 화랑들의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고, 향가 자체의 성격 또한 변질되었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또한 향가 표기에 대한 어려움 또한 향가의 쇠퇴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향가는 불교를 모시고 있는 소수 집단을 통해 전해지게 되는데, 향가의 기능이 민족통합이라는 기능에서 승려들에게 전해지는 불교 수행자의 노래로 변하게 되었다. 향가는 고려 시대에도 11수가 존재하는데, 해당 내용들은 불교에 대한 기원을 주된 내용으로 들어나기 때문이다. 원왕생가의 경우에는 서방정토 왕생의 염원을 수행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보현시원가는 불교 경전의 교리를 노래하는 작품으로 민중이 이해하기엔 대중성이 떨어진 향가이기도 했다. 결국 향가의 표기에 대한 어려움도 있었지만, 점차 소수 집단이 다루게 되면서 그에 맞게 향가 또한 변화기를 맞이하고 쇠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 편찬의 유기성 문제/이강래/2010/호남사학회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91602
『삼국유사』 소재 향가의 불교적 성격과 그 의미/김기종/2014/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71733
서동요의 경우에는 형식을 4구체의 형식으로 민요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나 혜성가는 10구체로 들어가게 되며,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민요의 형식의 장점을 가져오고, 당시 기득권층이 요구하는 통합을 가져오기 위해 불교적인 가사와 기득집단인 화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오게 함으로써 민중이 자연스럽게 국가와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향가의 성행은 8세기라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향가 중 대다수가 8세기에 나온 향가들인데, 성덕왕 때부터 원성왕까지 지속적으로 향가가 만들어지고, 계층을 따지지 않고 알려졌다는 점이다. 당시 지어진 향가로는 헌화가, 원가, 재망매가, 도솔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도천수대비가, 우적가가 남아있는 향가로 있다. 민족 전체적으로 향가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고, 이를 만들어내는 집단 또한 단순히 지배층에 속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알리고 즐길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점이 엿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향가 또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통일신라가 저물어가는 9세기에 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신라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화랑집단의 변색을 통해 본래 향가에서 그려지는 화랑들의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고, 향가 자체의 성격 또한 변질되었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또한 향가 표기에 대한 어려움 또한 향가의 쇠퇴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향가는 불교를 모시고 있는 소수 집단을 통해 전해지게 되는데, 향가의 기능이 민족통합이라는 기능에서 승려들에게 전해지는 불교 수행자의 노래로 변하게 되었다. 향가는 고려 시대에도 11수가 존재하는데, 해당 내용들은 불교에 대한 기원을 주된 내용으로 들어나기 때문이다. 원왕생가의 경우에는 서방정토 왕생의 염원을 수행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보현시원가는 불교 경전의 교리를 노래하는 작품으로 민중이 이해하기엔 대중성이 떨어진 향가이기도 했다. 결국 향가의 표기에 대한 어려움도 있었지만, 점차 소수 집단이 다루게 되면서 그에 맞게 향가 또한 변화기를 맞이하고 쇠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 편찬의 유기성 문제/이강래/2010/호남사학회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91602
『삼국유사』 소재 향가의 불교적 성격과 그 의미/김기종/2014/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7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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