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책 소개
2.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가 던진 질문
3. 플라톤의 이상과 현실 속 좋은 삶
4.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
5. 운명에 집중한 스토아학파
6. 참된 쾌락을 찾는 에피쿠로스
Ⅲ. 결론
Ⅳ. 출처 및 참고자료
Ⅱ. 본론
1. 책 소개
2.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가 던진 질문
3. 플라톤의 이상과 현실 속 좋은 삶
4.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
5. 운명에 집중한 스토아학파
6. 참된 쾌락을 찾는 에피쿠로스
Ⅲ. 결론
Ⅳ. 출처 및 참고자료
본문내용
. 오히려 인간을 더 무기력하게 만드는 작용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스토아학파가 운명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저항으로 발생하는 무기력을 느끼기보다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요소로서 삶을 보았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은 삶에 가까워지는 방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무기력함을 인정하면서 파생되는 부분이 삶을 허무 자체로 인정하는 것 같다. 본문에 따르면 ‘만신창이가 된 삶에 대한 유일한 영약은 바로 죽음이다’ 앞의 책. p.120
라는 말이 있다. 현재의 안타까움을 죽음으로서 위로하고자 한 스토아학파의 삶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과는 멀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운명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수용함으로써 더 상처받지 않고자 한 마음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의 연속을 과연 좋은 삶이라 칭할 수 있을지 곱씹어 생각해도 의문만이 남는다.
6. 참된 쾌락을 찾는 에피쿠로스
인간은 다양한 부분에서 쾌락을 느낀다. 맛있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느끼는 쾌락, 재밌는 일을 함으로써의 쾌락, 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함으로써의 쾌락 등 쾌락의 모습은 다양하고 다채롭다.
하지만 대부분 철학이 쾌락의 추구를 멀리했다는 점에서 앞에 살펴본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더 대조되는 듯하다. 같은 시기에 유행하였으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과연 어떠한 철학이 우리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 것인가에 관해 집중하게 하였다. 에피쿠로스가 쾌락을 추구하였으나 무차별한 추구가 아니었다는 점은 절제해야 할 부분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눈앞의 이익을 위해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에피쿠로스학파가 추구한 쾌락은 진정한 쾌락, 참된 쾌락이라 칭할 수 있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추구와 중용의 모습이 에피쿠로스학파가 추구하는 참된 쾌락과 닮았다는 생각도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되 중용을 지키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참된 쾌락만을 따르고자 한 에피쿠로스가 내가 원하는 좋은 삶에 부합한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참는 게 능사가 아니기에 때로는 변화가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행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진정한 쾌락의 성취도 어렵다고 본다. 이에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참된 쾌락, 절제된 쾌락을 즐길 줄 알아야 삶 역시 즐기며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게 내 판단이다. 에피쿠로스가 헐벗지 않고 굶주리지 않을 정도만을 추구하였다는 것도 욕심부릴수록 변해가는 인간의 욕망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본다. 쓸데없이 많은 것이 존재한다면 이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더 얻고자 하기에 인간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고 본다. 마치 재력가에서 일어나는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법정 공방이라든지,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남의 희생을 강요하는 행위 등이 이를 대변하는 모습이다. 이에 현재에 만족하면서 삶을 가치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에 가까운 삶이 될 것이다.
Ⅲ. 결론
좋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처럼 무엇이 선이며 선을 행하기 위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시각도 존재하며 때로는 에피쿠로스처럼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정적인 쾌락을 통해 삶의 만족도를 느끼고자 하는 시각도 있는 것이다. 여러 철학에서 바라보는 삶의 방향을 함께 생각해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삶의 모습은 어떠하였고 현재 어떠한 모습으로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해 고심했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가치관으로 삶을 바라보고 꾸려나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스스로 해보았지만 그래도 결론은 현재의 가치와 일관된다는 결론을 가져왔다.
누구나 주변 환경이 동일하지 않으며 앞으로의 발전 방향도 같지 않다. 이에 어떠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더라도 단면만으로 그를 비판하거나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후대에도 칭송받는 철학자들의 사상에도 각기 다른 모습이 존재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지금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죽음으로써 그 생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좋은 삶에 대해 고민하면서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떠올려보았다. 차근히 만들어온 나의 마지막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현재를 제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좋은 삶에 대한 각자의 태도를 존중하며 나만이 추구하는 좋은 삶을 유지하고 싶다.
Ⅳ. 출처 및 참고자료
김상봉(2012).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의 탄생. 한길사
하지만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은 삶에 가까워지는 방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무기력함을 인정하면서 파생되는 부분이 삶을 허무 자체로 인정하는 것 같다. 본문에 따르면 ‘만신창이가 된 삶에 대한 유일한 영약은 바로 죽음이다’ 앞의 책. p.120
라는 말이 있다. 현재의 안타까움을 죽음으로서 위로하고자 한 스토아학파의 삶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과는 멀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운명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수용함으로써 더 상처받지 않고자 한 마음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의 연속을 과연 좋은 삶이라 칭할 수 있을지 곱씹어 생각해도 의문만이 남는다.
6. 참된 쾌락을 찾는 에피쿠로스
인간은 다양한 부분에서 쾌락을 느낀다. 맛있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느끼는 쾌락, 재밌는 일을 함으로써의 쾌락, 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함으로써의 쾌락 등 쾌락의 모습은 다양하고 다채롭다.
하지만 대부분 철학이 쾌락의 추구를 멀리했다는 점에서 앞에 살펴본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더 대조되는 듯하다. 같은 시기에 유행하였으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과연 어떠한 철학이 우리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 것인가에 관해 집중하게 하였다. 에피쿠로스가 쾌락을 추구하였으나 무차별한 추구가 아니었다는 점은 절제해야 할 부분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눈앞의 이익을 위해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에피쿠로스학파가 추구한 쾌락은 진정한 쾌락, 참된 쾌락이라 칭할 수 있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추구와 중용의 모습이 에피쿠로스학파가 추구하는 참된 쾌락과 닮았다는 생각도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되 중용을 지키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참된 쾌락만을 따르고자 한 에피쿠로스가 내가 원하는 좋은 삶에 부합한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참는 게 능사가 아니기에 때로는 변화가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행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진정한 쾌락의 성취도 어렵다고 본다. 이에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참된 쾌락, 절제된 쾌락을 즐길 줄 알아야 삶 역시 즐기며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게 내 판단이다. 에피쿠로스가 헐벗지 않고 굶주리지 않을 정도만을 추구하였다는 것도 욕심부릴수록 변해가는 인간의 욕망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본다. 쓸데없이 많은 것이 존재한다면 이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더 얻고자 하기에 인간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고 본다. 마치 재력가에서 일어나는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법정 공방이라든지,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남의 희생을 강요하는 행위 등이 이를 대변하는 모습이다. 이에 현재에 만족하면서 삶을 가치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에 가까운 삶이 될 것이다.
Ⅲ. 결론
좋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처럼 무엇이 선이며 선을 행하기 위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시각도 존재하며 때로는 에피쿠로스처럼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정적인 쾌락을 통해 삶의 만족도를 느끼고자 하는 시각도 있는 것이다. 여러 철학에서 바라보는 삶의 방향을 함께 생각해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삶의 모습은 어떠하였고 현재 어떠한 모습으로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해 고심했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가치관으로 삶을 바라보고 꾸려나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스스로 해보았지만 그래도 결론은 현재의 가치와 일관된다는 결론을 가져왔다.
누구나 주변 환경이 동일하지 않으며 앞으로의 발전 방향도 같지 않다. 이에 어떠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더라도 단면만으로 그를 비판하거나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후대에도 칭송받는 철학자들의 사상에도 각기 다른 모습이 존재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지금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죽음으로써 그 생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좋은 삶에 대해 고민하면서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떠올려보았다. 차근히 만들어온 나의 마지막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현재를 제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좋은 삶에 대한 각자의 태도를 존중하며 나만이 추구하는 좋은 삶을 유지하고 싶다.
Ⅳ. 출처 및 참고자료
김상봉(2012).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의 탄생.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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