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 여호와는 나의 목자(23:1-6)
1. 부족함이 없음(23:1)
2. 안식으로 인도하심(23:2)
3. 영혼을 만족케 하심(23:3)
4. 보호해 주심(23:4)
5. 풍성한 복으로 가득하게 하심(23:5)
6. 영원히 함께하심(23:6)
1. 부족함이 없음(23:1)
2. 안식으로 인도하심(23:2)
3. 영혼을 만족케 하심(23:3)
4. 보호해 주심(23:4)
5. 풍성한 복으로 가득하게 하심(23:5)
6. 영원히 함께하심(23:6)
본문내용
그도 두려워 넘어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주 엎드러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온갖 시련중에서도 그 어려움을 이기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그를 내어버려 두지 않으셨으며 가장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큰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고난 자체를 회상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며 그러한 사건들이 그의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웠을지라도 그는 그 모든 악과 시험으로부터 건짐받게 해주셨던 여호와의 손길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어두움은 사라지고 그 모든 것들로 인하여 오히려 그의 마음은 감사와 감격으로 뒤덮입니다. 그의 경험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가깝게 되었고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는 신앙고백이 더욱 진실한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최종적 형태인 죽음으로 다가올지라도 그는 그의 보호자요 위로자이셨던 여호와를 죽음까지 넘어선 안내자로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는 모든 두려움을 벗어났으며 확신에 찬 소망으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난까지도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는 주님의 보호 외에 내가 더 믿고 의지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보호 안에서만 안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보호만으로 만족하며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양무리들을 들짐승들로부터 보호하며 방어하기 위한 막대기와 양떼를 인도하면서 통제하기 위한 지팡이입니다. 즉 목자의 도구는 양떼들을 위하여 다양한 쓰임새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같은 목자의 도구의 연상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의 보호를 위해 가장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심으로써 어떠한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위”, 즉 평강 가운데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시인은 마치 개인의 신앙고백과 같은 진술로 표현하면서 여호와의 보호 외에 자신은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5. 풍성한 복으로 가득하게 하심(23:5)
시인은 그의 일평생을 회고해 보면서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잔치상에 초대받은 손님과 같은 것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즉 주님이 목자로 묘사되다가 잔치를 마련한 초청자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그의 평생을 통해 풍성한 식탁을 마련해 주신 분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가 누렸던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삶 가운데는 쓰라린 고난과 그로 인한 슬픔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그의 삶을 잔치상이 벌어진 축제로까지 승화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고난 그 자체였던 “삶”을 축제로 변화시킨 것임을 고백하면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잔치 자리에 초청하셔서 어떻게 대접하셨습니까? 그 대우는 정중하고도 극진한 것이었습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중한 대접을 나타내며 “잔이 넘치게” 하신 것은 풍성한 복으로 채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게 되었던 삶의 모든 순간순간들을 생각할 때 시인의 평생은 고난으로 결론 짓지 않고 기쁨과 감사의 축제로 결론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희열에 도달한 시인은 자신을 고난 속에 얽매어 두려고 했던 그의 원수들까지도 자신의 승리의 고백을 방해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평생을 걷는 삶, 하나님께서 그 삶을 풍성한 복으로 채워주는 인생은 원수들조차도 훼방할 수 없습니다.
6. 영원히 함께하심(23:6)
시인은 과거의 모든 삶을 회고해 본 후 무한한 감사를 느낍니다. 그는 끓어오르는 감동과 형언키 어려운 감격으로, 과거에 그러했듯이 그의 미래를 포함하여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의 삶의 짐을 가볍게 해주신 것이며 그의 삶을 풍성한 축제의 잔치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과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의 영혼에 어두운 그늘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확신이 그의 영혼을 채우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두 성품을 생각하면서 최고조의 기쁨에 도달할 때 그는 인생의 궁극적인 복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참된 복은 하나님과의 영원하고도 깊은 교제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계속 친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것,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 의식적으로 그 관계를 위해 자기 자신을 계속 드리는 것,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참된 복과 의미라고 시인은 결론 짓고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4)
고난 자체를 회상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며 그러한 사건들이 그의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웠을지라도 그는 그 모든 악과 시험으로부터 건짐받게 해주셨던 여호와의 손길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어두움은 사라지고 그 모든 것들로 인하여 오히려 그의 마음은 감사와 감격으로 뒤덮입니다. 그의 경험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가깝게 되었고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는 신앙고백이 더욱 진실한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최종적 형태인 죽음으로 다가올지라도 그는 그의 보호자요 위로자이셨던 여호와를 죽음까지 넘어선 안내자로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는 모든 두려움을 벗어났으며 확신에 찬 소망으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난까지도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는 주님의 보호 외에 내가 더 믿고 의지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보호 안에서만 안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보호만으로 만족하며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양무리들을 들짐승들로부터 보호하며 방어하기 위한 막대기와 양떼를 인도하면서 통제하기 위한 지팡이입니다. 즉 목자의 도구는 양떼들을 위하여 다양한 쓰임새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같은 목자의 도구의 연상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의 보호를 위해 가장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심으로써 어떠한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위”, 즉 평강 가운데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시인은 마치 개인의 신앙고백과 같은 진술로 표현하면서 여호와의 보호 외에 자신은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5. 풍성한 복으로 가득하게 하심(23:5)
시인은 그의 일평생을 회고해 보면서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잔치상에 초대받은 손님과 같은 것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즉 주님이 목자로 묘사되다가 잔치를 마련한 초청자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그의 평생을 통해 풍성한 식탁을 마련해 주신 분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가 누렸던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삶 가운데는 쓰라린 고난과 그로 인한 슬픔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그의 삶을 잔치상이 벌어진 축제로까지 승화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고난 그 자체였던 “삶”을 축제로 변화시킨 것임을 고백하면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잔치 자리에 초청하셔서 어떻게 대접하셨습니까? 그 대우는 정중하고도 극진한 것이었습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중한 대접을 나타내며 “잔이 넘치게” 하신 것은 풍성한 복으로 채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게 되었던 삶의 모든 순간순간들을 생각할 때 시인의 평생은 고난으로 결론 짓지 않고 기쁨과 감사의 축제로 결론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희열에 도달한 시인은 자신을 고난 속에 얽매어 두려고 했던 그의 원수들까지도 자신의 승리의 고백을 방해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평생을 걷는 삶, 하나님께서 그 삶을 풍성한 복으로 채워주는 인생은 원수들조차도 훼방할 수 없습니다.
6. 영원히 함께하심(23:6)
시인은 과거의 모든 삶을 회고해 본 후 무한한 감사를 느낍니다. 그는 끓어오르는 감동과 형언키 어려운 감격으로, 과거에 그러했듯이 그의 미래를 포함하여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의 삶의 짐을 가볍게 해주신 것이며 그의 삶을 풍성한 축제의 잔치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과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의 영혼에 어두운 그늘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확신이 그의 영혼을 채우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두 성품을 생각하면서 최고조의 기쁨에 도달할 때 그는 인생의 궁극적인 복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참된 복은 하나님과의 영원하고도 깊은 교제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계속 친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것,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 의식적으로 그 관계를 위해 자기 자신을 계속 드리는 것,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참된 복과 의미라고 시인은 결론 짓고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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