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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영양군 개요
2. 봉감모전오층석탑
3. 현2동 모전오층석탑
4. 현1동 십이지삼층석탑
5. 화천리 삼층석탑
6. 신라석탑의 장엄
7. 삼지동 삼층모전석탑
8. 서석지
8-1. 서석지의 연혁과 구성
8-2. 서석지원의 입지와 공간구성
8-3. 서석지의 조영의식
8-4. 임천정원으로서의 서석지
8-5. 서석지의 시경
9. 한국정원의 특징
9-1. 정원의 의미
9-2. 일본정원의 발달사와 정원구조의 의미
9-3. 정원 속의 상징세계
9-4. 편액과 암각서의 어원과 의미
9-5. 한국정원의 특징
Ⅱ. 청송지역
1. 청송군 개요
2. 주왕산국립공원
3. 대전사
4. 달기 약수탕
2. 봉감모전오층석탑
3. 현2동 모전오층석탑
4. 현1동 십이지삼층석탑
5. 화천리 삼층석탑
6. 신라석탑의 장엄
7. 삼지동 삼층모전석탑
8. 서석지
8-1. 서석지의 연혁과 구성
8-2. 서석지원의 입지와 공간구성
8-3. 서석지의 조영의식
8-4. 임천정원으로서의 서석지
8-5. 서석지의 시경
9. 한국정원의 특징
9-1. 정원의 의미
9-2. 일본정원의 발달사와 정원구조의 의미
9-3. 정원 속의 상징세계
9-4. 편액과 암각서의 어원과 의미
9-5. 한국정원의 특징
Ⅱ. 청송지역
1. 청송군 개요
2. 주왕산국립공원
3. 대전사
4. 달기 약수탕
본문내용
된 화산활동은 지금으로부터 약7천만 년 전의 일로 여겨진다. 이때가 한반도에 공룡들이 떼지어 살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산들은 주왕산 가까이에 포항의 내연산이 있고, 남쪽으로 영천 보현산, 청도 운문산, 거제, 남해를 거쳐, 고흥반도, 완도, 진도들로 이어진다.
주왕산의 매력은 그런 기암절경에도 있지만, 주왕산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전설에도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779년에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처 들어갔으나 크게 패하여 쫓기다가 마침내 숨어들어온 곳이 이곳이었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주왕을 섬멸해 달라고 신라에 요청하자 신라에서는 마일성 장군 5형제를 보내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때 주왕은 기암을 노적가리처럼 위장하여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러한 전설과 관련하여 주왕산에는 주왕의 군사들이 무기를 숨겼다는 무장굴, 신라군사를 막기 위해 주왕산 입구에서 나한봉에 걸쳐 쌓았다는 자하성(주방산성), 주왕의 군사들이 훈련을 하고 그 안에서 주왕의 딸 백련공주가 성불했다는 연화굴 등이 있다. 또 주왕굴은 주왕이 마장군을 피해 있으면서 위에서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가 마장군이 쏜 화살과 철퇴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이때 주왕이 흘린 피에서 수달래가 돋아나니, 지금까지도 주방천가는 늦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붉은 꽃이 흐드러져 넘실된다. 진달래보다 더 진하고 검붉은 반점이 있는 이 꽃은 주왕산의 자랑이기도 해서 해마다 5월초순에는 ‘주왕산 수달래제’가 열린다.
신라시대 김주원도 이 산에 은거했었다. 신라 하대에 김주원은 선덕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추대되었으나 뒤에 원성왕이 된 김경신에 의해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이곳 석병산에 은거했다고 한다. 그가 집을 짓고 머물렀던 곳은 주왕산 뒤편의 궁지(宮趾)라고 하는데 더러 깨진 기왓장이 발견도기도 한다.
3. 대전사(大典寺)
주왕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청송군의 문화재 자료에 의하면 672년(문무왕 12)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주왕사적에 의하면 신라 말인 892년(진성여왕 6)에 낭공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대전사의 창건 동기는 절 이름, 벽화, 전설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종교적인 동기 이외에 김범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한 뜻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창건 당시는 웅장한 절이었음에 틀림없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 후 1672년(현종 13)에 중창, 1976년에 번와 및 단청을 하였으며 1988년에 봉향각· 수선당· 회연당을 신축하였다. 또한 1995년에 명부전과 산신각을 이전, 신축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에는 4방 4불 3루각과 쌍탑이 있었다고 한다.
4방은 열선당· 탐진당· 수월당· 한산전이고 4불전은 보광전, 극락전, 관음전, 명부전이며 3루각은 용화루· 범종각· 응향각이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보광전과 명부전뿐이다.
보광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의 다포양식으로 공포는 외2출목, 내2출목을 이루는데 외부에서는 양서로, 내부에서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는 조선 중기 이후의 목조건축 양식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절에는 금강탑이라는 쌍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파손되어 원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며 일부 탑신 조각만 보광전 앞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이 탑신 조각에는 사천왕상이 정교하게 돋을 새김 된 부분이 있다.
사천왕상이 우리나라에서 크게 성행한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대전사 금강탑 조각에는 도검지물의 동방신장, 장창지물의 서방신장, 삼고지물의 남방신장, 보탑지물의 북방신장이 각각 한 쌍씩 있다. 이 탑의 원래 모습은 사적 제 46호인 경주의 원원사지 삼층석탑과 보물 제610호인 영양군 현일동 삼층석탑과 비슷하였을 것이라 한다. 이 금강탑이 보존만 잘 되었다면 보물급 문화재가 되었을 것이나
대전사에서 나온 유물로는 금동여래입상과 금동이불병좌상이 있다. 금동여래입상은 1968년 4월 1일 절터 옆의 밭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때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은 모두 7점으로 높이가 5.5센티미터부터 15.2센티미터까지의 작은 불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발굴당시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에는 금동이불병좌상도 보관, 전시되어 있는데 대좌 위에 두 개의 불상이 나란히 앉아 있다. 이 불상은 높이가 6.3cm, 아래 너비가 9.6cm의 작은 불상이며 금동여래입상과 같은 시대인 통일신라시대로 분류되고 있다.
대전사에는 이여송 장군의 친필 목판도 있다. 가로 42.5cm, 세로 24.5cm의 목판에 새겨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당시 주왕산에서 승병 훈련을 시키고 있던 사명대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의승도대장 사명대사 귀하의로운 승장 사명 대사의 장도에 삼가 보냅니다.세상의 명예와 지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불도와 선도만을 배우십니까?지금 나라의 일이 위급하다 하오니 의승병을 모두 데리고 산을 내려오기 바랍니다.
4. 달기 약수탕
달기약수가 발견된 것은 조선 철종(1849~1863)때로, 금부도사를 지낸 권성하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안동에서 이곳 부곡리에 자리잡고 살면서 마을사람들과 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바위틈에서 솟아오르는 약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맛을 보았더니 트림이 나오고 뱃속이 편안하매 위장이 나쁜 사람이 즐겨 마셨는데, 그 뒤부터 약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 개울을 끼고 열 군데에서 샘이 솟는데 신기하게 저마다 맛이 다르다. 원탕인 하탕이 있는 곳이 중심이 되어 상류로 올라가면서 중탕, 상탕, 신탕, 하탕 등이 있다. 약물로 밥을 지으면 밥의 색깔이 푸르며 찰기가 있고, 맛은 설탕을 제거한 사이다의 맛을 느끼게 한다. 위장, 신경통 만성부인병, 빈혈증 등 성인병치료에 효력이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1. 주왕산2. 대전사3. 신촌 약수탕4. 달기 약수탕5. 주왕산 관광농원6. 청송 자연휴양림7. 수정사8. 신성계곡. 방호정.9. 주산지
주왕산의 매력은 그런 기암절경에도 있지만, 주왕산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전설에도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779년에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처 들어갔으나 크게 패하여 쫓기다가 마침내 숨어들어온 곳이 이곳이었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주왕을 섬멸해 달라고 신라에 요청하자 신라에서는 마일성 장군 5형제를 보내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때 주왕은 기암을 노적가리처럼 위장하여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러한 전설과 관련하여 주왕산에는 주왕의 군사들이 무기를 숨겼다는 무장굴, 신라군사를 막기 위해 주왕산 입구에서 나한봉에 걸쳐 쌓았다는 자하성(주방산성), 주왕의 군사들이 훈련을 하고 그 안에서 주왕의 딸 백련공주가 성불했다는 연화굴 등이 있다. 또 주왕굴은 주왕이 마장군을 피해 있으면서 위에서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가 마장군이 쏜 화살과 철퇴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이때 주왕이 흘린 피에서 수달래가 돋아나니, 지금까지도 주방천가는 늦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붉은 꽃이 흐드러져 넘실된다. 진달래보다 더 진하고 검붉은 반점이 있는 이 꽃은 주왕산의 자랑이기도 해서 해마다 5월초순에는 ‘주왕산 수달래제’가 열린다.
신라시대 김주원도 이 산에 은거했었다. 신라 하대에 김주원은 선덕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추대되었으나 뒤에 원성왕이 된 김경신에 의해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이곳 석병산에 은거했다고 한다. 그가 집을 짓고 머물렀던 곳은 주왕산 뒤편의 궁지(宮趾)라고 하는데 더러 깨진 기왓장이 발견도기도 한다.
3. 대전사(大典寺)
주왕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청송군의 문화재 자료에 의하면 672년(문무왕 12)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주왕사적에 의하면 신라 말인 892년(진성여왕 6)에 낭공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대전사의 창건 동기는 절 이름, 벽화, 전설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종교적인 동기 이외에 김범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한 뜻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창건 당시는 웅장한 절이었음에 틀림없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 후 1672년(현종 13)에 중창, 1976년에 번와 및 단청을 하였으며 1988년에 봉향각· 수선당· 회연당을 신축하였다. 또한 1995년에 명부전과 산신각을 이전, 신축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에는 4방 4불 3루각과 쌍탑이 있었다고 한다.
4방은 열선당· 탐진당· 수월당· 한산전이고 4불전은 보광전, 극락전, 관음전, 명부전이며 3루각은 용화루· 범종각· 응향각이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보광전과 명부전뿐이다.
보광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의 다포양식으로 공포는 외2출목, 내2출목을 이루는데 외부에서는 양서로, 내부에서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는 조선 중기 이후의 목조건축 양식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절에는 금강탑이라는 쌍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파손되어 원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며 일부 탑신 조각만 보광전 앞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이 탑신 조각에는 사천왕상이 정교하게 돋을 새김 된 부분이 있다.
사천왕상이 우리나라에서 크게 성행한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대전사 금강탑 조각에는 도검지물의 동방신장, 장창지물의 서방신장, 삼고지물의 남방신장, 보탑지물의 북방신장이 각각 한 쌍씩 있다. 이 탑의 원래 모습은 사적 제 46호인 경주의 원원사지 삼층석탑과 보물 제610호인 영양군 현일동 삼층석탑과 비슷하였을 것이라 한다. 이 금강탑이 보존만 잘 되었다면 보물급 문화재가 되었을 것이나
대전사에서 나온 유물로는 금동여래입상과 금동이불병좌상이 있다. 금동여래입상은 1968년 4월 1일 절터 옆의 밭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때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은 모두 7점으로 높이가 5.5센티미터부터 15.2센티미터까지의 작은 불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발굴당시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에는 금동이불병좌상도 보관, 전시되어 있는데 대좌 위에 두 개의 불상이 나란히 앉아 있다. 이 불상은 높이가 6.3cm, 아래 너비가 9.6cm의 작은 불상이며 금동여래입상과 같은 시대인 통일신라시대로 분류되고 있다.
대전사에는 이여송 장군의 친필 목판도 있다. 가로 42.5cm, 세로 24.5cm의 목판에 새겨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당시 주왕산에서 승병 훈련을 시키고 있던 사명대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의승도대장 사명대사 귀하의로운 승장 사명 대사의 장도에 삼가 보냅니다.세상의 명예와 지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불도와 선도만을 배우십니까?지금 나라의 일이 위급하다 하오니 의승병을 모두 데리고 산을 내려오기 바랍니다.
4. 달기 약수탕
달기약수가 발견된 것은 조선 철종(1849~1863)때로, 금부도사를 지낸 권성하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안동에서 이곳 부곡리에 자리잡고 살면서 마을사람들과 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바위틈에서 솟아오르는 약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맛을 보았더니 트림이 나오고 뱃속이 편안하매 위장이 나쁜 사람이 즐겨 마셨는데, 그 뒤부터 약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 개울을 끼고 열 군데에서 샘이 솟는데 신기하게 저마다 맛이 다르다. 원탕인 하탕이 있는 곳이 중심이 되어 상류로 올라가면서 중탕, 상탕, 신탕, 하탕 등이 있다. 약물로 밥을 지으면 밥의 색깔이 푸르며 찰기가 있고, 맛은 설탕을 제거한 사이다의 맛을 느끼게 한다. 위장, 신경통 만성부인병, 빈혈증 등 성인병치료에 효력이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1. 주왕산2. 대전사3. 신촌 약수탕4. 달기 약수탕5. 주왕산 관광농원6. 청송 자연휴양림7. 수정사8. 신성계곡. 방호정.9. 주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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