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북부지역 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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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포항북부지역 유적답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영일 냉수리신라비
2. 포항 중성리신라비
3. 냉수리 고분
4. 비학산과 법광사지
5. 해월 최시형의 생애와 유적
6. 칠포리 암각화
7. 보경사

본문내용

및 용지판(龍枝板)을 받친 돌) 위에 목조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3) 원진국사 부도비 : 보물 252호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는데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비의 王자를 생각게 하였다.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4). 원진국사 비문
* 세운 시기 : 고려 고종 11년(1224)
「이노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김효인이 교칙에 의해 쓰다.
대저 일심(一心)이란 만법의 총체이므로 6바라밀의 만행이 이를 말미암아 생겨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성품이 영리하고 아둔한 차이가 있으며, 혼미하고 깨달음이 같지 않음으로, 마치 때 묻은 헌옷 속에 보배를 달고 있으나, 알지 못함과 같다. 혹자는 탁한 물에 빠뜨린 보주를 찾으려 하나 찾지 못하니, 이 이치는 미매한 자가 마치 땅 속에 묻혀 있는 보물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미혹한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세상에 출현하시어 삼승과 모든 경전을 설하셨다.…… 이에 대하여 후대의 학자들이 각기 저마다 종파를 세우므로 서로의 주장이 대립하고 모순되어 공과 유에 집착하여, 다른 종파를 비방하면서 자신이 병들었음을 알지 못하고 역설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공과 유를 모두 망각하고, 선과 교를 널리 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는 오직 우리 원진국사 밖에 없지 않는가! 스님의 휘는 승형이요, 자는 영회이며, 속성은 신씨로서 산청출신이다. 선대는 대대로 유가 이었다.……스님은 3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에 의해 양육되다가 7세 때 운문사 연실선사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문성암에 주석하면서 능엄경10권을 모두 열람하고,……능엄경을 으뜸으로 삼았으니, 능엄교법이 세상에 널리 성행하게 된 것은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대금 정우 9년(1221) 여름에 문하생을 모아 놓고 열심히 능엄경을 가르쳤다.……그해에 시자가 임종게를 청하니, 스님은 눈을 뜨고 한참동안 노려보고 이르시기를,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평생 동안 한 게송도 지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게송을 지어달라는 말이냐? 하시고는 입적하시었다.……
위대하시었도다! 진리를 통달한 사람은 사와 생을 일체로 보아 죽음에 당하여도 말씀이 태연자약하여,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이 없으니, 자증과 자오의 법력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10월10일 문도 50여명이 영구를 모시고 팔공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다음날 영골을 수습하여 보경사 동쪽에[神龜山]으로 이장하고 탑을 세웠다. 세수는 51이요, 법랍은 37세였다. 고종 임금께서 부고를 들으시고 크게 애도하시면서 국사로 추증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증정하시었다. 문인들이 탑비를 세우고자 조정에 건의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신에게 비문을 지으라 하명하시었다.……갑신년(1224) 사문 혜적 등이 비석을 세웠다.」
(5) 원진국사 부도
(가)석조부도(石造浮屠)의 발생과 명칭
- 부도의 의미 : 승려의 묘탑(墓塔)
- 어원 : 부도(浮屠)는 부도(浮圖)·부두(浮頭))·포도(蒲圖)·불도(佛圖) 등으로 표기되는데, 어원은 불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스투파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음.
* 불타(佛陀) : Buddha(깨달은 자)의 음역인 붓다·불타에서 부도로 변화
* 불(佛)·부처의 사리→불신사리(佛身舍利)→스투파·탑파·탑에 안치
* 법(法)·경전의 불신사리 대용→법신사리(法身舍利)→스투파·탑파·탑에 안치
* 승(僧)·승려의 사리→승신사리(僧身舍利)→부도에 안치
* 스투파[率堵婆 : 솔도파] : 부도가 승려의 묘탑이므로 사리를 안치하는 스투 파에서 유래
- 석조부도의 발생
9세기에 신행과 도의에 의해 선종이 들어온 뒤 9산 선문을 이루면서 선문제자들의 소속종파가 확정. 종파별로 입적한 그들의 조사를 길이 보존할 조형적인 장골처를 남기려는 뜻과 깨닫기만 하면 부처라는 선종의 불타관에 의해 석조부도 발생. 석조발생의 시기는 대체로 9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됨.
- 부도의 부분별 명칭
(나) 원진국사 부도
기단부의 아래ㆍ중간ㆍ윗받침돌 가운데 3단으로 이루어진 8각 아래받침돌은 맨 윗단에만 연꽃조각이 둘러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겨두었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꽃잎의 끝이 뾰족하고 중앙의 세로선이 볼록하게 돌출되어 당시로서는 드문 모습이다.
탑신은 몸돌이 매우 높아 마치 돌기둥처럼 보이며, 두 쪽 면에 자물쇠모양을 새겨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느리고, 모서리에서 뻗어나가는 곡선의 끝마다 꽃장식이 조그맣게 솟아있다. 8각형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나, 몸돌이 지나치게 길어 전체가 길쭉해 보여 그다지 조각적인 멋은 없다.
(6) 서운암 범종 : 보물 11-1호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중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꼭대기에는 종을 매달기 위한 둥근 고리가 있다. 어깨 부분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40개의 연꽃잎을 세워 두어 넓은 띠를 형성하였다. 이 띠 아래로는 일반적으로 9개의 돌기가 있는 것에 반해 5개의 돌기를 가지고 있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부처의 말씀인 진언을 새겨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사인비구의 초기 제작기법을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조선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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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8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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