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신세대 문화
1. 컴퓨터 문화
2. 음주 문화와 흡연 문화
3. 복장 문화
4. 성 문화
5. 노래 문화
6. 만화 문화
7. 텔레비전 및 비디오 문화
1970-1980년대의 문화
서태지와 힙합문화
1. 컴퓨터 문화
2. 음주 문화와 흡연 문화
3. 복장 문화
4. 성 문화
5. 노래 문화
6. 만화 문화
7. 텔레비전 및 비디오 문화
1970-1980년대의 문화
서태지와 힙합문화
본문내용
될 수록 가정에서 텔레비전 문제로 인해서 부모와 마찰을 빚기 쉽다.
"어머니, 항상 시간 때문에 잔소리하실 때마다 왜 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가끔 공부하다 TV 좀 보면 '야,공부도 못하는 게 지금 뭐하고 있어. 남들은 눈에 불키고 하는데 넌 뭐하냐.' 공부하다 한 프로 보는 것인데 왜 저러실까? 참 답답했습니다."
"난 스포츠 중계,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요. 그러나 부모님들은 공부는 안하고 TV만 본다고 잔소리를 하시죠.물론 고 3이기 때문에 그러시겠지만 고 3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만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TV를 보면 그래도 스트레스가 풀리거든요. 당구장 오락실 만화방보다는 낫잖아요?"
1970-1980년대의 문화
1960∼70년대에 진행된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으로 자본주의화, 도시화가 진행되고 교통과 통신, 대중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대중문화의 조건들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대중문화의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텔레비전의 보급이었다.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소득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국민의 관심과 여가를 텔레비전이라는 오락매체에 묶어놓기 위한 정부의 강력한 지원도 뒤따랐다. 박정희는 방송국과 언론 등 대중매체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가하여 방송의 경우 프로그램편성에 있어서도 정치적 선전을 위한 방법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유신체제하에서 행해진 수많은 악행과 사회적 부조리는 단순한 국민의 눈가림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청년문화' 또는 '대학문화'라고 일컬어지는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의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번지고 있었다. 흔히 청바지와 통기타로 상징되는 이것은 모두 미국에서 들어왔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유신체제의 암울한 시대상황에 대한 반항의 표상처럼 되어버렸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1960년대 후반 서구와 미국을 휩쓴 베트남 참전 반대운동, 인종차별 반대투쟁, 여성해방운동과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구사회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된 '스튜던트 파워'는 정치적인 좌절과 함께 청바지와 장발, 밥 딜런의 저항노래, 그리고 히피문화를 낳았고, 우리나라에는 통기타와 청바지, 그리고 생맥주와 장발을 창출했다.
이런 세대들의 감성을 대변하는 가요가 70년대 한국의 한 주류를 이루면서 위력을 떨쳤다.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 양희은, 서유석, 하남석, 김정호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포크계열의 노래가 그것이었다. 이들은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노래로 표출하였고, 그러한 것들이 당시 청년문화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음악이라는 장르는 다른 예술분야보다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정도가 깊으며 특히 대중음악은 말 그대로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충분했으며 그 음악에 담긴 메시지는 어느 다른 분야보다 그 파급효과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학사가수들은 그들의 옷차림 하나, 노래 한 소절 모두가 당시 청년학생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청바지는 통기타나 장발 단속 같은 제약이 가해지지 않았으므로 청년문화의 주를 이루게 되었고 유신체제하에서 체제에 대한 반항의 상징물로 통하게 되었다. 물론 청바지라는 옷 자체가 튼튼하게 만들어졌으며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장점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착용했던 것도 사실이나 사회 전반적인 경향으로 볼 때 청바지는 이미 단순한 의복의 차원을 넘어서 이념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로써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바지의 이러한 상징성은 당시 대학생들을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유신체제와 기성세대에 반대하는 집단에 모여 있다는 동질성을 심어주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청바지는 1982년 교복자율화 이후 일반화되면서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고 오히려 청바지를 입는 것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학생임을 뜻한 것이 되었다.
서태지와 힙합문화
1980년대에 시작된 전자통신혁명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영상매체가 시대를 선도하는 영상시대가 개막되었다. 컬러 TV의 보급과 위성방송의 개시 등으로 영상세대가 탄생하게 되었고, 이들이 대중문화를 선도하면서 대중문화의 판도도 변화되었다. 이러한 영상매체의 발달과 대중문화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연예인을 비롯한 영상스타들에 대한 광적인 열기를 불러왔다. 이런 영상문화의 열기는 X세대로 불리는 신세대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이른바 미시족의 등장과 그들의 현시적 문화 욕구가 그런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런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과도한 열풍이 되어 거품으로 과대포장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1990년대 대중문화의 변화의 가장 큰 변화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이었다. 이들의 등장은 가요계에서는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서태지가 몰고 온 돌풍은 대단한 것이었다. 『난 알아요』로 데뷔한 지 3개월만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새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히트하며 1996년 1월에 은퇴할 때까지 약 3년 10개월 동안에 4장의 앨범 판매량이 무려 6백만장을 넘어서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서태지와 아이들, 그것을 '문화적 사건'이라고까지 평가할 정도이니 그 영향과 파문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가요계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끼친 파장은 적지 않다. 그들의 추구했던 힙합패션은 단숨에 전국적으로 유행하여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그들이 입었던 헐렁한 힙합패션은 보편화되어 있었고,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그들의 가치관은 기성세대들이 볼 때에는 눈에 거슬리는 그들의 옷차림만큼이나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X세대라고 불리우는 90년대의 신세대들은 이미 정치·사회적으로 기성세대의 온갖 모순된 행동들을 두 눈과 귀로 보고 듣던 터라 파격적이라 할 만큼 반항적 기질을 보이게 되었다.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지난 1970∼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학생들의 생각과도 비슷한 면을 찾을 수 있지만 X세대는 그들 선배들과는 달리 기성세대, 기성정치에 대한 반발로 스스로의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별을 두어야 할 것이다. 즉 '참여를 통한 비판'과 '반항에 따른 무관심'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 항상 시간 때문에 잔소리하실 때마다 왜 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가끔 공부하다 TV 좀 보면 '야,공부도 못하는 게 지금 뭐하고 있어. 남들은 눈에 불키고 하는데 넌 뭐하냐.' 공부하다 한 프로 보는 것인데 왜 저러실까? 참 답답했습니다."
"난 스포츠 중계,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요. 그러나 부모님들은 공부는 안하고 TV만 본다고 잔소리를 하시죠.물론 고 3이기 때문에 그러시겠지만 고 3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만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TV를 보면 그래도 스트레스가 풀리거든요. 당구장 오락실 만화방보다는 낫잖아요?"
1970-1980년대의 문화
1960∼70년대에 진행된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으로 자본주의화, 도시화가 진행되고 교통과 통신, 대중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대중문화의 조건들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대중문화의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텔레비전의 보급이었다.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소득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국민의 관심과 여가를 텔레비전이라는 오락매체에 묶어놓기 위한 정부의 강력한 지원도 뒤따랐다. 박정희는 방송국과 언론 등 대중매체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가하여 방송의 경우 프로그램편성에 있어서도 정치적 선전을 위한 방법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유신체제하에서 행해진 수많은 악행과 사회적 부조리는 단순한 국민의 눈가림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청년문화' 또는 '대학문화'라고 일컬어지는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의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번지고 있었다. 흔히 청바지와 통기타로 상징되는 이것은 모두 미국에서 들어왔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유신체제의 암울한 시대상황에 대한 반항의 표상처럼 되어버렸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1960년대 후반 서구와 미국을 휩쓴 베트남 참전 반대운동, 인종차별 반대투쟁, 여성해방운동과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구사회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된 '스튜던트 파워'는 정치적인 좌절과 함께 청바지와 장발, 밥 딜런의 저항노래, 그리고 히피문화를 낳았고, 우리나라에는 통기타와 청바지, 그리고 생맥주와 장발을 창출했다.
이런 세대들의 감성을 대변하는 가요가 70년대 한국의 한 주류를 이루면서 위력을 떨쳤다.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 양희은, 서유석, 하남석, 김정호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포크계열의 노래가 그것이었다. 이들은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노래로 표출하였고, 그러한 것들이 당시 청년문화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음악이라는 장르는 다른 예술분야보다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정도가 깊으며 특히 대중음악은 말 그대로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충분했으며 그 음악에 담긴 메시지는 어느 다른 분야보다 그 파급효과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학사가수들은 그들의 옷차림 하나, 노래 한 소절 모두가 당시 청년학생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청바지는 통기타나 장발 단속 같은 제약이 가해지지 않았으므로 청년문화의 주를 이루게 되었고 유신체제하에서 체제에 대한 반항의 상징물로 통하게 되었다. 물론 청바지라는 옷 자체가 튼튼하게 만들어졌으며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장점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착용했던 것도 사실이나 사회 전반적인 경향으로 볼 때 청바지는 이미 단순한 의복의 차원을 넘어서 이념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로써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바지의 이러한 상징성은 당시 대학생들을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유신체제와 기성세대에 반대하는 집단에 모여 있다는 동질성을 심어주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청바지는 1982년 교복자율화 이후 일반화되면서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고 오히려 청바지를 입는 것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학생임을 뜻한 것이 되었다.
서태지와 힙합문화
1980년대에 시작된 전자통신혁명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영상매체가 시대를 선도하는 영상시대가 개막되었다. 컬러 TV의 보급과 위성방송의 개시 등으로 영상세대가 탄생하게 되었고, 이들이 대중문화를 선도하면서 대중문화의 판도도 변화되었다. 이러한 영상매체의 발달과 대중문화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연예인을 비롯한 영상스타들에 대한 광적인 열기를 불러왔다. 이런 영상문화의 열기는 X세대로 불리는 신세대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이른바 미시족의 등장과 그들의 현시적 문화 욕구가 그런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런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과도한 열풍이 되어 거품으로 과대포장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1990년대 대중문화의 변화의 가장 큰 변화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이었다. 이들의 등장은 가요계에서는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서태지가 몰고 온 돌풍은 대단한 것이었다. 『난 알아요』로 데뷔한 지 3개월만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새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히트하며 1996년 1월에 은퇴할 때까지 약 3년 10개월 동안에 4장의 앨범 판매량이 무려 6백만장을 넘어서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서태지와 아이들, 그것을 '문화적 사건'이라고까지 평가할 정도이니 그 영향과 파문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가요계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끼친 파장은 적지 않다. 그들의 추구했던 힙합패션은 단숨에 전국적으로 유행하여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그들이 입었던 헐렁한 힙합패션은 보편화되어 있었고,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그들의 가치관은 기성세대들이 볼 때에는 눈에 거슬리는 그들의 옷차림만큼이나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X세대라고 불리우는 90년대의 신세대들은 이미 정치·사회적으로 기성세대의 온갖 모순된 행동들을 두 눈과 귀로 보고 듣던 터라 파격적이라 할 만큼 반항적 기질을 보이게 되었다.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지난 1970∼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학생들의 생각과도 비슷한 면을 찾을 수 있지만 X세대는 그들 선배들과는 달리 기성세대, 기성정치에 대한 반발로 스스로의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별을 두어야 할 것이다. 즉 '참여를 통한 비판'과 '반항에 따른 무관심'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