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비트겐슈타인
1)제 1차 세계대전 중의 초기 생애
2)『철학적 탐구』의 시기
3)평가
러셀
1)초기생애
2)초기 철학저작
3)후기 정치․철학 저작
4)정치활동
5)평가
1)제 1차 세계대전 중의 초기 생애
2)『철학적 탐구』의 시기
3)평가
러셀
1)초기생애
2)초기 철학저작
3)후기 정치․철학 저작
4)정치활동
5)평가
본문내용
믿는 것 What I Believe>(1925)·<결혼과 도덕 Marriage and Morals>(1929)·<과학적 조망 The Scientific Outlook>(1931)·<교육과 사회질서 Education and the Social Order>(1932) 등을 펴냈다. 날카로운 기지와 함께 정치적·도덕적·지적으로 급진좌파적·반(反)수구주의적 관점에서 쓴 그의 저서들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주로 공리주의 관점에서 윤리학과 정치·사회·교육철학 분야의 전문서를 쓰기도 했다.
1927년에 아내 도라와 함께 피터즈필드 근처 '텔레그래프 하우스'에서 실험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도라에 의해 계속 운영되었다(두 사람은 1935년에 이혼함). 이런 자유방임에 의한 교육방식은 당시에는 진보적인 것이었지만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지나치게 과장된 점도 있다. 1931년 형 프랭크가 죽자 러셀은 백작작위를 이어받아 러셀 백작 3세가 되었다. 1934년 <자유와 조직 1814~1914 Freedom and Organization 1814~1914>, 1937년에는 <앰벌리 페이퍼스 The Amberley Papers>를 출판했다. 이 2권의 책은 연구보조원이었던 퍼트리샤 스펜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그녀는 1936년 러셀의 3번째 부인이 되었다.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1938년 뮌헨 조약에서 독일에게 영토를 양도하기로 한 영국의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좋은 것을 위한 불가피한 서막'으로서 히틀러를 물리쳐야 한다고 말했다. 1938~39년 미국에서 강의한 뒤 뉴욕에 있는 시립대학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성적 부도덕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법원에 의해 취소되었다(폴 에드워즈가 편집한 <왜 나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가 Why I Am Not a Christian>(1927)의 부록 참조).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반즈 재단'과 5년 동안 강의 계약을 맺음으로써 잠시 동안 가난에서 벗어났으나 1943년 이 계약마저 취소되었다. 이때의 강의내용을 토대로 <서양철학사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1945)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곧 영국과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주수입원이 되었다. 1944년 영국으로 돌아왔고, 곧 트리니티 칼리지의 강사 겸 펠로로 임명되었다. 그후 15년 동안 러셀은 빠르게 명성과 존경을 얻었다. BBC 방송의 <브레인스 트러스트>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BBC <리스 강좌>의 첫번째 강연자가 되었으며, 같은 해 메리트 훈장을 받고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
정치활동
1948년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가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은 높은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큰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론이 시대에 뒤떨어진 주제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러셀의 사상이 인기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반응에 러셀은 크게 실망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언어분석철학에 공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뒤 <나의 철학적 성장 My Philosophical Development>(1959)과 몇 개의 논평을 제외하고는 철학에서 국제정치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퍼트리샤 스펜스와 이혼하고 미국인 이디스 핀치와 결혼한 1952년경부터 러셀은 점차 기성 권위층의 미움을 산 반면 전세계의 젊은층과 좌익계열에게는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1960년대 후반기 동안 그는 매년 1,000장 이상의 크리스마스 카드와 메시지를 받았으며 그중 많은 수가 극동지방에서 온 것이었음). 1954년 BBC 방송을 통해 '인간의 위험'이란 제목의 유명한 강연을 해 비키니 섬에서 있었던 수소폭탄 실험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 방송강연은 핵무장에 반대하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의 '러셀-아이슈타인 성명', 동서양 과학자들의 퍼그워시 회의(1957년 1차 회의에서 러셀은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음)로서, 마침내는 1958년에 시작된 핵무장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러셀은 핵무장 반대운동의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1960년 사임하고 더욱 투쟁적인 ' 100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모임은 대규모의 시민불복종 운동을 일으킨다는 공식목표를 내걸었고, 1961년 러셀은 아내와 함께 직접 대규모 연좌농성을 이끌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2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1주일로 감형되었다.
1962년에는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쿠바 위기와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에 개입하여 당시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와 각국 수뇌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낼 정도로 여전히 왕성한 정력과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1963년 워런 보고서가 발표되자 '케네디 암살진상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또 자신의 평화 노력을 체계화하기 위해 '버트런드 러셀 평화재단'과 '애틀랜틱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이후 1966년까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으며,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유고슬라비아의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데디예르, 폴란드의 작가 이사크 도이처 등의 도움을 받아 국제전범재판소를 소집하기도 했다. 1967~69년 러셀의 가장 훌륭한 저서 가운데 하나로서 재치있고 솔직하면서 흥미진진하고 화려한 문체로 쓴 <자서전 Autobiography>을 3권으로 출간했다.
평가
러셀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3세대에 걸친 활기찬 생애에서 철학·수학·과학·윤리학·사회학·교육·역사·정치학·논쟁술에 이르는 적어도 40권 이상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했다. 러셀의 탁월한 영향력은 자신의 지능을 사용하는 놀라운 능력(그는 하루에 보통 거의 고칠 필요가 없는 3,000 단어 분량의 글을 썼음), 기억력, 귀족 특유의 독립심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의 활동의 원천이었던 심오한 휴머니즘적 감수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러셀의 이러한 감수성은 스스로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좌파, 회의적 무신론의 기질이라고 불렀던 성향을 통해 사회변혁운동에서 일관성있게 표현되었다.
1927년에 아내 도라와 함께 피터즈필드 근처 '텔레그래프 하우스'에서 실험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도라에 의해 계속 운영되었다(두 사람은 1935년에 이혼함). 이런 자유방임에 의한 교육방식은 당시에는 진보적인 것이었지만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지나치게 과장된 점도 있다. 1931년 형 프랭크가 죽자 러셀은 백작작위를 이어받아 러셀 백작 3세가 되었다. 1934년 <자유와 조직 1814~1914 Freedom and Organization 1814~1914>, 1937년에는 <앰벌리 페이퍼스 The Amberley Papers>를 출판했다. 이 2권의 책은 연구보조원이었던 퍼트리샤 스펜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그녀는 1936년 러셀의 3번째 부인이 되었다.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1938년 뮌헨 조약에서 독일에게 영토를 양도하기로 한 영국의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좋은 것을 위한 불가피한 서막'으로서 히틀러를 물리쳐야 한다고 말했다. 1938~39년 미국에서 강의한 뒤 뉴욕에 있는 시립대학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성적 부도덕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법원에 의해 취소되었다(폴 에드워즈가 편집한 <왜 나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가 Why I Am Not a Christian>(1927)의 부록 참조).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반즈 재단'과 5년 동안 강의 계약을 맺음으로써 잠시 동안 가난에서 벗어났으나 1943년 이 계약마저 취소되었다. 이때의 강의내용을 토대로 <서양철학사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1945)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곧 영국과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주수입원이 되었다. 1944년 영국으로 돌아왔고, 곧 트리니티 칼리지의 강사 겸 펠로로 임명되었다. 그후 15년 동안 러셀은 빠르게 명성과 존경을 얻었다. BBC 방송의 <브레인스 트러스트>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BBC <리스 강좌>의 첫번째 강연자가 되었으며, 같은 해 메리트 훈장을 받고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
정치활동
1948년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가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은 높은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큰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론이 시대에 뒤떨어진 주제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러셀의 사상이 인기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반응에 러셀은 크게 실망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언어분석철학에 공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뒤 <나의 철학적 성장 My Philosophical Development>(1959)과 몇 개의 논평을 제외하고는 철학에서 국제정치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퍼트리샤 스펜스와 이혼하고 미국인 이디스 핀치와 결혼한 1952년경부터 러셀은 점차 기성 권위층의 미움을 산 반면 전세계의 젊은층과 좌익계열에게는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1960년대 후반기 동안 그는 매년 1,000장 이상의 크리스마스 카드와 메시지를 받았으며 그중 많은 수가 극동지방에서 온 것이었음). 1954년 BBC 방송을 통해 '인간의 위험'이란 제목의 유명한 강연을 해 비키니 섬에서 있었던 수소폭탄 실험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 방송강연은 핵무장에 반대하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의 '러셀-아이슈타인 성명', 동서양 과학자들의 퍼그워시 회의(1957년 1차 회의에서 러셀은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음)로서, 마침내는 1958년에 시작된 핵무장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러셀은 핵무장 반대운동의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1960년 사임하고 더욱 투쟁적인 ' 100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모임은 대규모의 시민불복종 운동을 일으킨다는 공식목표를 내걸었고, 1961년 러셀은 아내와 함께 직접 대규모 연좌농성을 이끌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2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1주일로 감형되었다.
1962년에는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쿠바 위기와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에 개입하여 당시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와 각국 수뇌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낼 정도로 여전히 왕성한 정력과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1963년 워런 보고서가 발표되자 '케네디 암살진상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또 자신의 평화 노력을 체계화하기 위해 '버트런드 러셀 평화재단'과 '애틀랜틱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이후 1966년까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으며,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유고슬라비아의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데디예르, 폴란드의 작가 이사크 도이처 등의 도움을 받아 국제전범재판소를 소집하기도 했다. 1967~69년 러셀의 가장 훌륭한 저서 가운데 하나로서 재치있고 솔직하면서 흥미진진하고 화려한 문체로 쓴 <자서전 Autobiography>을 3권으로 출간했다.
평가
러셀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3세대에 걸친 활기찬 생애에서 철학·수학·과학·윤리학·사회학·교육·역사·정치학·논쟁술에 이르는 적어도 40권 이상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했다. 러셀의 탁월한 영향력은 자신의 지능을 사용하는 놀라운 능력(그는 하루에 보통 거의 고칠 필요가 없는 3,000 단어 분량의 글을 썼음), 기억력, 귀족 특유의 독립심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의 활동의 원천이었던 심오한 휴머니즘적 감수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러셀의 이러한 감수성은 스스로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좌파, 회의적 무신론의 기질이라고 불렀던 성향을 통해 사회변혁운동에서 일관성있게 표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