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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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러시아 혁명사의 토양
1)러시아 구체제의 모순:전제정치와 농노제
2)산업화에 그에 따른 모순의심화

  2.혁명운동의 성장
1)급진적 지식인의 활동
2)맑스주의의 도입과 혁명정당의 성립
3)노동/농민 운동의 전개

3.1905년 혁명과 스똘리삔의 반동
1)1905년 혁명
2)스똘리삔의 반동:혁명세력의 퇴조

4.제 1차 세계대전과 2월 혁명
1)2월 혁명의 발생
2)임시정부 수립(2중 권력의 시기)
3)레닌의 4월 테제

5,10혁명과 소비에트정권의 수립

결론 러시아 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본문내용

이것이 소위 2월혁명인데, 1905년의 제1혁명과는 달리 농민을 대표하는 군부가 노동자의 혁명에 참가하여 대중봉기를 이끌어 나갔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0월혁명】
2월혁명 후 정치권력을 잡은 임시 정부는 전쟁계속정책을 취하였다. 따라서 평화와 생활의 안정을 구하는 대중의 불만이 높아졌다. 4월 중순 망명중인 스위스로부터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는 등 10개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하였다. 이것이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정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대항했다. 6월 18일 임시정부가
행한 독일공격의 실패로 반정부열기가 높아지자, 7월 3일 볼셰비키는 수도의 군대와 노동자들의 무장시위운동을 조직하였다. 정부는 7월 5일 전선으로부터 군대를 소환하여 이를 진압하고 케렌스키가 수상이 되어 급진적인 노동자·병사·볼셰비키에 탄압을 가하게 되자 이들과 정부 간의 대립은 첨예화하였다. 레닌은 탄압을 피하여 한때 핀란드로 피신하였으나, 그의 강력한 요청 아래 볼셰비키 당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되었다. 11월 6일(러시아 구력 10월 24일) 봉기가 시작되었고, 혁명군은 거의 무혈로 수도의 중요 거점들을 점령, 제2회 전(全)러시아소비에트대회가 열린 7일 심야(深夜)까지는 임시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소비에트대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일부가 퇴장한 가운데 봉기를 승인하고 권력장악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동궁이 함락되고 임시정부의 각료들이 체포된 뒤에 대회는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를 채택하고,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를 정부로서 선임하였다. 한편 동궁을 탈출한 케렌스키는 전선의 병력을 이끌고 수도탈환을 꾀하였으나 정세는 점점 기울어져 18년 1월 23일부터 개최된 제3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는 노농소비에트대회와 농민소비에트대회의 합동을 결정하고, ‘근로피착취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정세는 결정적으로 기울어졌으며, 18년 2월에는 혁명이 거의 전국에 확대되었다.
<10월혁명의 본부가 된 귀족전용여자학교에 모여드는 군중>
【혁명의 명분과 실상】 빵과 토지와 평화를 구호로 내걸고 노동자·농민 등 다수자에 의한 지배를 표방하는 공산정권이 후진국 러시아를 무대로 출현하였다. 러시아혁명 중 특히 10월혁명에 대한 평가는 구구하여, 찬미에서 매도(罵倒)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이 혁명에 대한 입장이 무엇이든간에 다음의 사실만은 밝혀져야 한다.
① 10월혁명은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을 토대로 삼음으로써 처음부터 사회개조에서 성공할 수 없는 조건을 안고 출발하였다. 즉 19세기 이래 출현한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사상은 하나같이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개조의 방법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계획경제에서 구했으며, 이 제도만 실시하면 그것만으로 자본주의보다 한층 훌륭한 사회가 실현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1845∼46년에 쓴 《도이체 이데올로기》에서 ‘만일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하면, 결핍이 일반화되고, 생존투쟁이 다시 시작되며, 모든 낡은 오물이 되살아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강력히 반론하였다. 그런데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만을 형식적으로 바꾸어 놓는 혁명을 레닌이 실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변화의 궁극적 원인을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이라고 보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옳다면,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태어난 10월혁명은 가난과 생존투쟁과 구악의 소생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안고 나아가게 마련이었다.
② 10월혁명은 농민에 대해 철저히 계획된 속임수를 씀으로써 혁명정권은 처음부터 다수자의 지배가 될 수 없는 조건을 안고 출발하였다. 혁명 당시 러시아의 총인구 가운데 농민은 75 %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혁명에서 철저히 대중노선(大衆路線)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불과 10 %의 노동자계급만으로는 혁명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하여 75 %의 농민을 혁명에 이용하기로 결심한 레닌은 마르크스에게는 전혀 없던 노농동맹을 ‘혁명 승리의 불가결의 조건’이라고 강조하면서 토지분배를 미끼로 농민을 혁명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유제 폐지를 주장하는 공산당이 토지의 사유를 뜻하는 토지분배를 약속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속임수였다. 이리하여 1929∼32년에 실시된 농업집단화의 과정에서 약 1000만 명의 농민이 희생되는 대비극은 혁명의 처음부터 운명지워져 있었다.
③ 10월혁명은 러시아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말살하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를 확립하였다. 임시정부만 타도하면 지체 없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제도를 확립하겠다고 끈질기게 주장·약속해 온 레닌은 정권을 잡은 지 3일 만인 11월 10일 언론을 구속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어서 케렌스키의 임시정부에 의하여 11월 25일로 예정되었던 선거를 실시한 결과, 총 투표자 3600만 명 가운데 공산당을 지지한 자는 겨우 900만 명뿐, 유권자의 절대 다수가 레닌의 혁명정권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18년 1월 18일에 소집된 제헌의회를 폭력으로 해산시키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에 대하여는 총탄으로 답하는 한편, 독재 즉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법률에 의해서도 절대로 구속되지 않고 직접 폭력에 입각하는 무제한의 권력’으로써 민주주의와 대치하였다. 이리하여 의회민주주의를 심어보려는 많은 사람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들이 타도한 황제보다도 훨씬 무자비한 공산당의 독재가 수립되었으며, ‘제헌국회의 죽음은 수난(受難)의 국가와 인민대중에게 새로운 고난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한 M.고리키의 예언은 불행하게도 적중하게 되었다. 철저히 계획된 속임수에 의하여,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세워진 무제한의 폭력지배가 장차 나아갈 길은 처음부터 하나의 숙명으로서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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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1.12.17
  • 저작시기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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