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공화정
본 자료는 6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해당 자료는 6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6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로마의 기원

공화정 시대

발전

변화와 개혁

제정의 성립과 발전

제정후기

그리스도교의 발전

본문내용

련의 칙령을 공포하여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임을 선언하고 모든 이교의식을 금지하였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약 3세기 반 동안에 로마를 정복하는데 성공한 셈이었다. 로마는 문화적으로 그리스에 의해 정복당하였으며, 종교적으로는 그리스도교에 의해 정복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조직 박해와 탄압을 받은 그리스도교가 지하비밀조직을 가졌던 시대는 지나가고, 종교적 전문직과 교회행정이 점점 체계적으로 복잡하게 발달하여 성직계층제도와 교구제가 성립되었다. 2세기까지에는 주교(episcopus, bishop)의 지위가 중요해지고, 그 아래로 각급 성직자가 직능분화에 따라 나오고 이에 계층제도가 점차 확립되었다. 한편 도시를 중심으로 인근 지방에서 교회가 증설되면서 관할구역에 따른 大小의 교구가 생기게 되었다. 여러층의 교구 가운데서도 주교구(主敎區)는 최상위의 교구였다. 그리고 주교의 관할구역 가운데서 로마교구가 가장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로마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 등과 같이 여러 큰 교구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점차 로마의 주교는 그리스도교회 전체의 영도자로서 인정받았으며, 결국 교황(Pope)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로마가 교황제의 중심이 된 것은 여러 요인에 의해서이다. 첫째로, 로마는 당시 청치적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것은 자랑할 만한 전통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로마의 최대의 도시였다. 동시에 그것은 선교운동의 중심이었고 신설되는 여러교회의 주교들이 로마주교의 지도와 원조에 기대를 걸었다. 신학적 문제가 생기면 로마교회의 중재와 판정을 기다리는 관례가 생기게 되었다. 둘째로, 로마교황제의 대두의 가장 주요한 요인은 베드로說일 것이다. 이 설에 의하면 로마교회는 사도중 지도자였던 베드로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베드로(Peter)를 그의 후계자로 임명하였고(petros는 그리스어로 돌을 뜻하는 말인데, 예수는 그의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베드로의 이름과 부합하였다), 그는 로마에 가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가장 으뜸가는 주교가 되었으며 죽음에 임하여 그의 영도권을 후임 로마주교에게 인계하였다. 셋째로, 로마가 그리스도교도들의 순교의 중심지라는 사실은 로마교회의 영광을 한층 빛나게 하는 것이었다. 서방에 있어사의 정치적 권력의 약화, 로마제국의 수도의 이동,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동로마 황제의 통제하에 놓였다는 점 등은 또한 로마주교의 권한이 크게 신장될 수 있었음을 설명해주는 요인이다. 넷째로, 서방에 있어서의 교회지도자들이 대체로 유능한 행정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거나 신학자들이었다는 점이 로마주교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이리하여 로마주교는 600년대 까지에는 교황으로서 서방세계의 정신적 영도자가 되었으며, 그의 우월성은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되었다.
교리의 체계화 교회의 행정기구가 수립되고 있는 동안 교회의 신앙내용이 통일·편성되고 있었다. 예수 자신은 신앙의 체계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지식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특히 그리스 사상에 관심을 가졌던 바오로에 의해서 교리의 체계화 작업은 시작되었다. 그는 예수의 神性을 강조하고, 그의 죽음을 인류의 죄에 대한 기적적인 속죄라고 해석하였다. 삼위일체설도 발전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의 교리도 점차 복잡·섬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회의 교리체계화 과정은 여러 이견에 부딪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이견은 삼위일체설을 부정한 아리우스(Arius, 256∼336)파에 의해 제기된 것이었다. 아리우스의 견해는 삼위일체설을 적극지지하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의 견해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주최하에 소집된 니케아(Nicaea) 공의회(325)에서 결말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5세기 중기까지 수차의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교리상의 이론을 비판하고 정통적인 신앙내용을 확립하여 이른바 카톨릭(katholikos) 교회의 이론적 기반이 확정되었다. 교회의 권위적인 교리확립을 위해 각별히 공헌이 큰 사람들은 주로 4∼5세기의 교부(敎父)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430)였다. 그의 저서인 신국론(神國論, De Civitate Dei)은 중세사상에 광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거기에 표현된 견해는 가톨릭 신학의 상당부분의 기초가 되었다. 교리의 확립에 따라 성서의 편찬도 적극화되었다. 성서의 편찬은 1세기 말에 시작되어 160∼170년에는 4복음서가 나타났으며, 2세기 말에는 마침내 오늘날의 것과 비슷한 신약성서가 출현하였다.
수도원의 시작 이 세상의 유혹을 피하고 은둔하려는 관념은 본래 비그리스도교적인 기원이 있는 것이었으나 곧 그리스도교 안에 퍼지게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은사(隱士)·고행자와 같이 생활하였으나, 더 일반적인 방법은 집단적인 수도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바실리우스(St. Basil)는 일찍이 이러한 집단적 수도생활 단체를 창시하였으며 곧 유럽의 여러지역에 퍼졌다. 베네딕도(St. Benedict, 480∼543)는 이탈리아의 몽테 카시노에서 수도원을 개설하고 일정한 규율에 따라 생활하도록 규칙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다른 수도원에서도 채택된 수도서원이라는 것이다. 이 규정에 의하면 청빈(가난하게 산다), 순명(명령에 따른다), 정결(결혼하지 않는다) 등의 3서원을 하여야만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수도성직자들은 명상·기도·농사·필사·저술 들과 같은 규칙적인 일을 하게 되어 있었다. 한 편 수도원은 그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자급자족의 경제적 단위였다. 수도원은 중세를 통해 저명한 교회지도자들을 배출하였으며 모든 문제에서 교황을 지지하였다. 수도원은 부속학교를 운영하고 도서시설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으므로 중세사회에 있어서 교육 및 학문연구와 같은 문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사회적으로도 수도원은 자선을 베풀고 새 농경법을 가르치고 육체노동의 귀중함을 알려주는 사회사업을 하였던 것이다.

키워드

  • 가격2,300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1.12.19
  • 저작시기2001.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077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