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目 次
Ⅰ. 서론
Ⅱ. 여말 배불론의 대두
Ⅲ. 정몽주의 불교 인식
Ⅳ. 정도전의 불교 인식
Ⅴ. 양자의 불교 인식 비교 검토
Ⅵ. 결론
Ⅶ. 참고문헌
Ⅰ. 서론
Ⅱ. 여말 배불론의 대두
Ⅲ. 정몽주의 불교 인식
Ⅳ. 정도전의 불교 인식
Ⅴ. 양자의 불교 인식 비교 검토
Ⅵ. 결론
Ⅶ. 참고문헌
본문내용
불교 이해 속에서 상호 조화 입장의 온건적이었다면, 정도전은 정치적 안목에서 儒彿을 상호 대립과 갈등의 측면에서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性理學者로서 정몽주는 儒家的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했다면, 정도전은 의도적으로 佛敎를 排斥하면서 儒敎를 숭상하여 정치적 기반으로까지 끌어 올렸다고 파악할 수 있다.
Ⅵ. 結 論
고려 사회는 儒彿 三重 體制가 공존하였다. 麗末 性理學의 受容은 사상계의 큰 변화였다. 權門勢族은 불교와 연결되고, 新興士大夫는 성리학으로 무장하여 불교 문제는 하나의 중요한 정치 문제로 나타났다.
대체로 麗末의 排佛 운동은 두 개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온건한 佛敎비판으로서 佛敎의 敎理 그 자체를 哲學的으로, 그리고 理論的으로 비판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僧侶 또는 寺院의 弊端을 부분적으로 비판하는 부류가 그것이었다. 李穡과 鄭夢周는 이 부류의 대표적 人物로서, 그들은 한편으로 佛敎의 폐단을 이야기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佛敎 그 자체를 崇信하여 儒·佛을 겸통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다른 한 부류는 佛敎 그 자체를 異端과 邪學으로 규정하여 이를 철저히 배척하고, 僧侶와 寺院의 사회·경제·윤리상의 폐해를 통렬히 비판하고, 僧侶 및 寺院의 경제적 지반을 약화시킬 것과 僧侶의 還俗·充軍을 주장하는 적극적 排佛운동을 전개하였다. 朝鮮王朝를 건국한 李成桂派의 儒臣이 바로 그들로서 鄭道傳·趙仁沃·尹紹宗·趙浚 등이 대표적인 人士들이었다.
정몽주에게 있어서 배불 성향은 온건한 불교 비판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몽주는 東方理學之祖라는 후세의 칭송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하였다고 보여진다. 젊었을 때 스님들과 교유를 통한 학문적 이해 등이 온건한 拜佛論者가 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점은 排佛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麗末에 흐르는 일반적 흐름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몽주에게 비친 불교의 부정적 측면은 당시의 불교가 平常의 道理를 다하지 못하고 治世의 현실성마저 도외시하였다는 것이었다. 정몽주의 불교 배척 의도는 정치적 측면에서 유교의 정치 이념, 즉 性理學的 世界觀의 구현과 사회 윤리적 측면에서 민중들에게 <<朱子家禮>>를 보급하여 유교 사회의 기반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에 이르면 排佛의 성향은 대단히 적극성을 띠게 되는데 이러한 성향은 이전의 排佛的 움직임과는 전혀 양상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의 排佛論은 麗末에 있어서도 다른 이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철저한 것으로서 가위 排佛運動의 첨단과 최선봉에 위치하였다. 특히 朝鮮王朝 건국 후에는 단순히 사회, 경제, 윤리적 차원에서 佛敎를 배척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排佛운동을 한 단계 높이어 哲學的 理論的인 차원에서 佛敎哲學의 오류를 낱낱이 辨破하는 저술을 내놓았다. 특히 <<佛氏雜辨>>에 제시된 그의 佛敎敎理의 비판은 그 哲學的 깊이에 있어서나 비판의 철저성에 있어서나 理論體系의 論理性에 있어서나 당시의 中國과 日本을 통틀어서 가장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정도전의 哲學史想과 佛敎 批判은 철저하고 심오한 그만큼 오류와 독단도 적지 않다. 그것은 정도전이 순수한 學者的인 입장에서 佛敎를 비판 했다기 보다는 사회, 정치혁명의 한 수단으로서 불교를 비판했기 때문에 불교가 가진 哲學, 論理上의 敎理를 너무나 自己流로 해석·비판하여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도전의 排佛論은 그 학술적 성과보다는 정치적 성과에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믿어지는데 당시로서는 佛敎가 國家社會에 끼치는 폐단이 너무나 큰 것이었기 때문에 정도전과 같은 철저한 排佛運動은 그것이 다소 學問的 진실을 일탈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時代的 要請으로서 불가피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정도전의 排佛的 性理哲學思想은 그의 社會·經濟·倫理思想의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정몽주와 정도전의 佛敎 認識은 그들의 성장 과정과 시대적 상황에서 나올 수 있다. 정몽주는 불교를 이해하는 속에서 儒彿의 상호 조화 입장, 즉 비교적 온건한 성향이었다면, 정도전은 정치적 안목에서 儒彿을 상호대립과 갈등의 측면에서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유학자로서 정몽주는 儒家的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했다면, 정도전은 의도적으로 불교를 정치적 기반으로까지 끌어 올렸다고 파악할 수 있다.
參 考 文 獻
<<高麗史>>
<<高麗史節要>>
<<三峰集>>
<<陽村集>>
<<朝鮮王朝實錄>>
<<圃隱集>>
金潤坤. <新興士大夫의 擡頭>. <<韓國史>> 8호 國編委, 1977.
金忠烈. <<高麗儒學史>>. 高大出版部, 1984.
文暻鉉. <麗末 性理學派의 形成>. <<韓國의 哲學>> 9호 慶北大, 1980.
閔賢九 <辛頓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 <<歷史學報>> 38호, 1968.
朴龍雲. <權門勢族, 新進士類 社會의 思想과 文化>. <<高麗時代史>>. 一志社, 1987.
朴鍾鴻. <東方 理學의 祖로서의 鄭圃隱>. <<韓國思想>>, 1974.
宋昌漢. <鄭道傳의 斥佛論에 대하여>. <<大邱史學>> 15.16합, 1978.
安啓賢. <麗元 關係에서 본 高麗佛敎>. <<黃義敦古稀記念史學論叢>>. 東國大出版部, 1960.
李相佰. <三峰 人物考>. <<震檀學報>> 2.3호 1935.
李相佰. <儒彿兩敎 交代의 기연에 대한 一硏究>. <<韓國思想論叢>>. 乙酉文化社, 1947.
李相佰. <李成桂와 高麗 末期의 政爭>. <<李朝 建國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7.
李乙浩. >朝鮮 前期의 儒家 哲學>. <<韓國哲學硏究>>. 東明社, 1990.
李鍾益. <鄭道傳의 闢佛論 批判>, <<佛敎學報>> 8호 , 1971.
趙南國. <麗末鮮初 佛敎交涉에 관한 硏究>. <<江原大論文集> 15호, 1981.
圃隱硏究叢書. <<圃隱思想硏究論叢>> 1호 圃隱思想硏究院出版部, 1992.
韓永愚. <鄭道傳의 著述>. <<鄭道傳 思想의 硏究>>. 서울出版部, 1973.
韓鍾萬. <麗末鮮初의 排佛·護佛思想>. <<韓國佛敎思想史社>>. 圓光大出版局, 1975.
許興植. <僧政의 紊亂과 宗派間의 葛藤>. <<高麗佛敎史硏究>>. 一志社, 1986.
Ⅵ. 結 論
고려 사회는 儒彿 三重 體制가 공존하였다. 麗末 性理學의 受容은 사상계의 큰 변화였다. 權門勢族은 불교와 연결되고, 新興士大夫는 성리학으로 무장하여 불교 문제는 하나의 중요한 정치 문제로 나타났다.
대체로 麗末의 排佛 운동은 두 개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온건한 佛敎비판으로서 佛敎의 敎理 그 자체를 哲學的으로, 그리고 理論的으로 비판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僧侶 또는 寺院의 弊端을 부분적으로 비판하는 부류가 그것이었다. 李穡과 鄭夢周는 이 부류의 대표적 人物로서, 그들은 한편으로 佛敎의 폐단을 이야기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佛敎 그 자체를 崇信하여 儒·佛을 겸통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다른 한 부류는 佛敎 그 자체를 異端과 邪學으로 규정하여 이를 철저히 배척하고, 僧侶와 寺院의 사회·경제·윤리상의 폐해를 통렬히 비판하고, 僧侶 및 寺院의 경제적 지반을 약화시킬 것과 僧侶의 還俗·充軍을 주장하는 적극적 排佛운동을 전개하였다. 朝鮮王朝를 건국한 李成桂派의 儒臣이 바로 그들로서 鄭道傳·趙仁沃·尹紹宗·趙浚 등이 대표적인 人士들이었다.
정몽주에게 있어서 배불 성향은 온건한 불교 비판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몽주는 東方理學之祖라는 후세의 칭송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하였다고 보여진다. 젊었을 때 스님들과 교유를 통한 학문적 이해 등이 온건한 拜佛論者가 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점은 排佛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麗末에 흐르는 일반적 흐름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몽주에게 비친 불교의 부정적 측면은 당시의 불교가 平常의 道理를 다하지 못하고 治世의 현실성마저 도외시하였다는 것이었다. 정몽주의 불교 배척 의도는 정치적 측면에서 유교의 정치 이념, 즉 性理學的 世界觀의 구현과 사회 윤리적 측면에서 민중들에게 <<朱子家禮>>를 보급하여 유교 사회의 기반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에 이르면 排佛의 성향은 대단히 적극성을 띠게 되는데 이러한 성향은 이전의 排佛的 움직임과는 전혀 양상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의 排佛論은 麗末에 있어서도 다른 이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철저한 것으로서 가위 排佛運動의 첨단과 최선봉에 위치하였다. 특히 朝鮮王朝 건국 후에는 단순히 사회, 경제, 윤리적 차원에서 佛敎를 배척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排佛운동을 한 단계 높이어 哲學的 理論的인 차원에서 佛敎哲學의 오류를 낱낱이 辨破하는 저술을 내놓았다. 특히 <<佛氏雜辨>>에 제시된 그의 佛敎敎理의 비판은 그 哲學的 깊이에 있어서나 비판의 철저성에 있어서나 理論體系의 論理性에 있어서나 당시의 中國과 日本을 통틀어서 가장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정도전의 哲學史想과 佛敎 批判은 철저하고 심오한 그만큼 오류와 독단도 적지 않다. 그것은 정도전이 순수한 學者的인 입장에서 佛敎를 비판 했다기 보다는 사회, 정치혁명의 한 수단으로서 불교를 비판했기 때문에 불교가 가진 哲學, 論理上의 敎理를 너무나 自己流로 해석·비판하여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도전의 排佛論은 그 학술적 성과보다는 정치적 성과에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믿어지는데 당시로서는 佛敎가 國家社會에 끼치는 폐단이 너무나 큰 것이었기 때문에 정도전과 같은 철저한 排佛運動은 그것이 다소 學問的 진실을 일탈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時代的 要請으로서 불가피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정도전의 排佛的 性理哲學思想은 그의 社會·經濟·倫理思想의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정몽주와 정도전의 佛敎 認識은 그들의 성장 과정과 시대적 상황에서 나올 수 있다. 정몽주는 불교를 이해하는 속에서 儒彿의 상호 조화 입장, 즉 비교적 온건한 성향이었다면, 정도전은 정치적 안목에서 儒彿을 상호대립과 갈등의 측면에서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유학자로서 정몽주는 儒家的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했다면, 정도전은 의도적으로 불교를 정치적 기반으로까지 끌어 올렸다고 파악할 수 있다.
參 考 文 獻
<<高麗史>>
<<高麗史節要>>
<<三峰集>>
<<陽村集>>
<<朝鮮王朝實錄>>
<<圃隱集>>
金潤坤. <新興士大夫의 擡頭>. <<韓國史>> 8호 國編委, 1977.
金忠烈. <<高麗儒學史>>. 高大出版部, 1984.
文暻鉉. <麗末 性理學派의 形成>. <<韓國의 哲學>> 9호 慶北大, 1980.
閔賢九 <辛頓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 <<歷史學報>> 38호, 1968.
朴龍雲. <權門勢族, 新進士類 社會의 思想과 文化>. <<高麗時代史>>. 一志社, 1987.
朴鍾鴻. <東方 理學의 祖로서의 鄭圃隱>. <<韓國思想>>, 1974.
宋昌漢. <鄭道傳의 斥佛論에 대하여>. <<大邱史學>> 15.16합, 1978.
安啓賢. <麗元 關係에서 본 高麗佛敎>. <<黃義敦古稀記念史學論叢>>. 東國大出版部, 1960.
李相佰. <三峰 人物考>. <<震檀學報>> 2.3호 1935.
李相佰. <儒彿兩敎 交代의 기연에 대한 一硏究>. <<韓國思想論叢>>. 乙酉文化社, 1947.
李相佰. <李成桂와 高麗 末期의 政爭>. <<李朝 建國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7.
李乙浩. >朝鮮 前期의 儒家 哲學>. <<韓國哲學硏究>>. 東明社, 1990.
李鍾益. <鄭道傳의 闢佛論 批判>, <<佛敎學報>> 8호 , 1971.
趙南國. <麗末鮮初 佛敎交涉에 관한 硏究>. <<江原大論文集> 15호, 1981.
圃隱硏究叢書. <<圃隱思想硏究論叢>> 1호 圃隱思想硏究院出版部, 1992.
韓永愚. <鄭道傳의 著述>. <<鄭道傳 思想의 硏究>>. 서울出版部, 1973.
韓鍾萬. <麗末鮮初의 排佛·護佛思想>. <<韓國佛敎思想史社>>. 圓光大出版局, 1975.
許興植. <僧政의 紊亂과 宗派間의 葛藤>. <<高麗佛敎史硏究>>. 一志社,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