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Ⅱ.본론
1. 정도전의 출생
2. 출사와 유배 생활
3. 이성계와 만남
4. 위화도 회군후 정도전의 개혁
5. 정몽주의 제거와 조선의 개국
6. 조선 개국 후 업적
1) 한양천도
2) 이상적인 국가이념 기초 건설
3) 경세론
4) 저술
7. 정도전의 죽음
Ⅲ.결론(정도전의 평가)
Ⅱ.본론
1. 정도전의 출생
2. 출사와 유배 생활
3. 이성계와 만남
4. 위화도 회군후 정도전의 개혁
5. 정몽주의 제거와 조선의 개국
6. 조선 개국 후 업적
1) 한양천도
2) 이상적인 국가이념 기초 건설
3) 경세론
4) 저술
7. 정도전의 죽음
Ⅲ.결론(정도전의 평가)
본문내용
시키고 방원은 전라도로 방번은 동북면의 절제사로 좌천시키려 하였다.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왕족들과 공신세력은 위치가 흔들렸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의 제 1의 공신인 이방원 역시 정도전의 불안하여 정도전과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태조이후의 왕위 계승문제에서도 정도전과 이방원은 대립하게 된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가장 많은 일을 했던 이방원은 자신이 당연히 세자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후처인 강씨 부인의 아들인 방석에게 마음이 있었다.
한편 정도전도 방석을 적극적으로 밀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왕권이 강화 되어 정도전이 생각했던 재상에 의한 정치를 실행할 수 없었다. 곧바로 이성계는 정식으로 방석을 세자로 정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그래서 정도전은 방석의 스승이 되었다.
이리하여 정도전은 전비 소생의 왕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 버렸다. 특히 넷째 아들인 방간과 다섯째 아들인 방원은 정도전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 대립하게 된다.
1398년 8월 이성계가 병석에 눕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동원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이른바 ‘왕자의 난’혹은 ‘방원의 난’또는‘우인정사’였다.
정도전 일파는 그 시각 남은의 첩이 사는 집에 모여 있을 때 이방원이 기습했다. 원래 사병이 혁파되는 과정에서 왕자들은 모든 무기를 반납해야 했지만 이방원의 아내 민씨는 그때 철창 등을 몰래 감추고 있었다. 그래서 이방원의 부하들은 무기들이나마 갖추고 떠날 수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이방원은 먼저 이웃집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정도전 등은 집 밖으로 나왔다. 이방원의 부하들은 즉시 정도 전을 붙잡아 이방원의 앞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지금까지도 그의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정도전의 묘소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정도전이 죽은 후 5백년이나 지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경복궁을 설계하였던 정도전의 공적을 인정하여 복권시켰다.
Ⅲ.결론(정도전의 평가)
정도전은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하였고, 성격이 호방하여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의론(議論)이 정연하였다.
그는 개국과정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노비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이며,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그의 부계혈통은 향리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하였을 뿐이며,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3노가의 하나로 세인의 평을 얻게 되었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함부림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 역시 연안 차씨의 외척 얼손으로서, 조선왕조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개국공신 중에는 출신에 문제가 있는 인물이 많았다. 이는 역으로 이들이 당해야 하는 신분상의 불이익 때문에 고려왕조에 대하여 불만이 가장 많았고 개혁에 대한 의지도 컸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정도전이 청·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하였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왕조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하지만 정도전은 조선건국에서있어서 1등공신이었고 국가기틀 마련에 힘을 쏟았지만 조선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태조의 의중에 따라, 막내아들 방석을 왕위에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맹자의 사상 따라 왕도정치를 꿈꾸었고,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서라면, 왕권보다 신권이 더 강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정도전과 반대로, 왕권이 더 강해야 믿었기 때문에, 정도전과 방원과의 갈등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정도전은 세자 방석을 왕위에 세우는 과정에서, 왕위 계승 싸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세자의 형들을 지방으로 보낼 것을 요청한다. 그뿐만 아니라, 요동정벌 추진을 한다는 명목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모두 회수하려고 해, 왕자들의 반발을 사게 되고, 왕자들의 반격으로, 정도전은 물론이고, 세자 방석까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왕자의 난이다. 정도전은 결국 죽임을 당했고, 그의 역사적 업적은 무시된 채, 그를 변절자, 역적, 기회주의자로 낙인찍고 말았다. 그리고 이숭인, 이색등의 죽음을 그의 사주로 인한 것으로 왜곡시켰다. 정도전은 죽은 뒤 500년이 지나서야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이후에서야 시호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업적이 되찾은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정몽주라면, 고려의 충신이고, 단심가의 지은이라는 것을 알지만, 경복궁을 들리면, 항상 보게 되는 경복궁 현판이나, 사정전, 근정전등의 현판을 쓴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정몽주는 조선 이후 모든 왕들에게 칭송을 받았지만, 정도전은 지금까지도 잊혀진 존재이다. 정도전에 재대로된 인물 평가와 그의 개혁 사상을 연구하여 조선시대 왜곡되어있는 정도전의 위상을 바로잡아야 할 때이다.
※참고문헌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 푸른역사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한영우』 ― 지식산업사
http://snewworld.xtpn.com/mainform.htm
http://100.naver.com/100.php?id=135920
http://blog.naver.com/ramiuss/100008699043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왕족들과 공신세력은 위치가 흔들렸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의 제 1의 공신인 이방원 역시 정도전의 불안하여 정도전과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태조이후의 왕위 계승문제에서도 정도전과 이방원은 대립하게 된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가장 많은 일을 했던 이방원은 자신이 당연히 세자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후처인 강씨 부인의 아들인 방석에게 마음이 있었다.
한편 정도전도 방석을 적극적으로 밀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왕권이 강화 되어 정도전이 생각했던 재상에 의한 정치를 실행할 수 없었다. 곧바로 이성계는 정식으로 방석을 세자로 정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그래서 정도전은 방석의 스승이 되었다.
이리하여 정도전은 전비 소생의 왕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 버렸다. 특히 넷째 아들인 방간과 다섯째 아들인 방원은 정도전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 대립하게 된다.
1398년 8월 이성계가 병석에 눕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동원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이른바 ‘왕자의 난’혹은 ‘방원의 난’또는‘우인정사’였다.
정도전 일파는 그 시각 남은의 첩이 사는 집에 모여 있을 때 이방원이 기습했다. 원래 사병이 혁파되는 과정에서 왕자들은 모든 무기를 반납해야 했지만 이방원의 아내 민씨는 그때 철창 등을 몰래 감추고 있었다. 그래서 이방원의 부하들은 무기들이나마 갖추고 떠날 수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이방원은 먼저 이웃집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정도전 등은 집 밖으로 나왔다. 이방원의 부하들은 즉시 정도 전을 붙잡아 이방원의 앞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지금까지도 그의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정도전의 묘소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정도전이 죽은 후 5백년이나 지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경복궁을 설계하였던 정도전의 공적을 인정하여 복권시켰다.
Ⅲ.결론(정도전의 평가)
정도전은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하였고, 성격이 호방하여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의론(議論)이 정연하였다.
그는 개국과정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노비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이며,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그의 부계혈통은 향리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하였을 뿐이며,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3노가의 하나로 세인의 평을 얻게 되었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함부림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 역시 연안 차씨의 외척 얼손으로서, 조선왕조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개국공신 중에는 출신에 문제가 있는 인물이 많았다. 이는 역으로 이들이 당해야 하는 신분상의 불이익 때문에 고려왕조에 대하여 불만이 가장 많았고 개혁에 대한 의지도 컸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정도전이 청·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하였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왕조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하지만 정도전은 조선건국에서있어서 1등공신이었고 국가기틀 마련에 힘을 쏟았지만 조선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태조의 의중에 따라, 막내아들 방석을 왕위에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맹자의 사상 따라 왕도정치를 꿈꾸었고,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서라면, 왕권보다 신권이 더 강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정도전과 반대로, 왕권이 더 강해야 믿었기 때문에, 정도전과 방원과의 갈등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정도전은 세자 방석을 왕위에 세우는 과정에서, 왕위 계승 싸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세자의 형들을 지방으로 보낼 것을 요청한다. 그뿐만 아니라, 요동정벌 추진을 한다는 명목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모두 회수하려고 해, 왕자들의 반발을 사게 되고, 왕자들의 반격으로, 정도전은 물론이고, 세자 방석까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왕자의 난이다. 정도전은 결국 죽임을 당했고, 그의 역사적 업적은 무시된 채, 그를 변절자, 역적, 기회주의자로 낙인찍고 말았다. 그리고 이숭인, 이색등의 죽음을 그의 사주로 인한 것으로 왜곡시켰다. 정도전은 죽은 뒤 500년이 지나서야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이후에서야 시호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업적이 되찾은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정몽주라면, 고려의 충신이고, 단심가의 지은이라는 것을 알지만, 경복궁을 들리면, 항상 보게 되는 경복궁 현판이나, 사정전, 근정전등의 현판을 쓴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정몽주는 조선 이후 모든 왕들에게 칭송을 받았지만, 정도전은 지금까지도 잊혀진 존재이다. 정도전에 재대로된 인물 평가와 그의 개혁 사상을 연구하여 조선시대 왜곡되어있는 정도전의 위상을 바로잡아야 할 때이다.
※참고문헌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 푸른역사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한영우』 ― 지식산업사
http://snewworld.xtpn.com/mainform.htm
http://100.naver.com/100.php?id=135920
http://blog.naver.com/ramiuss/100008699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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