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사상과 건국이념
본 자료는 6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해당 자료는 6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6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정치적 성향과 유배생활

3. 출생의 비밀

4. 이성계와의 만남

5. 정도전의 토지국유화 정책

6. 평생을 통한 경쟁관계, 정도전과 정몽주

7. 정도전의 한양천도와 도성축조

8. 정도전의 이상적 정치사상

9. 이방원과의 갈등관계

10. 정도전의 요동정벌론

11. 정도전의 죽음

12. 정도전의 성격과 후대의 평가

13. 나오며

14. 참고자료

본문내용

개국을 끝내 반대했던 이색은 정도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벼슬에 나가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어떤 일을 당해서도 회피할 줄 몰랐으니 옛날의 군자도 우리 정도전과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하물며 지금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바이다."
세종 때의 명신 신숙주도 정도전에 대해 "개국 초기에 실시된 큰 정책은 다 선생이 찬정한 것으로서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태조실록』도 개국 초기 그의 업적에 대해서만큼은 "그의 힘으로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힘쓰지 않은 것이 없어서 결국 대업을 이루게 된 만큼, 정말 으뜸가는 공신이었다"는 평을 남기고 있다. 정도전과 함께 이색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후에 이방원측에 가담했던 당대의 명유 권근은 「삼봉선생 진찬」이라는 글을 남겼다. 다소 칭찬이 지나친 듯하지만, 삼봉의 풍모와 기백, 학문과 화술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 문장들을 접할 수 있다. 우선 정도전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다. 정도전은 과연 어떻게 생긴 인물이었을까.
"온후한 빛과 엄중한 용모는 쳐다보면 높은 산을 우러러보는 듯, 다가서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다. 그 얼굴이 윤택하고 등이 펴진 것을 보니 온화함과 순함이 속에 있음을 알겠다."
얼굴이 윤택하다거나 높은 산을 우러러보는 듯하다는 것은 정도전의 풍채가 매우 좋았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유배 시절에 지은「농부에게 답하다」에서 스스로의 용모를 "뺨이 풍요하고 배가 나왔다"고 묘사한 바 있다.『태조실록』에 전하는 정도전의 신체적 특징에 대한 유일한 기록도 "배가 나왔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비만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등이 곧게 펴졌으며, 온후하면서도 엄중한 기운을 풍긴다는 것은 단순 비만형이 아니라 풍채 좋고 늠름한 인상이었음을 말해준다. 권근은 정도전의 기백에 대해서도 격찬했다.
"빛은 만 길이나 솟아오르고 기는 무지개를 뱉어놓은 듯, 바야흐로 곤궁할 때도 그 뜻이 꺾이지 않고, 귀하게 되어서도 그 덕은 더욱 높기만 하도다. 이것은 그 마음이 넓고 스스로 만족한 때문이니 정의를 집결하여 속을 채운 데서 오는 것이리라."
정의를 집결하여 속을 채웠다는 것은 맹자가 의로운 자의 징표로 얘기했던 호연지기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위엄이기도 하고 기백이기도 하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기도 하다. 권근은 정도전에게서 그러한 의기를 느꼈던 모양이다. 정도전은 또한 뛰어난 화술의 소유자였다. 혓바닥 하나로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을 휘어잡았던 유세가들처럼 정도전 역시 핵심을 찌르는 빼어난 설득력으로 당대의 논객들 위에 우뚝 솟았다.
"시서를 강의함에 있어서는 능히 알기 쉬운 말로써 지극한 이치를 형용하여 배우는 자가 한 번 들으면 바로 의(義)를 깨달았으며, 이단을 물리침에 있어서는 능히 그 글에 정통하여 먼저 그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고서 마침내 그른 점을 지적하므로 듣는 자가 다 굴복하였다. 이 때문에 경서를 들고 배우려는 자가 골목을 메웠으며, 일찍이 따라 배워서 현관의 자리에 오른 자도 어깨를 나란히 하여 늘어설 만큼 수가 많았고, 비록 무부(武夫)와 속사(俗士)라고 그 강설을 들으면 재미를 붙여 싫증을 내지 않았으며, 부도(불교)의 무리들까지도 교화된 자가 있었다."
정도전의 이야기는 알기 쉽고 재미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글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논리정현한 글에 속한다. 성종 때의 선비 서거정은 정도전의 성격을 짐작케 해주는 몇 가지 일화를 전하고 있다. 그가 쓴 『필원잡기』에 따르면 어느 날 정도전이 말을 타고 출근하려는데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말구종이 신발이 서로 다르다고 지적하자, 태연하게 "한 쪽 신을 본 사람은 반대편 신을 볼 수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며 그대로 출근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다소 덜렁대는, 그러나 여유로운 성격을 알려주는 일화다. 그러나 성격이 여유롭고 호방하였다 해서 정도전이 마냥 호인풍의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상사가 아니라 정치투쟁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정도전만큼 깐깐하고 집요한 인물도 없었다. 정도전은 자신의 반골기질을 거평 부곡 시절에 지은 「농부에게 답하다」에서 농부의 입을 빌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목을 알겠노라. 그 힘의 부족함을 헤아리지 않고 큰 소리를 좋아하고, 그 시기의 불가함을 알지 못하고 바른 말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나서 옛 사람을 사모하고, 아래에 처하여 위를 거스른 것이 죄를 얻은 원인이로다."
옛 사람을 사모한다는 것은 요순시절의 이상주의를 지향한다는 말이요, 아래에 처하여 위를 거스른다는 것은 그의 혁명아적 기절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권력을 잡은 것도 이 때문이었고, 목숨을 잃은 것 또한 이 때문이었다. 맨주먹밖에 없던 낭인시절에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시절에나 그는 이 길에서 결코 흐트러짐이 없었다.
13. 나오며
젊은 날의 고초가 없었던들 정도전은 그저 평범한 인물로 살다 갔으리라. 만약 정도전이 없었다면 이성계가 그토록 쉽게 천하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은 마치 유비과 공명을 얻은 것과 같았다. 정도전은 늘 자기를 장량에게 견주었다. 확실히 창업에 성공할 때까지는 두 사람의 행적이 꽤나 비슷했다. 하지만 창업 이후의 처신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매우 달랐다. 그리고 결과도 달랐다.
사실 정도전도 이러한 운명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불행히도 한나라의 여러 충신같은 인물들이 없었다. 오직 정도전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물러설 때를 놓친 것이다.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세울 적에 그의 꾀를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국량이 좁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해치고자 하였다. 그리고 묵은 감정을 반드시 갚으려 하였다. 자신이 건설한 한양에서 가장 먼저 죽어야 했던 조선 제1의 개국공신 정도전. 지금 그는 서울의 희뿌연 하늘에서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14. 참고자료
태조실록
신명호, 조선의 공신들, 가람기획
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푸른역사
  • 가격1,2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8.01.18
  • 저작시기2008.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758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