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가. 설화(說話)
나. 가야
다. 신라
라. 고려 시대
①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
② 공덕재(功德齋)
③ 임금의 하사품
④ 국제간의 예물
⑤ 가례(嘉禮)의 다례(茶禮)
⑥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차(茶)
나. 가야
다. 신라
라. 고려 시대
①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
② 공덕재(功德齋)
③ 임금의 하사품
④ 국제간의 예물
⑤ 가례(嘉禮)의 다례(茶禮)
⑥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차(茶)
본문내용
제사를 지낼 때 행해졌으며 탑이나 부도(浮屠)에도 다례를 올렸다.
⑦ 조선의 다인(茶人)들
◇ 김종직(金宗直)
김종직(金宗直)은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호는 점필재( 畢齋)이다. 그는 함양 군수로 있을 때 백성들의 차세를 덜어 주기 위해 관영 차밭을 만들었다.
또 다음과 같은 차시를 남겼다.
섣달 그믐날밤
월파어(月波魚)를 이미 실컷 먹었는데
해는 또 당당하게 지나가는구나
같은 말[마(馬)]을 두고서 시비를 일삼으니
희로(喜怒)는 조삼모사(朝三暮四)에 속아나는 원숭이에게나 맡기려네
돌냄비에는 창자를 씻는 차[명(茗)]요
난초등이 켜진 방에는 시렁에 가득한 책이로다
가는 해는 잡아맬 수 없으니
내일은 생각이 어떠할 것인지
◇ 김시습(金時習)
김시습(金時習)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그의 「차나무 기르기[양차(養茶)]」라는 시에서는 울타리를 엮어 해가림 재배를 해서 맛이 좋은 고급차를 키웠고, 색과 향기가 좋으면 될 터인데 관가에서는 창(槍: 제일 어린 뾰족한 싹)과 기(旗: 오그라진 어린 잎)만을 취함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는 손수 차를 끓여 부처님께 올리고 예배하였으며 때로는 돌솥에 말차(末茶: 가루차)를 끓여 마셨다.
시냇물 가운데 있는 너럭바위에서 쉬다
너럭바위가 시내 바닥에 깔려 있으니
물 흐르는 소리도 나지 않네
물 위로 솟아 있는 바위
숫돌처럼 평평하구나
열 사람은 앉을 수 있고
차솥도 넉넉히 자리잡을 만하다
나는 기뻐서 대지팡이 던져 두고
앉았다 누웠다 하네
물을 베고 누워 고인을 생각하니
세속에 더럽힌 마음 씻을 수 있네
즐겨 노느라 돌아옴도 잊고서
모르는 사이에 해는 서쪽으로 기우네
일어나라 일어나라 멍청한 해골아
어허, 물 위에 마냥 앉아 있네
◇ 이목(李穆)
이목(李穆, 1471 - 1498)은 조선조 중기가 접어들 무렵 곧 사화(士禍)가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던 때에 살았다.
사화란 묵은 세력을 도려내고 새로운 정치와 기풍을 일으키려다가 떼죽음을 당한 것을 말한다. 이들이 개혁정치를 이루어 보려고 기성세력에 맞서 그야말로 젊은 기백과 일신의 안녕을 돌보지 않고 맞서 싸웠던 것이다.
기성세력은 그 당시 높은 벼슬을 대대로 누리고 떵떵거리며 살아오던 훈구파들이었고, 언제나 왕의 주위에 몰려 이런저런 말로 왕을 꼬드겨 이권을 낚아채던 왕비의 피붙이인 척족(戚族)세력이었다. 이들은 기득권을 계속 누리고 더 많은 이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왕을 꼬드겨 이런 사류(士類)들을 몰아 죽인 것이다. 이목도 바로 사류의 한 사람으로 스물여덟 청년의 나이로 비명에 갔다.
그는 전주 이씨였는데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그리 높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직장(直長)이라는 낮은 벼슬을 지낸 홍맹부의 딸이었다.
그는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영남학파의 거두인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어릴 적부터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점필재는 그때 온 나라에 명망을 떨치던 학자였다. 더욱이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같은 훌륭한 청년 학자들이 점필재의 문하에서 배출되고 있었다.
그의 호는 한재(寒齋)인데, 어느 때부터 받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점필재에게서 호를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필재의 문하에서 그의 선배격인 정여창, 김굉필(金宏弼) 그리고 김일손 등과 어울려 학문을 토론하고 또 사물에 대한 새로운 눈을 떴다. 이들의 사귐은 한 시대의 학풍을 이루는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생애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뛰어난 문재를 지니고 열여덟 살의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이어 성균관에 들어 시무(時務)에 관한 학문을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한재가 성균관에 있을 적에 마침 성종임금은 병환으로 몸져 누워 있었다. 이에 대비는 무녀(巫女)를 시켜 아무도 몰래 성균관 벽송정 아래서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드리게 했다. 이 사실을 안 그는 동료 유생들을 데리고 제사를 중단케 하고 무녀에게 곤장을 쳤다.
이 무녀는 그 억울함을 대비에게 호소했고 대비는 또 성종에게 일러 바쳤다. 이에 성종은 짐짓 성을 내고 그 일을 저지를 유생들의 명단을 바치라고 호령했다. 당시 성균관 유생들은 큰 벌이 내릴 것을 두려워하여 모두 도망쳤다. 그러나 그만은 꼼짝하지 않고 방을 지켰다. 이 사실을 안 성종은 그에게 특별히 술을 내리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의 꼿꼿함을 임금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가 480자로 된 『다부(茶賦)』를 지어 차의 현묘함을 노래하였다. 그가 「차의 다섯 가지 공로」로 든 것은 책을 볼 때 갈증을 없애 주고, 울분을 풀어 주며, 손님과 주인의 정을 화합하게 하고, 뱃속 기생충으로 인한 고통을 없앨 뿐만 아니라 취한 술을 깨게 하는 등 차의 직접적인 효과이며, 「차의 여섯 가지 덕성」은 오래 살게 하고, 병을 낫게 하며, 기운을 맑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하며, 신선과 같게 하고, 예의롭게 하는 등 차를 지속적으로 마셔 얻는 이로움을 말한 것이다.
◇ 다산. 초의. 추사
조선 후기 전남 대둔사(大芚寺) 주변에서 쓰러져 가던 우리 나라의 차문화가 다시 한번 융성하여 꽃피게 된다. 유배온 다산(茶山 정약용)과 초의(草衣) 선사, 추사(秋史 김정희), 신위, 홍현주(洪顯周), 소치(小癡 허유) 등은 차를 통한 교유로 차를 크게 발전시켰다.
특히 다산은 43살 때 20살 아래인 대둔사(大芚寺: 대흥사)의 아암 혜장(兒庵惠藏) 스님을 만나고부터 차생활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우리 나라 최초의 다회인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다. 그가 차를 구하는 「걸명소(乞茗疏)」와 차시가 전해지고 있다.
추사는 초의와는 동갑으로 승설(勝雪)이란 차 이름에서 '승설학인(勝雪學人)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초의는 우리 나라 차의 성서라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했고, 청나라 모환문(毛煥文)이 엮은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뽑아 적은 『다신전(茶神傳)』을 화개 칠불사에서 지었다.
*김동곤(쌍계제다 대표), "좋은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아라"(하동:하동 문화원,199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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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조선의 다인(茶人)들
◇ 김종직(金宗直)
김종직(金宗直)은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호는 점필재( 畢齋)이다. 그는 함양 군수로 있을 때 백성들의 차세를 덜어 주기 위해 관영 차밭을 만들었다.
또 다음과 같은 차시를 남겼다.
섣달 그믐날밤
월파어(月波魚)를 이미 실컷 먹었는데
해는 또 당당하게 지나가는구나
같은 말[마(馬)]을 두고서 시비를 일삼으니
희로(喜怒)는 조삼모사(朝三暮四)에 속아나는 원숭이에게나 맡기려네
돌냄비에는 창자를 씻는 차[명(茗)]요
난초등이 켜진 방에는 시렁에 가득한 책이로다
가는 해는 잡아맬 수 없으니
내일은 생각이 어떠할 것인지
◇ 김시습(金時習)
김시습(金時習)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그의 「차나무 기르기[양차(養茶)]」라는 시에서는 울타리를 엮어 해가림 재배를 해서 맛이 좋은 고급차를 키웠고, 색과 향기가 좋으면 될 터인데 관가에서는 창(槍: 제일 어린 뾰족한 싹)과 기(旗: 오그라진 어린 잎)만을 취함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는 손수 차를 끓여 부처님께 올리고 예배하였으며 때로는 돌솥에 말차(末茶: 가루차)를 끓여 마셨다.
시냇물 가운데 있는 너럭바위에서 쉬다
너럭바위가 시내 바닥에 깔려 있으니
물 흐르는 소리도 나지 않네
물 위로 솟아 있는 바위
숫돌처럼 평평하구나
열 사람은 앉을 수 있고
차솥도 넉넉히 자리잡을 만하다
나는 기뻐서 대지팡이 던져 두고
앉았다 누웠다 하네
물을 베고 누워 고인을 생각하니
세속에 더럽힌 마음 씻을 수 있네
즐겨 노느라 돌아옴도 잊고서
모르는 사이에 해는 서쪽으로 기우네
일어나라 일어나라 멍청한 해골아
어허, 물 위에 마냥 앉아 있네
◇ 이목(李穆)
이목(李穆, 1471 - 1498)은 조선조 중기가 접어들 무렵 곧 사화(士禍)가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던 때에 살았다.
사화란 묵은 세력을 도려내고 새로운 정치와 기풍을 일으키려다가 떼죽음을 당한 것을 말한다. 이들이 개혁정치를 이루어 보려고 기성세력에 맞서 그야말로 젊은 기백과 일신의 안녕을 돌보지 않고 맞서 싸웠던 것이다.
기성세력은 그 당시 높은 벼슬을 대대로 누리고 떵떵거리며 살아오던 훈구파들이었고, 언제나 왕의 주위에 몰려 이런저런 말로 왕을 꼬드겨 이권을 낚아채던 왕비의 피붙이인 척족(戚族)세력이었다. 이들은 기득권을 계속 누리고 더 많은 이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왕을 꼬드겨 이런 사류(士類)들을 몰아 죽인 것이다. 이목도 바로 사류의 한 사람으로 스물여덟 청년의 나이로 비명에 갔다.
그는 전주 이씨였는데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그리 높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직장(直長)이라는 낮은 벼슬을 지낸 홍맹부의 딸이었다.
그는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영남학파의 거두인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어릴 적부터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점필재는 그때 온 나라에 명망을 떨치던 학자였다. 더욱이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같은 훌륭한 청년 학자들이 점필재의 문하에서 배출되고 있었다.
그의 호는 한재(寒齋)인데, 어느 때부터 받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점필재에게서 호를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필재의 문하에서 그의 선배격인 정여창, 김굉필(金宏弼) 그리고 김일손 등과 어울려 학문을 토론하고 또 사물에 대한 새로운 눈을 떴다. 이들의 사귐은 한 시대의 학풍을 이루는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생애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뛰어난 문재를 지니고 열여덟 살의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이어 성균관에 들어 시무(時務)에 관한 학문을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한재가 성균관에 있을 적에 마침 성종임금은 병환으로 몸져 누워 있었다. 이에 대비는 무녀(巫女)를 시켜 아무도 몰래 성균관 벽송정 아래서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드리게 했다. 이 사실을 안 그는 동료 유생들을 데리고 제사를 중단케 하고 무녀에게 곤장을 쳤다.
이 무녀는 그 억울함을 대비에게 호소했고 대비는 또 성종에게 일러 바쳤다. 이에 성종은 짐짓 성을 내고 그 일을 저지를 유생들의 명단을 바치라고 호령했다. 당시 성균관 유생들은 큰 벌이 내릴 것을 두려워하여 모두 도망쳤다. 그러나 그만은 꼼짝하지 않고 방을 지켰다. 이 사실을 안 성종은 그에게 특별히 술을 내리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의 꼿꼿함을 임금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가 480자로 된 『다부(茶賦)』를 지어 차의 현묘함을 노래하였다. 그가 「차의 다섯 가지 공로」로 든 것은 책을 볼 때 갈증을 없애 주고, 울분을 풀어 주며, 손님과 주인의 정을 화합하게 하고, 뱃속 기생충으로 인한 고통을 없앨 뿐만 아니라 취한 술을 깨게 하는 등 차의 직접적인 효과이며, 「차의 여섯 가지 덕성」은 오래 살게 하고, 병을 낫게 하며, 기운을 맑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하며, 신선과 같게 하고, 예의롭게 하는 등 차를 지속적으로 마셔 얻는 이로움을 말한 것이다.
◇ 다산. 초의. 추사
조선 후기 전남 대둔사(大芚寺) 주변에서 쓰러져 가던 우리 나라의 차문화가 다시 한번 융성하여 꽃피게 된다. 유배온 다산(茶山 정약용)과 초의(草衣) 선사, 추사(秋史 김정희), 신위, 홍현주(洪顯周), 소치(小癡 허유) 등은 차를 통한 교유로 차를 크게 발전시켰다.
특히 다산은 43살 때 20살 아래인 대둔사(大芚寺: 대흥사)의 아암 혜장(兒庵惠藏) 스님을 만나고부터 차생활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우리 나라 최초의 다회인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다. 그가 차를 구하는 「걸명소(乞茗疏)」와 차시가 전해지고 있다.
추사는 초의와는 동갑으로 승설(勝雪)이란 차 이름에서 '승설학인(勝雪學人)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초의는 우리 나라 차의 성서라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했고, 청나라 모환문(毛煥文)이 엮은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뽑아 적은 『다신전(茶神傳)』을 화개 칠불사에서 지었다.
*김동곤(쌍계제다 대표), "좋은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아라"(하동:하동 문화원,199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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