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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Ⅰ. 이단관
Ⅱ. 본체론과 인성론
Ⅲ. 지행론과 독서론
1. 지행론
2. 독서론
Ⅳ. 위학체계와 경의사상
1. 위학체계
2. 경의사상
Ⅴ. 출사관
맺음말
Ⅰ. 이단관
Ⅱ. 본체론과 인성론
Ⅲ. 지행론과 독서론
1. 지행론
2. 독서론
Ⅳ. 위학체계와 경의사상
1. 위학체계
2. 경의사상
Ⅴ. 출사관
맺음말
본문내용
觀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出仕觀을 견지하기 위해서 부단히 義를 강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義에 합당할 때에만 出仕해야 한다는 出仕觀에서는 義의 존재 여부가 出處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설정되며, 따라서 남명은 자신이 出仕할 수 없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즉 不出仕의 명분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도 그토록 義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不仕에 대해 「君臣之倫을 어지럽히는 無義」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등 出仕의 초점이 의리문제로 돌아감에 미쳐서, 남명이 자신의 처지를 옹호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논리 중 가장 적극적인 것은 그의 不仕가 無義가 아니라 바로 그 義에 입각한 것임을 천명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修養論이나 出仕觀에 있어 남명이 義를 강조함은 필연적인 추세라 하겠다.
맺음말
이상에서 남명과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16세기 사상계의 변화 속에서 살펴보았다.
-575-
남명의 사상은 성리서에 대한 독서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理를 본체로서의 태극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敬을 기본으로 하는 明善 誠身을 학문과 수양의 요체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朱子學만을 고집하는 편협성에서 벗어나서 老莊사상 등 諸思想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당시 朱子性理學의 정착과정으로 진행되어 가던 理氣心性 등의 이론논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上達天理의 근거로서의 下學人事를 요구하는 가운데 실천을 강조하게 되고 敬과 함께 義를 드러내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특징은 현실인식과 出仕觀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당시의 정치적 해결 과제인 훈척정치기의 비리와 모순에 대해서 적극적 비판과 비타협적 자세를 견지하고, 이러한 현실인식 위에서 엄격한 출사관을 형성하여 정치참여를 거부하며 평생을 處士로 보내는 강력한 不仕의지를 보여 준다.
한편 퇴계의 사상 역시 남명과 비슷한 학문과정을 거쳐 형성되어 主理論的 本體論과 明善(格致) 誠身(誠正)의 爲學體系, 그리고 이를 밑받침해 주는 敬을 수양의 요체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퇴계 자신의 학문적 욕구와 朱子大全 을 비롯한 朱子書의 간행과 보급으로 그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심화되어, 理氣四七 등의 이론논쟁을 통해 朱子性理學 정착을 주도해 나가는 가운데 이단에 대해 엄격한 辨斥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程 朱이래 강조되어 오던 敬의 의미를 특별히 부각시켜 이를 致知 力行을 통해 일관되게 견지해야 할 修己의 기본 덕목으로 강조하는 가운데, 理勢를 중시하는 보다 온건한 현실인식을 갖게 되며, 출사관에 있어서도 학문과 수양을 강조하는 「學優仕優」의 태도를 갖게된다.
남명과 퇴계가 모두 자신들이 살아왔던 훈척정치하의 사화기를 거치며, 사회현실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정치적 모순과 비리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갖는 것은, 그들이 모두 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理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敬을 중심으로 한 동일한 爲學體系를 구성하고 있는 학문적 공통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묘사림 이래의 실천적 학풍을 계승한 남명은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한 匡正의 急務로서 義를 통한 실천에 역점을 두고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에는 크게 전념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朱子性理學의 관점에서 본다면 당시 사상계의 변화를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할 수 있다.
-576-
이와 대조적으로 퇴계는 이제까지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理氣四七논쟁을 통해 朱子性理學의 기반을 다져나가는데, 이는 이 때 朱子大全 을 비룻한 朱子書가 간행 보급되었다는 외부적 조건도 그 원인이 되겠지만, 거듭된 사화에도 불구하고 사림의 기반이 확대되면서 政界를 주도해 나감에 따라, 단순한 실천의 강조보다는 그 실천의 내면적 원리로서의 이론적 근거가 요구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내면적 계기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결국 실천 강조의 입장에서 남명이 퇴계의 이론 지향적 학풍을 비판하고, 퇴계 역시 남명의 노장사상 등에 대한 이단적 성향을 경계한 것은, 당시 학계의 중요한 변화였던 朱子性理學의 정착과정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사람의 견해 차이였으며, 퇴계의 전체 사상을 놓고 볼 때 퇴계 역시 궁극에는 敬을 통한 修養的 실천을 강조하여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지향하였지만, 당시 이러한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남명의 비판을 받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남명과 퇴계가 모두 훈척정치하의 비리와 모순에 대해 강렬한 비판의식을 갖고 公道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이들의 사상적 특성과 현실 인식의 차이에서 결국 서로 다른 정치의식을 형성하였다. 즉 구체제의 비리 척결 자세와 출사관 등에서 두 사람은 상이한 정치 의식을 보여주는 바, 이는 훈척정치기에서 사림정치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처했던 당시의 사림세력이, 정치적 전환기를 맞아 제시할 수 있었던 정치적 대응 방식의 두 가지 유형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대조적인 정치의식은 당시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서로 대립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사상사에 있어서 이들이 제기했던 실천과 이론의 문제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본고의 한계는 첫째, 이들의 구체적 정치의식이나 經世論 파악에 소홀히 했다는 점인데, 이는 두 사람 모두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정책에 적극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개혁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자신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다음 세대인 栗谷이 경세론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인데, 이는 사림세력의 정치적 주도권 행사가 허용된 정치 여건의 변화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577-
둘째는, 사상적 측면에서도 이들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門人들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제기한 본 논문이 취한 시각 자체로 인한 것이지만, 남명이나 퇴계가 크게 드러나게 된 원인이 바로 門人들에 의해서였던 만큼 이들 門人들에 대한 연구는 두 사람 자체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별도의 연구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맺음말
이상에서 남명과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16세기 사상계의 변화 속에서 살펴보았다.
-575-
남명의 사상은 성리서에 대한 독서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理를 본체로서의 태극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敬을 기본으로 하는 明善 誠身을 학문과 수양의 요체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朱子學만을 고집하는 편협성에서 벗어나서 老莊사상 등 諸思想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당시 朱子性理學의 정착과정으로 진행되어 가던 理氣心性 등의 이론논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上達天理의 근거로서의 下學人事를 요구하는 가운데 실천을 강조하게 되고 敬과 함께 義를 드러내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특징은 현실인식과 出仕觀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당시의 정치적 해결 과제인 훈척정치기의 비리와 모순에 대해서 적극적 비판과 비타협적 자세를 견지하고, 이러한 현실인식 위에서 엄격한 출사관을 형성하여 정치참여를 거부하며 평생을 處士로 보내는 강력한 不仕의지를 보여 준다.
한편 퇴계의 사상 역시 남명과 비슷한 학문과정을 거쳐 형성되어 主理論的 本體論과 明善(格致) 誠身(誠正)의 爲學體系, 그리고 이를 밑받침해 주는 敬을 수양의 요체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퇴계 자신의 학문적 욕구와 朱子大全 을 비롯한 朱子書의 간행과 보급으로 그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심화되어, 理氣四七 등의 이론논쟁을 통해 朱子性理學 정착을 주도해 나가는 가운데 이단에 대해 엄격한 辨斥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程 朱이래 강조되어 오던 敬의 의미를 특별히 부각시켜 이를 致知 力行을 통해 일관되게 견지해야 할 修己의 기본 덕목으로 강조하는 가운데, 理勢를 중시하는 보다 온건한 현실인식을 갖게 되며, 출사관에 있어서도 학문과 수양을 강조하는 「學優仕優」의 태도를 갖게된다.
남명과 퇴계가 모두 자신들이 살아왔던 훈척정치하의 사화기를 거치며, 사회현실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정치적 모순과 비리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갖는 것은, 그들이 모두 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理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敬을 중심으로 한 동일한 爲學體系를 구성하고 있는 학문적 공통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묘사림 이래의 실천적 학풍을 계승한 남명은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한 匡正의 急務로서 義를 통한 실천에 역점을 두고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에는 크게 전념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朱子性理學의 관점에서 본다면 당시 사상계의 변화를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할 수 있다.
-576-
이와 대조적으로 퇴계는 이제까지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理氣四七논쟁을 통해 朱子性理學의 기반을 다져나가는데, 이는 이 때 朱子大全 을 비룻한 朱子書가 간행 보급되었다는 외부적 조건도 그 원인이 되겠지만, 거듭된 사화에도 불구하고 사림의 기반이 확대되면서 政界를 주도해 나감에 따라, 단순한 실천의 강조보다는 그 실천의 내면적 원리로서의 이론적 근거가 요구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내면적 계기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결국 실천 강조의 입장에서 남명이 퇴계의 이론 지향적 학풍을 비판하고, 퇴계 역시 남명의 노장사상 등에 대한 이단적 성향을 경계한 것은, 당시 학계의 중요한 변화였던 朱子性理學의 정착과정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사람의 견해 차이였으며, 퇴계의 전체 사상을 놓고 볼 때 퇴계 역시 궁극에는 敬을 통한 修養的 실천을 강조하여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지향하였지만, 당시 이러한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남명의 비판을 받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남명과 퇴계가 모두 훈척정치하의 비리와 모순에 대해 강렬한 비판의식을 갖고 公道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이들의 사상적 특성과 현실 인식의 차이에서 결국 서로 다른 정치의식을 형성하였다. 즉 구체제의 비리 척결 자세와 출사관 등에서 두 사람은 상이한 정치 의식을 보여주는 바, 이는 훈척정치기에서 사림정치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처했던 당시의 사림세력이, 정치적 전환기를 맞아 제시할 수 있었던 정치적 대응 방식의 두 가지 유형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대조적인 정치의식은 당시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서로 대립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사상사에 있어서 이들이 제기했던 실천과 이론의 문제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본고의 한계는 첫째, 이들의 구체적 정치의식이나 經世論 파악에 소홀히 했다는 점인데, 이는 두 사람 모두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정책에 적극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개혁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자신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다음 세대인 栗谷이 경세론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인데, 이는 사림세력의 정치적 주도권 행사가 허용된 정치 여건의 변화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577-
둘째는, 사상적 측면에서도 이들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門人들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제기한 본 논문이 취한 시각 자체로 인한 것이지만, 남명이나 퇴계가 크게 드러나게 된 원인이 바로 門人들에 의해서였던 만큼 이들 門人들에 대한 연구는 두 사람 자체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별도의 연구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