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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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경건주의란?
경건이란 헬라어는 유세베이아이다. 이것을 영어로 옮길 때 Godliness가 된다. 이 말이 성서 이외의 희랍 문헌에서 사용되었을 때의 뜻은 신들이나 인간들에 대한 당연한 존경의 태도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거의 한결같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1) 인간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 쓰일 때
이 말이 딤전5:4에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라는 말로 쓰인 `효`가 곧 유세베이아이다. 이 원문을 흠정역에는 `경건`(Piety)으로 번역했고 R.S.V.에는 `종교적 의무`(religious duty)로, 한글 개역성경은 `효`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글 공동번역에도 `종교적 의무`라고 하였다. `유세베이아`라는 말이 인간에 대한 태도라는 말로 쓰일 때는 사람이 자기 가족을 위한 적당한 관심과 의무를 표현하는 말을 뜻한다.
(2)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 쓰일 때
신약 성경에서 `유세베이아`라는 말은 거의 예외 없이 `경건`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다 같은 영어 성경인데도 `유세베이아`를 놓고 행 3:12을 흠정역에서는 `거룩`(holiness)라고 번역했고, R.S.V.에서는 `경건`(piety)이라고 번역했다. 우리나라 한글 개역 성경은 `경건`이라고 하였다.

본문내용

Street Experience:1738)'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모라비안 형제단의 한 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웨슬레는 런던의 훼터 레인(Fetter Lane)에 있는 모라비아 교회에 가입하였다. 1738년 웨슬레는 그가 존경했던 사람들에게 배우기 위해 헤른후트로 여행을 하였다. 후에 웨슬레는 모라비안파로부터 떨어져 나오지만 그가 최초에 구원을 얻는 중생의 체험은 모라비안 형제단에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체험은 존 웨슬레만 아니라 찰스 웨슬레 그리고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까닭에 모라비안 형제단의 가치는 그들 자체 운동에 의한 파급 효과로 인해 세계 선교열을 일으킨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미친 영향으로 인해 그 파장이 길게 연결된 것이다.
4. 경건주의의 영향
경건주의는 17세기에 시작하여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들 경건주의가 현대에 끼친 영향과 공헌은 무엇인가? 앞서 신비주의는 현대에 끼친 영향이 퀘이커 외에는 별로 공헌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여러 면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1) 경건주의는 20세기 종교계에 성서신학을 출현하게 하였다.
전에 전통적 교회들은 교리학, 신조학, 또는 교회론 등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교리나 신학보다도 경건한 삶에 관한 신학을 수립하기 위해 새로운 성서 연구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종교개혁 당시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여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기 위해 원전 연구를 많이 하였다. 그런데 성경에 관한 원전 연구는 성서의 고등비판의 결과 성서의 권위를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경건주의자들은 성경을 연구하되 성서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위한 새로운 성서 연구 방법을 만들어 놓았다. 이 점에 있어서 경건주의자들의 공헌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 경건주의자들은 현대 에큐메니즘(Ecumenism)에 큰 공헌을 하였다.
스페너나 진젠돌프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놓는 교리나 신학적 차이 같은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저들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무엇이 다른가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무엇이 같은가를 찾아 연합시키려는 운동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교리학에 대한 단순화를 추진하였다. 정통신학에는 신학적으로 체계화된 논리는 있었으나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었다. 물론 경건주의자들에게도 신학적인 실수가 있었으나 분열보다는 일치를 이루는 능력이 드러났다.
(3) 경건주의는 사람이 종교적인 인간이 됨으로써 저절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을 깨뜨렸다.
종교나 종교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 애호가들의 주장이다. 참된 신앙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인격적 만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인격적 체험 신앙을 저들 경건주의자들이 일찍이 가르쳐 주었고, 그것이 현대에 와서 보편화된 진리가 되었다.
이들 경건주의는 ① 개인적이고도 체험적인 것으로써의 종교. ② 전 인격적인 참여에 의한 삶의 증거. ③ 하나님 말씀에 의한 능력이 나타나는 생활. ④ 영혼 없는 제도, 생명력 없는 몸, 내용 없는 형식 등에 대한 저항등이 전체에 흐르는 핵심을 이루었다.
5. 결론
경건주의는 크게 보아 중세에서 근세로 변하는 포물선의 한 가운데서 일어난 운동이다. 시대가,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이 변화를 짧게 가장 잘 표현한다면 '객관성으로부터 주관성으로!'다. 중세적인 구조에서 중요했던 객관성(신, 교회, 신앙, 전체, 교리....) 은 주관성(인간, 이성, 인격적 개인, 경험적 진리....)에 밀리고 있었다. 전통적 기독교, 내려오던 교회와 신앙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계몽주의에 와서 이런 커다란 변화의 과정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중세적인 구조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된 것은 계몽주의에서부터 라는 트뢸치(Ernst Troeltsch)의 주장은 이런 점에서 아주 중요한 통찰이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를 반대하는 무신론적 경향이 벌써 일어나고 있었다. 아른트와, 특히 스페너는 벌써 무신론이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경건주의는 이런 가운데서 기독교를 의미있게 변증하려던 운동이었다. 중세 때 신앙이란, 그 자체가 거대한 성례인 제도적인 교회에 그저 소속하는 것이었다. 위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인정하면 되었다. 그러나 근세로 넘어가면서 상황은 바뀌고 있었다. 개개인이 그리고 개인의 인격성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러함'(객관)보다 '나에게 어떠함'(주관)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국가의 권력이 나 그 어떤 외적인 제도가 개인의 신앙과 양심을 강제할 수 없다는 근대적인 사상이 크게 흐르고 있었다. 1600년 즈음에 있었던 '경건성 의 위기'는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아른트는 교리보다 삶이 중요하다고 말함으로써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방향의 신앙이 실현될 수 있는 '마당'이 없었다. 그 때까지 공적인 신앙 모임의 거의 유일한 방식은 예배 뿐이었다. 예배라는 마당은 한 사람이 설교하고 나머지는 수동적으로 듣는 형식이다. 개인은 결단할 수 있는 여건이 넉넉하지 못하다. 스페너는 '교회안의 작은 교회'를 말함으로써 아른트의 방향이 구체적으 로 실천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었다. 작은 모임에서 각 개인은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서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모르면 묻고, 서로 가르치고.... 그리하여 신앙적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경건주의는, 소그룹 모임 사상을 말한 스페너는 변하는 당시의 큰 흐름을 정확하게 읽으며 그 가운데서 기독교 복음과 교회의 존재의미를 찾으려던 적극적이며 개방적인 운동이었다.
참고문헌
신학사전. 책임번역 신성경. 엠마오출판 1986.
경건주의 자들과 그 사상. 피터 C저. 역작 엄성옥. 은성출판.
경건주의 마르틴 슈미르 지음. 구영철 옮김. 성광 문화사.
기독교사상Ⅲ. 후스토 L 곤잘레스저. 이형기. 차종순역. 대한 예수교장로회출판국.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사상사. TONY LANE저. 김응국 역. 서울 1991.
경 건 주 의
과목: 교회사 개론.
담당교수: 강정진 교수.
학과, 학번: 연구과, 952107.
이름: 김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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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5.14
  • 저작시기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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