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현실
2. 허구
3. 그렇다면 역사는?
4. 현실과 허구의 관계
2. 허구
3. 그렇다면 역사는?
4. 현실과 허구의 관계
본문내용
녀에 의하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기독교의 가설에 따라 형성된 서구인의 상상력은 문학에 담긴 수많은 환상요소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술은 두 가지 충동의 산물이다. 하나는 미메시스로서, 경험의 공유, 사건, 사람, 상황, 대상을 모사 하려는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환상으로서 권태로부터의 탈출, 놀이, 환영, 결핍된 것에 대한 갈망, 주어진 것을 변화시키고 리얼리티를 바꾸려는 욕망이다. 요컨대 환상은 등치적 리얼리티로부터의 일탈이다. 모방론은 그리이스 미학의 토대였으며, 이제껏 어떤 형식도 보편적인 차원에서는 리얼리즘을 대체하지 못했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현대 예술사에서 지배력을 잃어가고 있다.
현대예술에서 리얼리즘에 대한 회의는, 유용한 말과 예술적인 말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블랑쇼는 작가는 진실을 말하는 사상과 형태를 주는 사상을 구별할 줄 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유용한 말은 도구, 수단이며, 행동과 작업, 논리와 지식의 언어, 즉각적으로 전달하는 언어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구처럼 규칙적인 사용 속에서 사라져 가는 언어이다. 반면 예술의 언어는 말한다는 것이 일시적이고 종속적이며, 통상적인 수단이 아니라, 본래의 경험 속에서 완성되려 한다. 통상적인 언어는 사물들에 대해 말을 한다. 사물들을 떼어내서 우리에게 건네준다. 그 언어자체는 언제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허구의 언어가 되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 유용한 말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구별하게 하지만, 그 구별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현대예술은 유용한 말의 역할을 과학 등에 위임하고, 허구의 조작자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떠맡게 된다. 퍼트리샤 워에 의하면 현대예술가들은 허구라는 이 새로운 리얼리티(혹은 비리얼리티)를 보다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로브그리예도 현대예술은 허구를 조작하는 것이고, 현대예술의 장치는 마르셀 뒤샹의 [라지 글라스]처럼 여러 겹으로 늘어진 어떤 투명한 함정 속에서 단지 어떤 기능만을 수행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장르인 영화조차도 그 자체가 허구의 공인된 전달 수단이다. 예술은 이러한 허공체험의 특권적 장소로 남아있게 된다.
블랑쇼에 의하면 예술의 상상적 공간은 무한히 늦어진 움직임 덕분에 그 자체가 언제나 생성 중이다. 예술은 단지 기존의 사실의 추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를 인식하게 하고, 우리들 스스로가 이 세계를 구성하도록 한다. 그러나 현대예술가들은 이 세계를 옮겨 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 세계를 자신의 언어구조물로 완전히 대체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현대 예술작품은 모든 것에 엮여져 있는 텍스트로서 '사상, 이미지, 감각 등을 실어 나르는 말들의 거대한 흐름 이외에는 그것들을 통합시켜주는 것은 없다'(블랑쇼)
홍경택, [서재 I], 유화, 181.5x220.7cm,1997년; 거대한 도서관으로서의 세계.
리얼리즘 예술은 세계가 합리적이며 묘사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사실주의적 예술작품에서 텍스트의 언어들을 현실세계 속에 존재하는 대상들에 대응시켜 이해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그 자체로 자명한 객관적 세계를 의심하고, 예술이란 다른 예술작품에 관한 것이라고 본다. 퍼트리샤 워에 의하면 모더니즘은 순수의식의 탐구라는 불가능한 과업에 치중한다. 모더니스트에게 있어 질서의 상실은 정신의 심오한 단계에서의 그 회복에 대한 신념으로 인도된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말기에 오면 작품제작 자체가 예술작품의 리얼리티를 구성하거나 창조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즉 의식보다는 작업 자체에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메타 단계에 오면, 더 이상 작가들은 신화적 유추나 순수 형이상학적 체계를 권위와 의미의 최종구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필자는 퍼트리샤 워가 [메타픽션]에서 논구하는 그 '메타픽션'이 '허구에 대한 허구'라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로 대체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퍼트리샤 워는 그 책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유발시켰던 외부의 권위 있는 질서체계에 대한 신념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위기의식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모더니즘의 원근법주의perspecism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불확실에로의 변환된다. 모더니즘에서 리얼리티는 주관적으로 구성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리얼리티가 언어적으로 구성됨을 더욱 강조한다. 모더니스즘 텍스트는 은연중에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에 주목하지만, 그것은 의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작업을 통해서 허구의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들은 텍스트 자체의 언어적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것이다.
퍼트리샤 워는 모더니즘이 세계인식에 관한 불확실성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텍스트를 창조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텍스트성의 조건을 과시하면서, 그 '대안세계'의 구성을 통해서 그 속에 나타난 리얼리티의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심오하고도 고립된 현현의 순간에 의식을 드러내면서, 그 자체가 미학의 토대가 되는 정신에 대해 모더니즘이 가졌던 관심이 부족하다. 모더니즘이 의식의 위엄과 보여주기를 강조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의 메타단계인 제작 자체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모더니즘 역시 텍스트의 미학적 구성에 관심이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처럼 기교의 자의식적 상황을 체계적으로 과시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의 자의적 체계를 통해 세계의 윤곽을 제시하며, 이 체계에 의해서 최상의 리얼리티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메타 픽션'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현실이 리얼리즘의 영역이었다면, 허구는 모더니즘의 영역, 그리고 그 모더니즘에서 파생된 포스트모더니즘이 '허구의 허구'라는 메타픽션의 상황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략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통해 우리를 에워싸는 주요 이즘들을 거론하다 보니, 필자는 사실(리얼리즘)이나 메타 픽션(포스트모더니즘)보다는 허구(모더니즘)가, 허구보다는 메타 리얼리티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21세기의 예술가들 앞에 놓인 것은 바로 이 '메타 리얼리티'라는 미지의 영역은 아닐까 예상해 본다.
현대예술에서 리얼리즘에 대한 회의는, 유용한 말과 예술적인 말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블랑쇼는 작가는 진실을 말하는 사상과 형태를 주는 사상을 구별할 줄 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유용한 말은 도구, 수단이며, 행동과 작업, 논리와 지식의 언어, 즉각적으로 전달하는 언어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구처럼 규칙적인 사용 속에서 사라져 가는 언어이다. 반면 예술의 언어는 말한다는 것이 일시적이고 종속적이며, 통상적인 수단이 아니라, 본래의 경험 속에서 완성되려 한다. 통상적인 언어는 사물들에 대해 말을 한다. 사물들을 떼어내서 우리에게 건네준다. 그 언어자체는 언제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허구의 언어가 되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 유용한 말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구별하게 하지만, 그 구별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현대예술은 유용한 말의 역할을 과학 등에 위임하고, 허구의 조작자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떠맡게 된다. 퍼트리샤 워에 의하면 현대예술가들은 허구라는 이 새로운 리얼리티(혹은 비리얼리티)를 보다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로브그리예도 현대예술은 허구를 조작하는 것이고, 현대예술의 장치는 마르셀 뒤샹의 [라지 글라스]처럼 여러 겹으로 늘어진 어떤 투명한 함정 속에서 단지 어떤 기능만을 수행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장르인 영화조차도 그 자체가 허구의 공인된 전달 수단이다. 예술은 이러한 허공체험의 특권적 장소로 남아있게 된다.
블랑쇼에 의하면 예술의 상상적 공간은 무한히 늦어진 움직임 덕분에 그 자체가 언제나 생성 중이다. 예술은 단지 기존의 사실의 추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를 인식하게 하고, 우리들 스스로가 이 세계를 구성하도록 한다. 그러나 현대예술가들은 이 세계를 옮겨 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 세계를 자신의 언어구조물로 완전히 대체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현대 예술작품은 모든 것에 엮여져 있는 텍스트로서 '사상, 이미지, 감각 등을 실어 나르는 말들의 거대한 흐름 이외에는 그것들을 통합시켜주는 것은 없다'(블랑쇼)
홍경택, [서재 I], 유화, 181.5x220.7cm,1997년; 거대한 도서관으로서의 세계.
리얼리즘 예술은 세계가 합리적이며 묘사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사실주의적 예술작품에서 텍스트의 언어들을 현실세계 속에 존재하는 대상들에 대응시켜 이해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그 자체로 자명한 객관적 세계를 의심하고, 예술이란 다른 예술작품에 관한 것이라고 본다. 퍼트리샤 워에 의하면 모더니즘은 순수의식의 탐구라는 불가능한 과업에 치중한다. 모더니스트에게 있어 질서의 상실은 정신의 심오한 단계에서의 그 회복에 대한 신념으로 인도된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말기에 오면 작품제작 자체가 예술작품의 리얼리티를 구성하거나 창조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즉 의식보다는 작업 자체에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메타 단계에 오면, 더 이상 작가들은 신화적 유추나 순수 형이상학적 체계를 권위와 의미의 최종구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필자는 퍼트리샤 워가 [메타픽션]에서 논구하는 그 '메타픽션'이 '허구에 대한 허구'라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로 대체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퍼트리샤 워는 그 책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유발시켰던 외부의 권위 있는 질서체계에 대한 신념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위기의식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모더니즘의 원근법주의perspecism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불확실에로의 변환된다. 모더니즘에서 리얼리티는 주관적으로 구성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리얼리티가 언어적으로 구성됨을 더욱 강조한다. 모더니스즘 텍스트는 은연중에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에 주목하지만, 그것은 의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작업을 통해서 허구의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들은 텍스트 자체의 언어적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것이다.
퍼트리샤 워는 모더니즘이 세계인식에 관한 불확실성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텍스트를 창조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텍스트성의 조건을 과시하면서, 그 '대안세계'의 구성을 통해서 그 속에 나타난 리얼리티의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심오하고도 고립된 현현의 순간에 의식을 드러내면서, 그 자체가 미학의 토대가 되는 정신에 대해 모더니즘이 가졌던 관심이 부족하다. 모더니즘이 의식의 위엄과 보여주기를 강조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의 메타단계인 제작 자체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모더니즘 역시 텍스트의 미학적 구성에 관심이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처럼 기교의 자의식적 상황을 체계적으로 과시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의 자의적 체계를 통해 세계의 윤곽을 제시하며, 이 체계에 의해서 최상의 리얼리티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메타 픽션'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현실이 리얼리즘의 영역이었다면, 허구는 모더니즘의 영역, 그리고 그 모더니즘에서 파생된 포스트모더니즘이 '허구의 허구'라는 메타픽션의 상황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략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통해 우리를 에워싸는 주요 이즘들을 거론하다 보니, 필자는 사실(리얼리즘)이나 메타 픽션(포스트모더니즘)보다는 허구(모더니즘)가, 허구보다는 메타 리얼리티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21세기의 예술가들 앞에 놓인 것은 바로 이 '메타 리얼리티'라는 미지의 영역은 아닐까 예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