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제 목 : 허드슨 테일러
□ 총 페이지수 : 10
□ 목 차:
허드슨 테일러(J.Hudson Taylor)
1.생애
2.가정적,사회적,학문적,신앙적환경과배경
3. 부르심
4. 선교사로서의 준비
5.신학적 관점, 목회관(목양관)
6.직업과 선교의 효율성(자국에서의 직업,전문성,현지직업,사역전략,사역열매)
7.선교지의 상황
□ 총 페이지수 : 10
□ 목 차:
허드슨 테일러(J.Hudson Taylor)
1.생애
2.가정적,사회적,학문적,신앙적환경과배경
3. 부르심
4. 선교사로서의 준비
5.신학적 관점, 목회관(목양관)
6.직업과 선교의 효율성(자국에서의 직업,전문성,현지직업,사역전략,사역열매)
7.선교지의 상황
본문내용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팽창기라 볼 수 있는 1861년-1900년 시기인데 태평천국운동이 계속 확산 되어가는 동안에 개신교 선교운동은 1861년에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북경조약 덕택이다. 점점 약해져가는 중국과 강해져가는 서구세력들간에 조인된 북경조약은 선교사들에게도 땅을 소유하고 교회를 건축하며 중국 본토에서 전도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제 선교의 장애물들이 완전히 걷힌 셈이다. 그때까지 50여 년 동안 준비한 모든 자원들을 총동원하여 이 새로운 기회를 충실히 이용하였다. 수백 명의 선교사들이 중국 본토에 깊이 들어가서 앞다투어 선교했다. 수많은 선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허드슨 테일러가 세운 중국 본토선교회의 활동이 괄목할 만했다.
이때의 선교사들의 활동을 보면 교육, 서양과학과 기술을 전파, 의료, 사회봉사, 사회복지, 사회개혁에 많은 일들을 했다.
금주운동, 아편금지운동, 도박금지. 매춘반대운동, 전족(여자의 발을 묶는 일) 반대운동, 여성인권 신장운동 등에도 많이 공헌을 했다.
특기할 것은 1870년대와 1880년에 농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을 때 이들 희생자들을 돕는 일에 선교사들이 발벗고 나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어떤 선교사는 복음 전도보다는 사회사업에 온통 정열을 쏟게 되었다. 그래서 19세기말에 가서는 선교사들이 사회사업이냐 아니면 개인전도나라는 싸움 속에서 대립된 두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이에 개척기부터 반 기독교운동이 중국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1860년대와 1890년대 후반에 강력한 반 기독교운동이 휩쓴 적이 있다. 이 반 기독교운동은 근본적으로 반 외세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중국에 침입한 서양인들의 종교가 기독교요 바로 그 서구의 군사력을 없고 들어온 것이 기독교였기에, 반 외세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중국에 침입한 서양인들의 종교가 기독교요 바로 그 서구의 군사력을 업고 들어온 것이 기독교였기에, 반 외세적인 중국지식인들은 기독교도 역시 증오했다. 실제로 어떤 선교사들은 이 서양의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다. 또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가 서양 제국주의와 동일시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양주(1868)와 천진(1870)에서는 반 기독교폭동이 일어나서 개신교와 카톨릭의 선교사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1900년에 일어났던 복사의 난은 중국 관리들과 농민들이 함께 손잡고 일으킨 반 기독교 운동인데 이때 개신교 선교사와 가족들 188명이 죽었고 중국인 기독교인들은 약 2천명이나 살해당했다. 카톨릭 편에서는 3만명 이상의 중국인 신자들과 47명의 외국인 신부와 수녀가 살해당했다. 복사의 난의 결과가 이렇게 엄청났던 것은 배후에 청조 통치자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인데, 청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외국인들을 중국 땅에서 몰아낼 심산이었다.
당시 경제적 상황은 1820-1850년대까지 중앙정부의 수지불균형은 호부은고에 축적된 은냥을 헐어 메움으로써 재정위기가 표면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일격은 호부가 장악하는 법정적인 재정체제를 단번에 무너뜨렸다. 1850-1851년 사이 태평천국의 공격을 받은 남방 여러 성의 작전 경비, 방어 경비는 1천 8백만 냥을 넘어섰다. 거기에다 허난성에서 임시 하천공사비 450만 냥이 지출되었다. 합계 2천 2백여만 냥의 임시지출 가운데 호부가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불과 2백만냥으로 나머지는 지방비축을 헐거나 현지조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금제도가 생기게 되는데 1853년 태평군에 대항하는 청조 군대의 거점인 장수성 양저우에서 시작되어 1860년대까지 거의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작전중의 군대는 호부와 각 성의 포정사사로부터 군비공급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교통의 요충지에 관소를 설치해서 상품에 과세를 하거나 시장상인으로부터 일종의 영업세를 징수하였다. 각 성의 이금징수는 조정의 인가를 얻고 시작하거나 추인을 받았기 때문에 완전히 비법정적 성격은 아니였다. 그러나 중앙정부로서는 새로운 과세를 창시하여 그것을 항상적인 제도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저항이 있었다. 이금은 어디까지나 어쩔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온 임시조치로서 언제인가는 폐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지방의 경향에 의존하는 중앙재정의 궁핍은 심각했다. 태평천국군이 강남지방으로 진출한 1853년 이후 경향수입은 440만 냥, 즉 평소의 절반정도로 감소했다. 태평천국을 진압한 다음 해인 1865년에는 호부 은고의 현금잔고가 불과 십여만 냥에 불과한 상태였다. 중앙재정이 파산하여 재정 통제능력을 상실함에 따라서 재정을 기존의 틀로 묶어두려는 압력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한편으로는 청대를 통한 사회변화를 뒤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형성되기 시작한 근대경제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재정체제가 형성되어 갔다.
8.중점적인 사역, 팀사역, 은사, 현지인과의 관계 허드슨 테일러의 동역자를 보면 1854년 테일러가 처음 상해로 왔을 때 런던 선교회의 록하트박사가 돌보아 주었고 후 파커부부와 동역하며 사역을 하게 된다. 1854-1855년까지 10차례의 전도여행을 떠났으며 1855년 10월, 11월에는 최초의 내륙선교지인 충민섬에서 6개월을 지내게 된다. 후 1855-1856년에는 윌리암 번즈목사와 7개월 동안 동역하며 닝포에 정착하게된다. 가장 소중한 배우자인 마리아 다이어양과는 1858년에 결혼을 하며 1859년 닝포에 있는 파커박사의 병원을 책임 인수받게 된다. 여기서 니(Ni)란 중국인 동역자를 만나게 되고 외에도 넹꾸에이씨, 왕씨등 7-8명을 더 양육하고 만나게 된다. 후 테일러는 건강악화로 영국에서 은둔생활을 했으며 1866년 다시 최초의 중국인 내륙 선교사 일행을 인도하여 항주에 정착하게된다. 여기서 죤 멕카디라는 의료 조수동역자와 함께 사역을 한다.
그후 딸 그레이시와 부인을 떠나보내고 둘째 부인인 폴딩여사와 함께 다시 사역을 하게 된다. 테일러는 중국 내륙선교회의 영국 본부를 설립했고 쥬드와 함께 우창에 서부 선교지부를 창설했다.
마지막으로 팽창기라 볼 수 있는 1861년-1900년 시기인데 태평천국운동이 계속 확산 되어가는 동안에 개신교 선교운동은 1861년에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북경조약 덕택이다. 점점 약해져가는 중국과 강해져가는 서구세력들간에 조인된 북경조약은 선교사들에게도 땅을 소유하고 교회를 건축하며 중국 본토에서 전도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제 선교의 장애물들이 완전히 걷힌 셈이다. 그때까지 50여 년 동안 준비한 모든 자원들을 총동원하여 이 새로운 기회를 충실히 이용하였다. 수백 명의 선교사들이 중국 본토에 깊이 들어가서 앞다투어 선교했다. 수많은 선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허드슨 테일러가 세운 중국 본토선교회의 활동이 괄목할 만했다.
이때의 선교사들의 활동을 보면 교육, 서양과학과 기술을 전파, 의료, 사회봉사, 사회복지, 사회개혁에 많은 일들을 했다.
금주운동, 아편금지운동, 도박금지. 매춘반대운동, 전족(여자의 발을 묶는 일) 반대운동, 여성인권 신장운동 등에도 많이 공헌을 했다.
특기할 것은 1870년대와 1880년에 농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을 때 이들 희생자들을 돕는 일에 선교사들이 발벗고 나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어떤 선교사는 복음 전도보다는 사회사업에 온통 정열을 쏟게 되었다. 그래서 19세기말에 가서는 선교사들이 사회사업이냐 아니면 개인전도나라는 싸움 속에서 대립된 두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이에 개척기부터 반 기독교운동이 중국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1860년대와 1890년대 후반에 강력한 반 기독교운동이 휩쓴 적이 있다. 이 반 기독교운동은 근본적으로 반 외세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중국에 침입한 서양인들의 종교가 기독교요 바로 그 서구의 군사력을 없고 들어온 것이 기독교였기에, 반 외세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중국에 침입한 서양인들의 종교가 기독교요 바로 그 서구의 군사력을 업고 들어온 것이 기독교였기에, 반 외세적인 중국지식인들은 기독교도 역시 증오했다. 실제로 어떤 선교사들은 이 서양의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다. 또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가 서양 제국주의와 동일시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양주(1868)와 천진(1870)에서는 반 기독교폭동이 일어나서 개신교와 카톨릭의 선교사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1900년에 일어났던 복사의 난은 중국 관리들과 농민들이 함께 손잡고 일으킨 반 기독교 운동인데 이때 개신교 선교사와 가족들 188명이 죽었고 중국인 기독교인들은 약 2천명이나 살해당했다. 카톨릭 편에서는 3만명 이상의 중국인 신자들과 47명의 외국인 신부와 수녀가 살해당했다. 복사의 난의 결과가 이렇게 엄청났던 것은 배후에 청조 통치자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인데, 청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외국인들을 중국 땅에서 몰아낼 심산이었다.
당시 경제적 상황은 1820-1850년대까지 중앙정부의 수지불균형은 호부은고에 축적된 은냥을 헐어 메움으로써 재정위기가 표면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일격은 호부가 장악하는 법정적인 재정체제를 단번에 무너뜨렸다. 1850-1851년 사이 태평천국의 공격을 받은 남방 여러 성의 작전 경비, 방어 경비는 1천 8백만 냥을 넘어섰다. 거기에다 허난성에서 임시 하천공사비 450만 냥이 지출되었다. 합계 2천 2백여만 냥의 임시지출 가운데 호부가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불과 2백만냥으로 나머지는 지방비축을 헐거나 현지조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금제도가 생기게 되는데 1853년 태평군에 대항하는 청조 군대의 거점인 장수성 양저우에서 시작되어 1860년대까지 거의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작전중의 군대는 호부와 각 성의 포정사사로부터 군비공급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교통의 요충지에 관소를 설치해서 상품에 과세를 하거나 시장상인으로부터 일종의 영업세를 징수하였다. 각 성의 이금징수는 조정의 인가를 얻고 시작하거나 추인을 받았기 때문에 완전히 비법정적 성격은 아니였다. 그러나 중앙정부로서는 새로운 과세를 창시하여 그것을 항상적인 제도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저항이 있었다. 이금은 어디까지나 어쩔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온 임시조치로서 언제인가는 폐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지방의 경향에 의존하는 중앙재정의 궁핍은 심각했다. 태평천국군이 강남지방으로 진출한 1853년 이후 경향수입은 440만 냥, 즉 평소의 절반정도로 감소했다. 태평천국을 진압한 다음 해인 1865년에는 호부 은고의 현금잔고가 불과 십여만 냥에 불과한 상태였다. 중앙재정이 파산하여 재정 통제능력을 상실함에 따라서 재정을 기존의 틀로 묶어두려는 압력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한편으로는 청대를 통한 사회변화를 뒤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형성되기 시작한 근대경제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재정체제가 형성되어 갔다.
8.중점적인 사역, 팀사역, 은사, 현지인과의 관계 허드슨 테일러의 동역자를 보면 1854년 테일러가 처음 상해로 왔을 때 런던 선교회의 록하트박사가 돌보아 주었고 후 파커부부와 동역하며 사역을 하게 된다. 1854-1855년까지 10차례의 전도여행을 떠났으며 1855년 10월, 11월에는 최초의 내륙선교지인 충민섬에서 6개월을 지내게 된다. 후 1855-1856년에는 윌리암 번즈목사와 7개월 동안 동역하며 닝포에 정착하게된다. 가장 소중한 배우자인 마리아 다이어양과는 1858년에 결혼을 하며 1859년 닝포에 있는 파커박사의 병원을 책임 인수받게 된다. 여기서 니(Ni)란 중국인 동역자를 만나게 되고 외에도 넹꾸에이씨, 왕씨등 7-8명을 더 양육하고 만나게 된다. 후 테일러는 건강악화로 영국에서 은둔생활을 했으며 1866년 다시 최초의 중국인 내륙 선교사 일행을 인도하여 항주에 정착하게된다. 여기서 죤 멕카디라는 의료 조수동역자와 함께 사역을 한다.
그후 딸 그레이시와 부인을 떠나보내고 둘째 부인인 폴딩여사와 함께 다시 사역을 하게 된다. 테일러는 중국 내륙선교회의 영국 본부를 설립했고 쥬드와 함께 우창에 서부 선교지부를 창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