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질책한다. 여러족장들이 버린 요셉은 그럼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였다
는 것을 말한다(9절). 이것은 예수가 비록 공회의 결정으로 죽었고 자신이
고소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죽임당한 예수와 고소당한 스데반과 함께 계신
다는 동일시의 원리를 이용한 설교부분이기도 한다.
스데반의 의의 개념은 "의인"의 개념(52절)에 이어진다. 하나님이 예
루살렘 성전 예배보다도 중요한 것이란 것을 의미해 준다. 하나님이 함께
했던 요셉의 경우처럼 예수와 하나님은 함께 했고 스데반 자신은 하나님이
함께 한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지도 않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예배만 고집하고 예수를 죽이었고, 자신을 고소
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암시적으로 포함된 곳이다.
요셉에 관계된 설교에서는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1) 첫째의 문제는 스데반이 70인역의 성서를 읽었다는 것을 증거해 준
다. 70인역의 창 46:26-27에서는 "야곱에게는 난 자들로서 야곱과 함께 애
굽에 들어온 자의 총수는 야곱의 자부들 외에 육십육명이더라 그러나 애굽
에 요셉과 함께 있는 그의 아들들이 아홉명이었으니 야곱과 함께 내려온 75
명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스데반이 야곱과 요셉을 제외하고 75명이라
고 하는 것은 70인역과 일치한다.
2) 두번째의 지역의 문제는 스데반의 잘못된 이해를 반영한다. 세겜땅
은 야곱이 하몰에게서 산 것으로 창 33:19에 나타난다. 그러나 야곱은 세겜
에 매장되지 않았고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헤브론에 있는 매장지에
매장된 것으로 창 50:13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
서 장사됐다는 것은 랍비들의 전통이었다.
어쨌든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세겜 매장지를 샀다고 하는 것과 야곱이
거기에 매장됐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스데반의 오류에 대해서
스피로는 세겜은 예루살렘에 대한 상대적 도시로서 스데반이 세겜을 언급한
것은 사마리아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마리아적이라고 하기 보다는
스데반의 혼돈이라고 본다.
요셉에 관계된 설교는 아브라함에게 했던 영광의 하나님의 언약의 성
취되는 과정에서 모세에게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스데바은 자기
에서 처음으로 변증적인 내용을 드러낸다. 동시에 하나님은 의인과 함께 한
다는 개념을 분명히 하여서 애굽에서도 의인과 함께 함을 밝힌다. 이것은
형식적이며 제의적인 유대인들의 성전 중심의 제의적인 것과 대응하는 내용
이다. "의인"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부분이라고
보아서 무리가 없을 것이다.
C. 모세에 관계된 설교(17-43)
"스데반의 설교는 학적이고 역사적인 고찰은 아니다. 그의 말은 아스
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강하게 표현할 뿐이다"란 표현은 적절
하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어떤 인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을 유대인들은 알지
못하고 있음을 스데반은 지적하고 있다. 모세에 관련된 긴 설교를 통해서
스데바은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증명한다. 스데반의 설교는 점점 더 변증적
으로 변해가고 구체화되고 있다.
아브라함과 요셉과 함께 했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의
맥락에서 모세를 택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스데반의 설교는 계속된다(20
절). 스데반은 행 7:18-29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거역하는 존재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
달의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더라"(25절)란 것을 자신이 첨가
하면서 모세가 애굽에서 사람을 죽이고 화목케 하려고 했던 것들이 하나님
의 뜻을 행한 것으로 본다.
스데반은 모세를 거절했던 백성의 우상숭배 역사를 들춰낸다(38-44
절). 하나님이 보낸 의인에 대한 거절과 악독한 반역은 결국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결과를 빚게 되는 것과 같은 맥으로 통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스
데반은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된 예배를 지적하기 전에 모세에 하나님이 나
타나시던 현시의 장면을 비교적 상세히 말하고 있다(29:34).
스데반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시내산의 그곳도, 하나님이 천사를 통
해 말씀으로 계시했던 곳도 성전과 같은 거룩한 곳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
이다. 장소의 성결은 하나님의 임재로 성립되고 하나님의 임재는 한 곳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스데반은 지상의 어떤 곳도 하나님의 영구
적인 임재의 처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스데반의 모세에 대한 표현은 거의 틀림없이 예수를 인식한 가운데서
된 것이라고 여겨도 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리스도의 모형인 모세를
거절했다(38절). 모세에 대한 거절은 하나님에 대한 거절과 같은데 이것을
위해서 스데반은 "나와 같은 선지자"(37절)라고 모세에 대해서 전했던 것이
다. 모세에 과한 설교 부분을 통해서 스데반은 의인인 예수를 버린 것을 고
발하고 그들의 예루살렘 성전 예배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받는 예배가
아니란 것을 분병히 한 것이다.
D. 하나님의 처소에 관한 설교(44-50)
스데반은 이제 구체적인 결론을 위해서 "증거의 장막"(44절)과 "솔로
몬이 지은 집"(47절)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처소"에 대한 것을 선지자 이
사야의 글을 인용해서 밝히고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처소가 아님을 결
론적으로 말한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어느 지역이나 건물에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대목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거
룩한 장막은 광야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 때까지의 가나안 땅에
서 계속되었다는 것을 스데반은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
신 임재로의 성전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자 유빠을 받게 되는데 결
국 이것을 스데반은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48절)
로 결론 짓는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제 역사적 고찰을 마치고 직접적인 고소적 변론을
공회 앞에서 그들을 향해서 하고 있다. 스데반은 선지자들이나 의인의 편
에 서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앞의 사람들을 분노적 표현과 위협적
인 몸짓으로 고소하고 있다.
는 것을 말한다(9절). 이것은 예수가 비록 공회의 결정으로 죽었고 자신이
고소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죽임당한 예수와 고소당한 스데반과 함께 계신
다는 동일시의 원리를 이용한 설교부분이기도 한다.
스데반의 의의 개념은 "의인"의 개념(52절)에 이어진다. 하나님이 예
루살렘 성전 예배보다도 중요한 것이란 것을 의미해 준다. 하나님이 함께
했던 요셉의 경우처럼 예수와 하나님은 함께 했고 스데반 자신은 하나님이
함께 한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지도 않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예배만 고집하고 예수를 죽이었고, 자신을 고소
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암시적으로 포함된 곳이다.
요셉에 관계된 설교에서는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1) 첫째의 문제는 스데반이 70인역의 성서를 읽었다는 것을 증거해 준
다. 70인역의 창 46:26-27에서는 "야곱에게는 난 자들로서 야곱과 함께 애
굽에 들어온 자의 총수는 야곱의 자부들 외에 육십육명이더라 그러나 애굽
에 요셉과 함께 있는 그의 아들들이 아홉명이었으니 야곱과 함께 내려온 75
명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스데반이 야곱과 요셉을 제외하고 75명이라
고 하는 것은 70인역과 일치한다.
2) 두번째의 지역의 문제는 스데반의 잘못된 이해를 반영한다. 세겜땅
은 야곱이 하몰에게서 산 것으로 창 33:19에 나타난다. 그러나 야곱은 세겜
에 매장되지 않았고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헤브론에 있는 매장지에
매장된 것으로 창 50:13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
서 장사됐다는 것은 랍비들의 전통이었다.
어쨌든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세겜 매장지를 샀다고 하는 것과 야곱이
거기에 매장됐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스데반의 오류에 대해서
스피로는 세겜은 예루살렘에 대한 상대적 도시로서 스데반이 세겜을 언급한
것은 사마리아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마리아적이라고 하기 보다는
스데반의 혼돈이라고 본다.
요셉에 관계된 설교는 아브라함에게 했던 영광의 하나님의 언약의 성
취되는 과정에서 모세에게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스데바은 자기
에서 처음으로 변증적인 내용을 드러낸다. 동시에 하나님은 의인과 함께 한
다는 개념을 분명히 하여서 애굽에서도 의인과 함께 함을 밝힌다. 이것은
형식적이며 제의적인 유대인들의 성전 중심의 제의적인 것과 대응하는 내용
이다. "의인"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부분이라고
보아서 무리가 없을 것이다.
C. 모세에 관계된 설교(17-43)
"스데반의 설교는 학적이고 역사적인 고찰은 아니다. 그의 말은 아스
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강하게 표현할 뿐이다"란 표현은 적절
하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어떤 인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을 유대인들은 알지
못하고 있음을 스데반은 지적하고 있다. 모세에 관련된 긴 설교를 통해서
스데바은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증명한다. 스데반의 설교는 점점 더 변증적
으로 변해가고 구체화되고 있다.
아브라함과 요셉과 함께 했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의
맥락에서 모세를 택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스데반의 설교는 계속된다(20
절). 스데반은 행 7:18-29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거역하는 존재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
달의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더라"(25절)란 것을 자신이 첨가
하면서 모세가 애굽에서 사람을 죽이고 화목케 하려고 했던 것들이 하나님
의 뜻을 행한 것으로 본다.
스데반은 모세를 거절했던 백성의 우상숭배 역사를 들춰낸다(38-44
절). 하나님이 보낸 의인에 대한 거절과 악독한 반역은 결국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결과를 빚게 되는 것과 같은 맥으로 통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스
데반은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된 예배를 지적하기 전에 모세에 하나님이 나
타나시던 현시의 장면을 비교적 상세히 말하고 있다(29:34).
스데반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시내산의 그곳도, 하나님이 천사를 통
해 말씀으로 계시했던 곳도 성전과 같은 거룩한 곳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
이다. 장소의 성결은 하나님의 임재로 성립되고 하나님의 임재는 한 곳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스데반은 지상의 어떤 곳도 하나님의 영구
적인 임재의 처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스데반의 모세에 대한 표현은 거의 틀림없이 예수를 인식한 가운데서
된 것이라고 여겨도 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리스도의 모형인 모세를
거절했다(38절). 모세에 대한 거절은 하나님에 대한 거절과 같은데 이것을
위해서 스데반은 "나와 같은 선지자"(37절)라고 모세에 대해서 전했던 것이
다. 모세에 과한 설교 부분을 통해서 스데반은 의인인 예수를 버린 것을 고
발하고 그들의 예루살렘 성전 예배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받는 예배가
아니란 것을 분병히 한 것이다.
D. 하나님의 처소에 관한 설교(44-50)
스데반은 이제 구체적인 결론을 위해서 "증거의 장막"(44절)과 "솔로
몬이 지은 집"(47절)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처소"에 대한 것을 선지자 이
사야의 글을 인용해서 밝히고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처소가 아님을 결
론적으로 말한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어느 지역이나 건물에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대목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거
룩한 장막은 광야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 때까지의 가나안 땅에
서 계속되었다는 것을 스데반은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
신 임재로의 성전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자 유빠을 받게 되는데 결
국 이것을 스데반은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48절)
로 결론 짓는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제 역사적 고찰을 마치고 직접적인 고소적 변론을
공회 앞에서 그들을 향해서 하고 있다. 스데반은 선지자들이나 의인의 편
에 서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앞의 사람들을 분노적 표현과 위협적
인 몸짓으로 고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