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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마운트의 영화 《베니의 훈장》의 대본을 썼는데, 여기서도 농민들에 대한 작자의 애정은 여전하며 경제와 정치 문제를 초월한 인간성의 깊은 곳에다 향수를 펼치고 있다.
1947년 《바람난 버스》가 나왔다. 대전후의 미국 사회의 도덕적인 혼란을 바람난 버스를 타고 있는 일행에 견줘서 그리고 있으나 두드러진 중심명제가 결여되어 세평도 신통치 않았다.
1948년 전후는 이 작가에 있어 다사다난했다. 1947년에 전시중의 작품으로 만화라고 자칭한 중편 《진주》를 출판, 그해 유명한 카메라맨 로버트 카파와 동행으로 소련을 방문, 현지보고를 〈뉴욕 헤랄드 트리뷴〉지에 실었고, 이듬해 《소비에트 여행기》라는 제명으로 출판, 같은 해 미국예술원회원으로 추대되는 한편, 친우 리케스를 자동차 사고를 잃었으며, 두 번째의 아내와 이혼하기까지 했다. 또 《빨간 망아지》를 영화화하기 위하여 헐리웃으로 가서 시나리오를 집필, 1950년까지 거기서 체재했다. 그해 엘레인 스코트와 결혼, 유럽 각지를 방문, 귀국 후 창작의욕이 용솟음쳐 대작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의 집필에 전념, 1952년에 출판했다. 이 작품은 원죄로부터의 해방을 주제로 자기 가계를 취급한 야심적인 소설이었지만 세평은 《분노의 포도》를 능가하지 못했다. 그후 파리를 배경으로 한 유머러스한 작품 《피핀 4세의 짧은 치세》를 썼고, 롱아일랜드의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처음으로 소시민 사회를 대상으로 한 《우리들의 불만의 겨울》을 발표, 이 작품이 계기가 되어 1962년도 노벨 문학상을 타게 됐다. 이 작품 자체는 결코 수상가치가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분노의 포도》를 정점으로 하는 그의 과거의 업적이 높은 평가를 받았으리라, 사실, 스웨덴 아카데미는 이 작가의 업적은 유머와 사회 인식, 리얼리스틱하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후의 스타인벡은 두드러진 창작활동을 하지는 않았는데, 고향을 떠난 이후의 그는 새로운 분야, 새로운 소재를 찾아서 꾸준히 모색을 반복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58세 때 예견을 데리고 미국 일주여행을 시도하였고(《찰리와의 여행》,1962년 출판), 그밖에 유럽과 중 근·동으로 여행하고, 소련의 시인 예프투센코와 월남전쟁을 둘러싼 논쟁 끝에 몸소 최전선을 시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과시하여 야심적인 신작이 기대되었으나 신작을 남기지 못한 채 1968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47년 《바람난 버스》가 나왔다. 대전후의 미국 사회의 도덕적인 혼란을 바람난 버스를 타고 있는 일행에 견줘서 그리고 있으나 두드러진 중심명제가 결여되어 세평도 신통치 않았다.
1948년 전후는 이 작가에 있어 다사다난했다. 1947년에 전시중의 작품으로 만화라고 자칭한 중편 《진주》를 출판, 그해 유명한 카메라맨 로버트 카파와 동행으로 소련을 방문, 현지보고를 〈뉴욕 헤랄드 트리뷴〉지에 실었고, 이듬해 《소비에트 여행기》라는 제명으로 출판, 같은 해 미국예술원회원으로 추대되는 한편, 친우 리케스를 자동차 사고를 잃었으며, 두 번째의 아내와 이혼하기까지 했다. 또 《빨간 망아지》를 영화화하기 위하여 헐리웃으로 가서 시나리오를 집필, 1950년까지 거기서 체재했다. 그해 엘레인 스코트와 결혼, 유럽 각지를 방문, 귀국 후 창작의욕이 용솟음쳐 대작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의 집필에 전념, 1952년에 출판했다. 이 작품은 원죄로부터의 해방을 주제로 자기 가계를 취급한 야심적인 소설이었지만 세평은 《분노의 포도》를 능가하지 못했다. 그후 파리를 배경으로 한 유머러스한 작품 《피핀 4세의 짧은 치세》를 썼고, 롱아일랜드의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처음으로 소시민 사회를 대상으로 한 《우리들의 불만의 겨울》을 발표, 이 작품이 계기가 되어 1962년도 노벨 문학상을 타게 됐다. 이 작품 자체는 결코 수상가치가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분노의 포도》를 정점으로 하는 그의 과거의 업적이 높은 평가를 받았으리라, 사실, 스웨덴 아카데미는 이 작가의 업적은 유머와 사회 인식, 리얼리스틱하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후의 스타인벡은 두드러진 창작활동을 하지는 않았는데, 고향을 떠난 이후의 그는 새로운 분야, 새로운 소재를 찾아서 꾸준히 모색을 반복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58세 때 예견을 데리고 미국 일주여행을 시도하였고(《찰리와의 여행》,1962년 출판), 그밖에 유럽과 중 근·동으로 여행하고, 소련의 시인 예프투센코와 월남전쟁을 둘러싼 논쟁 끝에 몸소 최전선을 시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과시하여 야심적인 신작이 기대되었으나 신작을 남기지 못한 채 1968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