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성의 이론 : 새로운 진화론적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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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단순성에서 복잡성으로

2. 복잡성의 구조 : 질서와 주체의 재생산

3. 복잡한 구조의 진화 - 하이에크의 해체적 독해

4. 구조의 동학에서 구조의 우발적 구성으로 - 알뛰세르

5. 소결

본문내용

타이프에 의해 제시된 규칙들의 단순성 또는 심지어 과소와 페노타이프들(모두 그것들이 현동시킨 실제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발명들인)의 거대한 다양성과 복잡성 사이에 존재하는 불비례를 지적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문제가 되는 들뢰즈의 범주는 '뿌리줄기(rhizome)'라는 범주이다. 그것은 제일 끝머리에서 다시 젊어지는 속도에 비례하여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들이 죽어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의 자기갱신은 복제가 아니라 진정한 창조라는 것이다. Jantsch(1980)는 다음과 같이 쓴다.
필자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을 이어받아-인용자) 세계적인 문화 뿌리줄기라고 묘사한 대상은 다름아니라 그 고유의 수준에서 가장 단순한 산일구조에 의해 이미 표현된 존재의 직접성이다. 그러한 구조와 마찬가지로 뿌리줄기 역시 개방성, 비평형(관계들의 이질성)과 요동들의 자기 촉매적 자기강화(새로운 관계의 확립)에 의해 성격지워진다. 산일구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율성과 의식을 개발한다.(p. 419)
(들뢰즈의 뿌리줄기 개념에 대해서는 Deleuze, Gilles and Guattari, F lix (1976) Rhizome : Introduction, (Paris: Les Editions de Minuit)를 참조할 수 있다.)
, 필연성(곧은 진로)에 대한 우연성(편의)의 우위, 그리고 다시 한자 한자 취해보자면 '무질서의 태내로부터의 질서의 발생'!
그래서 마침내 존재하게 된 질서는 어떤 법칙들을 갖게 되지만 그러나 그 법칙들 또는 그 법칙들의 체계로서의 질서는 결코 영속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기성사실의 현실이 이 현실의 영속의 보증이리라는 것을 절대 보증해주지 않을 것"(47)이며 "마주침이 야기한 응고로부터 발생한 법칙들의 필연성에는, 이 필연성이 좀 더 커다란 안정성을 지닐 때까지도, 하나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이 따라붙"(81)기 때문이다. "이 불안정성은 우리가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운 어떤 것을 설명해주는데.... 말하자면 법칙들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법칙들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법칙들이 영원히 유효하지 않고 한 시기에 유효하다는 것(맑스....)이 아니라, 법칙들이, 자신들을 지탱하는 우발적 토대를 드러내면서, 이유없이, 즉 이해가능한 목적이 없이,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뜻밖에 일어나며(응고는 언제나 뜻밖에 일어난다)....."(81-2) 따라서 질서는 언제나 진화의 지연으로서, 하나의 초안정으로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의 변화의 방향은 예정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질서는 프리고진이 "산일구조"라고 부른 자기조직적 구조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알뛰세르를 통해 다시 사회의 자기조직이라는 출발점(그림 2)으로 되돌아 왔다. 알뛰세르는 여기서 맑스를 재발견하는데 그것은 맑스에게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우발적 구성에 대한 관념을 통해서이다. 즉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는 돈 많은 사람과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박탈당한 프롤레타리아의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서 탄생했음을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맑스는 이러한 마주침의 철학에서 출발하여 목적론적인 관념에 굴복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맑스가 마주침이라는 우발성의 논리에 계속하여 자리잡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확대재생산이라는 기성사실(구조)의 논리속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모든 목적론적 관점은 따라서 이러한 기성사실의 논리 속에서만 가능한 하나의 논리일 뿐이게 된다. 미래는 현존하는 사실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우연성을 통해서만, 편의를 통해서만 온다. 그것은 모든 자잘한 일상의 실천들을 통해서 결정되지만 그러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인간행위의 결과로서 오지만 인간의 의도적 고안의 결과로서 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적 실천들은 각각 하나의 편의들로서 미래의 현전에 개입한다.
5. 소결
이상에서 나는 하이에크의 경제사상의 기초가 되는 복잡성의 이론과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사이의 관련을 추적해보았다. 나는 이 추적에서 알뛰세르라는 우회를 기꺼이 택했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것은 동일한 사상의 하나의 異本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교가 어떤 이론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도 있다.
하이에크의 경제이론의 새로움과 심오함은 전적으로 그의 철학의 새로움에서 기인한다. 이 새로운 철학은 복잡한,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을 단순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자 하는 모든 인식상의 운동에서 공통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모든 단순화하는 인식이 기초할 수밖에 없는 '로고스'의 해체를 주창하는 데리다의 해체의 담론과도 친화성을 갖는다. 내가 이글을 통해 보인 것은 요컨대 이러한 복잡성의 이론에 기초할 때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또는 그것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개인주의)는 하나의 불철저함, 또는 중도에서 어떤 관념에 굴복한 것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찬가지의 불철저함을 알뛰세르를 통해 맑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불철저함을 낳은 것은 '기성의 사실의 구조에 대한 집착'이다. 하이에크와 맑스 모두는 다음과 같은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일단 마주침이 "응고"하면, 다시 말해 일단 세계의, 즉 실존하는 유일한(왜냐하면 주어진 세계의 출현은 분명히 가능한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하기 때문에) 것의 안정된 형상이 구성되면, 우리는 하나의 안정된 세계에 대해, 이어서 "법칙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로 말미암아 이 마주침의 유물론의 전제들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 일치하는 사람조차, 일단 이 마주침이 "응고"하면 법칙들의 검토, 즉 이 형태취하기로부터 나오며 자신의 토대에서 이 형태들을 무한히 되풀이하는 검토 속으로 도망치려는 아주 큰 유혹을 받게 된다.(알뛰세르(1982) pp.81-2)
한 사람은 그것에 대한 현혹에서 다른 한 사람은 그것에 대한 혐오에서 그랬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현혹과 혐오는 근대사회의 두가지 이데올로기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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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34페이지
  • 등록일2002.07.06
  • 저작시기2002.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7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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