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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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2.머리말 중에서

3.미디어 리뷰

본문내용

서울에는 이현(梨峴) ·칠패(七牌) ·종루에 새로운 상가가 번창하여 시전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그리고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貢人)들의 상업활동이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관청에서 공가(貢價)를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관청에 납부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세곡운송을 통해서 교역로를 확보한 경강상인(京江商人)이 한강을 중심으로 미곡과 어물의 수송과 판매를 통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또 개성의 송상(松商)들은 전국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고 인삼을 판매하며 대외무역에도 깊이 참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한편, 지방에는 국초부터 보부상(褓負商)이라는 행상단이 있어서 생활필수품을 향촌에 공급하였는데, 16세기 이래로 장시(場市)가 생겨나면서 장시를 순회하며 거래하였다.
장시는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8세기 중엽에는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상품과 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일부 장시는 점차 상설시장화하여 장시가 발달하자 강경 ·대구 ·안동은 상업도시로 성장하였다. 이들 장시에서는 대규모 교역이 행해져 도매업과 위탁판매업 ·창고업 ·운송업 ·숙박업 등에 종사하는 객주(客主)나, 여각(旅閣) 등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상업계도 개항 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자행되면서 크게 위축되어 갔다.
8) 화폐제도
상공업 활동을 규제하여 거래가 부진하였던 조선에서는 화폐의 보급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추진되었다. 태종 때에 발행한 저화(楮貨)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고, 세종 때에 조선통보(朝鮮通寶), 세조 때에 화살로 겸용할 수 있는 팔방통보(八房通寶)를 발행하여 유통시키고자 하였으나, 상업활동의 부진과 화폐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여전히 미곡과 포목으로써 물물교환식 거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상공업이 발달하고 화폐에 대한 수요가 커지게 되자 인조 때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전을 처음으로 주조하였는데, 숙종 때에는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에는 세금이 금납화되면서 화폐는 1차적 유통수단이 되어 상품유통을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고종 때의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위하여 국고가 부족하자, 이를 보충하고자 당백전(當百錢)이란 악화를 발행하여 경제적 혼란을 가져 왔다. 이러한 조선의 불안전한 화폐제도는 갑오개혁에 의해 근대적 은본위제도(銀本位制度)의 확립과 더불어 개선되었으나, 이때를 전후하여 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더불어 일본화폐의 횡행으로 통화계에 혼란이 일게 되었다.
9) 교통 ·통신
조선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함과 더불어 교통 ·통신, 그리고 운수조직을 정비하였으므로 경제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이들의 기능도 크게 증대되었다. 먼저 운수조직은 조운제(漕運制)에 의하였는데, 조운이란 국가재정의 근원인 세곡(稅穀)을 선박으로 해안과 하천을 따라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것을 말한다. 각지에 조창을 설치하고 일정한 기간에 여러 고을의 세곡을 모아 운송하였는데 해상운송을 맡은 조창을 해운창(海運倉), 강상운송을 맡은 조창을 수운창(水運倉)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해운창으로 아산의 공진창(貢津倉), 용안의 덕성창(德成倉), 영광의 법성창(法聖倉), 나주의 영산창(榮山倉)과, 수운창으로 강음(江陰)의 조읍포창(助邑浦倉), 배천의 금곡포창(金谷浦倉),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 원주의 흥원창(興元倉), 충주의 가흥창(可興倉) 등 9개 조창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 진주의 가산창(駕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등 3개 조창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로 사선(私船)에 의한 세곡의 임운(賃運)이 행해지고, 운송은 경강상인의 경강선(京江船)과 훈련도감의 도감선(都監船)이 주로 담당하였다.
한편, 육상교통으로는 역참제(驛站制)에 의해 서울에서 지방 각지로 역로(驛路)가 마련되었고, 역로에는 대략 30리에 역(驛)을 설치하여 역마와 숙박시설을 갖추어 놓고, 공문전달 ·공물수송 및 출장 관리의 편리를 돕도록 하였다. 이때 출장관리는 역마를 이용할 수 있는 마패(馬牌)를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교통의 요지, 인가가 적은 곳에 원(院) 또는 관(館)을 설치하였고, 민간인들의 숙박을 위해 주막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원에는 원주(院主)가 있고, 원주전(院主田)이라는 토지를 받아 경비에 충당하였는데 세조 때에 전국에는 1,220개소의 원이 있었다.
또한, 통신시설로서 봉수제(烽燧制)가 운영되었는데,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다른 봉수대에 서로 연락하는 것으로, 각 지방 또는 국경에서의 변보를 서울의 목멱산(木覓山:南山) 봉수대로 알렸다. 신호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로 하여 식별을 용이하게 하였고, 봉수대마다 10명 내외의 봉수군(烽燧軍)을 두었다. 신호 방식은 횃불 하나면 평시에 무사함을, 둘이면 적의 모습이 나타남을, 셋이면 적이 국경에 접근해 옴을, 넷이면 적이 침공해 옴을, 다섯이면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뜻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파발제(擺撥制)를 통한 직접통신의 방법이 쓰이기도 하였다. 즉, 변방과 서울을 오가는 공문서의 신속한 전달을 위하여, 30리 내외에 1참(站)을 설치하여 릴레이식 전달을 시도한 것이다. 여기에는 말을 타는 기발(騎撥)과 걸음이 빠른 사람을 통한 보발(步撥)의 방법이 있었다.
교통 ·통신시설은 개항 이후 크게 변모되었다. 교통 ·통신시설은 근대화의 상징으로서 당시 일반 국민에게는 경외의 존재였는데, 점차 그 편리함을 알게 되었다. 먼저 철도에서는 경인선(京仁線)이 부설되고 이어서 경부선(京釜線) ·경의선(京義線)이 개통되었고,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가 서울에 전차를 부설하여 운행하였다.
통신시설은 청나라에 의해서 서울∼인천과 서울∼의주 간에 전신선이 가설되었고, 이어서 정부가 일본과 합작하여 서울∼부산 간에 전신선을 가설하고 전보총국(電報總局)을 설치하여 통신업무를 기계화하였다. 전화는 처음에 궁중 안에 먼저 가설되었고 이어서 서울∼인천 간에 시외전화가 개통되었고 뒤이어 서울 시내에 일반 전화가 가설되었다. 독립협회에 의해 계몽운동이 전개되면서 일반 국민들은 근대문물에 대한 각성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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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7.10
  • 저작시기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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