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유학파(Cynics)와 회의주의학파(sceptic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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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쉽사리 원하는 바를 설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달리 탓할 점이 없다면 이에 대해서라도 그들에게 답변을 요구하여, 그들을 고국의 학원으로 돌려 보내며, 그들의 그리이스 아이들이나 가르치게 하고, 로마의 아이들은 종전대로 법률과 원로원에 복종하는 것을 배우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카르네아데스 개인에게 어떤 악의나 증오를 느껴서가 아니고 일반적으로 철학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앞의 책 참조].
@P351
카토가 보기에는, 아테네인들은 법률을 지키지 않는 고약한 인종이었다. 그들이 자기네의 천박한 궤변으로 타락되든 말든 문제가 되지 않지만, 로마의 청년들은 엄격하고 국제주의적이며, 담대하고 우직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후기 로마인들은 그의 포악성 중에서도 많은 것을 받아들여 지니고 있기는 하였으나, 카르네아데스의 것도 많은 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카르네아데스(B.C. 180?~110?) 다음으로 [아카데미]의 책임자가 된 것은 하스드루발(Hasdrubal)이라는 카르타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이스인들과 어울릴 때에는 자기 자신이 클리토마코스(Clitomachus)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카르네아데스는 주로 강의만 했으나, 클리토마코스는 4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이 책들 중에는 페니키아어로 쓰인 것도 있다. 그가 준수한 원칙은 카르네아데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다. 이들은 어느 면에서는 유능한 인물들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두 회의주의자들은 점이나 마술, 점성술 따위의 미신을 배격하였다. 당시에는 이런 미신들이 점점 더 널리 보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편 개연성에 대한 건설적인 주장도 하였다. 그것은 개연성의 정도에 관한 것으로, 우리도 결코 확실성을 믿어서는 안 되지만,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진리일 수는 있다. 이 개연성은 우리의 행위에서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능한 가정들 중에서 제일 확실한 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최근의 철학자들이 저마다 지지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 학설을 전부 실은 책들이 분실되고, 남은 단편들이나마 모아 하나의 학설을 구성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처지에 있다.
클리토마코스 이후의[아카데미]는 회의주의적이 아니었으며, 안티오쿠스(Antiochus, B.C. 69년에 사망)시대부터 그 학설은 여러 세기 동안, 실제로 스토아 학파의 학설과 동일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회의주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크레타인에네시데무스(Aenesidemus)에 위해 다시 대두되었다. 그는 크노소스 출신이었다. 그런데 크노소스로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이미 그보다도 2000년전에 회의주의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P352
그 당시에 회의주의자들은 동물의 여신에 대하여 회의함으로써 타락된 궁중 신하들의 환심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네시데무스의 연대는 분명치 않다. 그는 카르네아데스가 주장한 개연성에 대한 학설을 버리는 회의주의의 초기 형태를 다시 취하였다. 그는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 A.D. 2세기의 시인 루시안(Lucian)이 추종자가 되고 그보다 좀 뒤늦게 세스투스 엠피리코스도 그의 추종자였다. 그는 고대의 회의주의 철학자들 중에서 오늘날까지 저술을 남기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가령 [신의 존재를 믿는 것에 대한 반박]이라는 짤막한 논문이 있는데, 이것은 에드윈 비반의(후기 그리이스 종교)(Later Greek Religion) 52쪽에서 56쪽에 번역되어 있다. 비방에 의하면, 이 논문의 섹스투스 엠피리코스가 카르네아데스의 사상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카르네아데스에게서 직접 물려받은 것은 아니고 클리토마코스가 전해 준 글에서 취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 논문은 아래와 같은 설명으로 시작된다. 회의주의자들도 그 행도에 있어서는 전통적이다. [우리 회의주의자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세상의 보통 길을 따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어떤 내용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마치 신들이 있기나 한 듯이 말하며, 또 신을 경배하고 신이 섭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심을 표시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독단론자들의 무모한 주장은 피하려고 한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주장한다. 신의 성격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구구하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무형이라고 한다. 우리는 신에 대하여 아무런 경험도 가진 것이 없으므로, 그의 속성을 알 수 없다. 신의 존재는 자명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증명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복잡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다음에 그는 악의 문제를 다루고, 결론적으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신이 존재한다고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사람은, 일종의 불경건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만일 신이 무든 것을 다스리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살을 악의 창조자로 만들어 버리고, 반대로 신은 단지 일부의 사람들만 다스린다고 하거나 아무것도 다스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들은 신을 인색한 자로 간주하거나 무능한 자로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건 불경건한 태도이다.]
@P353
회의주의는 A.D. 3세기 경까지 몇몇 교양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있었으나 그 시대의 기질과는 상반된 것이 되어 갔다. 시대는 점점 독단적인 종교와 구원의 교리에로 행하고 있었다. 회의주의는 교양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적 종교(State religion)에 불만을 품게 할 수는 있었으나, 시대를 충실케 할 아무런 적극적인 힘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그리고 순전히 지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르네상스] 이후에 신학적인 회의주의는 거의 과학에 대한 정열적인 신봉으로 대치되었다. 고대 세계는 회의주의자들의 논의에 대하여 아무 답변도 하려고 하지않고, 옆으로 비켜 버렸다. 올림푸스 신들이 신임을 잃게 되자, 동방 종교가 침투될 길이 크게 열려 있었다. 이 동방 종교는, [기독교]가 승리를 얻기까지, 미신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살려고 서로 경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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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2.08.11
  • 저작시기2002.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0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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