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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풍수(風水)설화 ]

[풍수의 기원과 역사]

[이천의 고을풍수 ]

[한양 천도 설화의 근원지, 인왕산]

[강진의 전설]

본문내용

통합된 문화현상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또한 후대에 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구전물은 우리 강진이 아닌 다른 지역에 널이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문법을 형성하여 지면을 통해 모든 이들이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강진읍 전체 풍수에 관한 설화를 여기 지면에 할애해 볼까 한다. 신라말 도선(827~898)이 풍수지리설을 확립한 이래 강진군에도 풍수설화가 다양한 내용으로 전승되고 있었다.
강진읍의 지형은 풍수지리학상으로 '황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이라 한다. 금사봉에서 읍의 형세를 보면 우두봉(牛頭峯)이 한눈에 보이고 광활하고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고 탐진강이 이 평야를 가로질러 젖줄기처럼 농토를 적시면서 목리와 남포 앞을 지나 아홉 고을 물이 모여든다는 구강포(九江浦)로 빠져 대섬과 가우도 그리고 가막섬과 아량항을 거쳐 유유히 다도해로 빠져 나간다.
그런데 이러한 읍의 형국을 유심히 보면 흡사 엎드린 황소가 그 턱을 목야에 걸고 콧김을 내뿜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강진 사람들은 황소와 연관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다. 즉, 주령을 우두봉이라고 부르는 것은 황소의 머리를 뜻함이요, 성곽(강진읍성)은 소의 얼굴을 말함인데 큼직한 황소가 양편 귓전을 넌지시 펼치고 엎드린 모양은 천만년의 풍우에도 굽힘이 없는 의연함과 말없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성실히 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황소의 얼굴을 이루고 있는 읍터는 이목구비까지 갖추고 있으니 지금의 군청(옛 동현 위치)앞에 있는 우물은 원래에는 쌍샘으로 두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이는 황소의 콧구멍이요, 군 청사는 황소의 콧등이다. 그리고 읍의 동편과 서편에 각각 큰 공동우물이 있는데 서편우물은 소의 오른쪽 눈이요, 동편 우물은 왼눈에 해당되며 이 외에도 읍 근처에서 황소와 관계되는 지명들이 많이 있다. 지금 3.1탑이 서 있는 낙하정을 지나 다산동상이 서 있는 곳에서 성전을 향하여 붉은 바위(홍암)로 돌아가는 곳을 이곳 방언으로는 「싯끝」이라고 부르는데 혀끝의 변음으로 즉, 황소의 혀끝이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홍암 뒷산의 능선을 타고 북으로 올라가면「귀밑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곳은 황소 귀의 바로 밑 고개라는 뜻이고 이 고개를 넘으면 하이변(下耳邊)이라는 조그마한 마을까지 있다. 또 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우두봉 중턱에 암자가 있는데 이 절이 고성암이다. 금릉팔경(金陵八景)의 한 싯구절로 표현되는 「고암모종(高庵暮鐘)」이 암자에 저녁 불공을 드리는 범종 소리를 읊은 것으로 이는 소의 풍경소리를 상징하는 뜻에서 일컬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은산(읍의 뒷산) 우두봉에서 금사봉을 바라보면 그 중간에 탐진강이 흐르고 강앞 들 가운데 목리가 있는데 옛 이름은 초지라고 불렀으며, 만덕산 밑의 초동(草洞)마을은 소의 먹이터라는 말이다. 탐진강 건너편의 「불무깨」나 「구싯돌(소 먹이통)」등의 마을 이름들도 모두가 황소와 관련된 이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진만 중간에 남해의 거센 파도를 가로막듯이 우뚝 솟은 섬은 가우도라고 하며, 해남 방면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2km 지점에 있는 「논치」는 노우치(勞牛峙)의 변음이며, 그곳에서 4km 남짓 가면 「시웃재」가 있는데 이 역시 휴우재(休牛峙)의 변음인 것이다. 이와같이 와우형국인 강진읍에서는 동서남북 가는 곳마다 황소와 연관된 이야기도 많다. 그 중 읍의 중심지에 연못을 파게 된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이다. 지금은 매립하여 어린이 공원과 군립도서관이 들어섰지만 1967 이전까지만 해도 읍의 중심지에 연지가 있었고, 주위로 수양버들과 벚꽃나무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옛 읍지에 보면 그 둘레가 400m 가량인데 현재 우체국과 강진읍 교회까지도 연못이었으므로 그 일대를 연지변이라 불렀다. 그러던 것을 일제때 일본인 학교를 짓기 위하여 일부를 매립하였고, 1967년에는 나머지마저 매립하여 현재는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전 이곳 강진에 부임한 현감들은 지방 이속(吏屬)들의 텃세가 심하여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는 일이 많았는데 지방 이속들이 억세기 때문이었다. 그럼으로 이곳에 부임하기를 꺼리게 되어 현감자리가 비어 있을 때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651(효종2) 신유(申劉:1651~1653년 재임)라는 사람이 비장한 각오로 자원하여 이곳 현감으로 내려왔다. 현감은 풍수지리학에 능통한지라, 우선 강진읍의 지세와 산세를 샅샅히 살펴본 뒤 그 원인이 바로 강진읍터가 와우형국이어서 지방 이속들이 황소처럼 억세다고 단정하였다.
그로부터 현감은 황소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소의 급소에 상처를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장소를 찾은 곳이 바로 어린이 대공원이 된 연지(蓮池)였다. 이곳으로 말하면 황소의 안면인데 그 중에서 코 부분에 해당되므로 아무리 힘센 황소라 할지라도 코뚜레를 하면 어린 목동에게 끌려다니지 않을 수 없는 이치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현감은 많은 주민을 동원하여 연못을 파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현재 양무정 뒤의 비둘기바위 바로 위를 석자 세치쯤 깎아 내렸으니 이곳 역시 양뿔 사이로 급소에 해당하는 곳이 었다. 그외에 읍의 안산(案山)인 금사봉의 봉우리를 똑같이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코뚜레 둘레에 해당되는 서성리 성(城)의 한 부분을 잘아 고성사에서 흐르는 물을 연지로 끌어 들였다. 그러나 현감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다시 동문샘밖에 있던 동편의 성을 샘에서 약 200m 안쪽으로 개축하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소의 왼쪽 눈의 위치를 성밖으로 바꾸어 놓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 후부터 이속들 중에 왼쪽 눈을 못 보는 애꾸눈이 나왔다고도 전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한낱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불과하지만 그 후부터는 이상하리 만큼 지방 이속 때문에 현감이 골치 앓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강진 사람들은 이같은 지형에 연유하여서 인지 황소의 온순한 성품을 닮아 늠름하고 선량하며 어려운 일에 부딪쳐도 당황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고 또한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간섭을 받으려 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일에만 항상 충실한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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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9.26
  • 저작시기2002.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4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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