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에 관하여(5.18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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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1. 광주의 약사
2. 광주의 상징

Ⅱ. 본론
1. 광주 민주 항쟁 5·18의 사건일지
2. 5·18광주민중항쟁의 성격
3. 5·18광주민중항쟁의 의의

Ⅲ. 결론

본문내용

하였다.
그러나 거세지는 "광주민중항쟁 책임자 처벌"이라는 국민적 요구에 검찰은 다시 전면 재 수사에 나섰고 그들은 '역사에 의한 단죄'가 아닌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 저항권을 말살한 헌정 초유의 내란집단'으로 규정되어 전 세계의 관심 속에 "법과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반면에 전 국민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기의 재판'에도 불구하고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과거의 역사적 잔재와 의식의 소유자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며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광주항쟁의 진상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해도 반드시 국민과 정의의 힘에 의해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Ⅲ. 결론
 
5·18광주민중항쟁은 어제의 패배에서 벗어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앞당긴 승리의 항쟁으로 거듭나고 있다. 현 정부가 광주항쟁을 세계사에 유래 없는 초 이성적, 초 도덕적 투쟁이라고 규정한 만큼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5·18광주민중항쟁의 정신계승 방안을 위해 광주시민과 더불어 전 국민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무한경쟁시대라고 말한다. 이 21세기를 준비하고 기약하기 위해서는 한 시대의 아픔과 절규에서 스스로 벗어나 우리 사회의 가능성과 역동성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실현, 바로 이것이다. 서로 돕고 신뢰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실현을 통해 광주민중항쟁 정신은 더욱 더 찬란한 역사 속의 빛으로 승화될 것이다.
◇ 참고
【5·18 광주항쟁 피해상황】
지난 80년 5.18당시 사망자들의 연령별, 원인별 분포, 그리고 부상을 입은 뒤 숨진 피해자들은 얼마나 될까.
최근 5.18 광주 민중항쟁 유족회 정수만회장이 `광주보상법'에 의해 피해자로 인정된 경우와 검시서, 피해가족들을 상대로 한 조사 등 지금까지 이미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드러난 내용들을 토대로 이를 집계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집계에 따르면 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숨진 사람은 모두 1백96명으로 민간인이 1백69명(남자 1백58명, 여자 11명), 군인 23명, 경찰관 4명으로 나타났다. 민간인 가운데는 아직까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은 `무명열사 '가 광주에서 11명, 모포에서 1명으로 집계됐다. 군인들 출신 부대별로는 11공수여단 11명, 7공수여단 3명, 3공수여단 1명, 일반부대원 7명, 방위병 이 1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3명이 서로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는데 공수부 대원 9명, 일반부대원이 4명이었다.
이 기간동안 행불자는 남자 35명, 여자 4명으로 모두 39명이었으며 이때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다 숨진 사람은 72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사망 원인별로는 총상이 가장 많은 1백32명으로 나타났으며 타박상 15명 , 자상 9명, 차량에 치인 경우가 8명이었으며 나머지는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은 5월 19일 2명, 20일 9명, 21일 69명, 22일 20명, 23일 16명, 24일 8명, 25일 1명, 그리고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했던 27일 25명이 숨졌으며 5.18 기간동안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난 21일 사망자 69명중 79.7%에 이르는 55명이 총상으로 숨졌다.
또 이를 사망 당시 연령에 따라 분류한 결과 30대가 69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20대 4명, 40대 24명, 50대와 60대가 각각 9명이었으며 70대도 4명이 나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정수만회장은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 장소는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가 5 1명, 주남부락을 포함한 지원동이 30명, 교도소 주변 10명, 송암동 일대가 11명이라고 집계하고 사체의 이동이 심해 장소를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정회장은 또 `5월의 소녀'로 더 유명한 당시 춘태여상 재학 중에 숨진 박 금희 양의 사망 장소가 검시서 에는 금남로로 돼있으나 이를 제외한 모든 기록과 증언이 21일 양림동으로 나타나 이것이 명확히 확인 될 때는 군의 헬기 사격여부가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광주일보 1994.4.27〉
◇요약
전라남도 중앙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 광역시.
면적 : 501.15㎢
인구 : 133만 9441명(1999)
인구밀도 : 2,672.7인/㎢(1999)
가구수 : 41만 1,965(1999)
행정구분 : 5구 85동
시청 소재지 : 동구 학림동 505-900
시의 꽃 : 철쭉
시의 나무 : 은행나무
시의 새 : 비둘기
면적 501.15㎢, 인구 133만 9441명(1999)이다. 북동쪽으로 담양군, 북쪽으로 장성군, 서쪽으로 함평군, 남쪽으로 나주시, 남동쪽으로 화순군에 접한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에 이어 국내 제5위를 차지하는 대도시이며, 호남지방 최대의 도시이다.
1999년 현재 행정구분은 5개 구, 85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광주시 동구 학림동 505의 900번지에 있다.
산지지역과 평야지대의 접촉지에 자리함으로써 군사 ·행정 ·교역상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1914년에 개통된 호남선이 광주시를 피하여 영산강 서안을 따라 부설되자 한국의 경제 중심권과 떨어져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소비도시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예로부터 호남지방의 행정 ·군사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어 온 기반으로 해서 행정 및 기업관리기능이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넓은 호남평야의 곡창지대와 임해공업지대 및 수산업 지역을 배후지로 가지고 있어 호남경제권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있다.
또, 광주를 중심으로 화순 ·담양 ·장성 ·나주 등 반경 30 km 안의 지역이 1일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노동집약적 내륙공업의 발전을 추진하는 등 산업도시로의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대규모의 군사교육기관인 상무대와 전남대학교를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이 있어 군사 ·교육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참고 문헌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자료 총서 〔광주광역시 5·18 사료 편찬 위원회〕
광주·전남 지방 현대사 연구 〔한물: 안 종 철〕
광주·전남 100년 표 〔광주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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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01
  • 저작시기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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