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과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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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은 기본적으로 신학적 인간론에 관한 문제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가 진보적인 학자든 복음주의적 학자든, 인간을 몸과 영혼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통일된 단일체라는 것에 대해 거의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뇌사를 쉽게 죽음으로 보기는 어렵다. 뇌사시 장기 기증을 유도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자칫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몸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야기할 수 있다. 인간은 몸은 결코 부분들의 결합체가 아니다. 전 부분이 통합된 단일체로서 몸은 고귀성과 온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 기증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몸은 영혼과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통일체로 전인이요 온전성을 지닌다는 사고보다는 떼어 줄 수 있는 부분들의 집합체라는 인식을 심어 주게 된다. 이는 자칫 인간을 "유용한 장기를 가진 구성체"로 보는 사고를 조장할 수 있다.
능동적 안락사는 윤리적인 논란을 야기한다. 또한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윤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가 많다. 첫째, 인간이 자기 생명에 관한 권리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결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위임받은 자일 뿐 그 생명에 대한 주권이 없다고 가르친다. 둘째, 죽음만이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에 안락사를 통해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 자비로운 행위라는 주장은 기독교 신앙고 배치된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평면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보기 때문이다.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재촉하는 능동적 안락사도 문제가 있지만 회복하기 어려운 환자에게 닥칠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생명을 붙드는 일에 연연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말기 환자를 위하는 길인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명 사회에서는 자살을 공동체를 훼손하는 반사회적 행동으로 본다. 그러나 교회가 전통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자살을 부정적으로 본 것은 보다 깊은 신학적인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자연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보고 정죄하였고 대부분의 개신교회도 자살한 이들의 장례를 교회가 치러주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큰 죄로 생각해 왔다. 교회가 자살을 이처럼 정죄해 온 것은 다음의 몇가지 신학적 이해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자살은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위임받은 청지기이지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주권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음을 정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복음의 핵심 내용에 근거해 볼 때,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살은 기독교의 신앙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 선의의 거짓말을 하곤 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항상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일반화 시킬 수는 없다. 이웃의 생명을 건지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을 성경은 오히려 칭찬 받는 행동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들이 어떤 관계에서든지 진실을 행해야 하고 이웃을 해하려고 진실을 왜곡하는 행동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시다. 순간순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진실을 말하되 이웃의 유익을 보호하기 위해 적절한 말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 성도는 날마다 성령의 인도를 의지해야 할 것이다.
금주와 금연은 한국 교회가 가꾸고 존중해 온 좋은 전통이다. 만약 이것이 깨뜨려지고 개혁되어야 할 악습이라면 그런 전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바꿔야 하지만 이 전통은 오히려 한국 교회가 가꾸어가고 이어가야 할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리고 이 전통은 이 사회에 의해 인지되고 있는 개신 교회의 차별적인 표지이고 상징이기에 더욱 가꿀 필요가 있다. 교회 공동체와 형제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인은 이에 관한 자유을 유보하고 절제할 필요가 있고 특히 교회의 중책을 맡은 자는 더욱 그러하다.
정의를 굽게 하고 편벽됨을 조장하는 뇌물을 주고 받은 일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다. 성경은 뇌물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금하고 뇌물을 받는 자나 주는 자 그리고 속한 사회 모두에게 큰 해악이 됨을 경고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서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출23:8). 성경은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잠29:4)고 경고한다. 그리고 뇌물을 주는 자들에게도 그것이 순간적으로 잘 되게 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망하게 하는 길임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생생한 뇌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경고를 명심해야 한다.
요즈음 사형 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교회는 사형제도 페지를 향해 움직이는 사회 분위기에 압박을 받거나 또는 부담을 느껴 강요된 동참을 할 필요는 없다.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인 입장을 가져야 한다. 사회 일각에서는 흉악범들이 교도소에서 참회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고 국가가 흉악범들을 종신토록 수용하고 감독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지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요 손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이 일이 낭비가 아니라고 믿는다. 사회의 눈에 볼 때 가치가 없는 흉악범일지 모르나 그 사람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고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이고 구속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회복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들을 고안하고 제공하는 일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키워드

경건,   윤리
  • 가격3,300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02.10.10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6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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