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세계 최고의 인쇄술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자격루(自擊漏)
▶ 석제 평일구(石製平日구)
▶ 앙부일구(仰釜日구)
▶ 오석 평면일구(烏石平面日구)
▶ 혼천의(渾天儀)
▶ 경직도(耕織圖)
▶ 물대기
▶ 타작기구(打作器具)
▶ 제복(祭服)
▶ 활옷(闊衣)
▶ 도롱이(사의;蓑衣)
▶ 흉배(胸背)
▶ 삼신상
▶ 납폐함
▶ 자격루(自擊漏)
▶ 석제 평일구(石製平日구)
▶ 앙부일구(仰釜日구)
▶ 오석 평면일구(烏石平面日구)
▶ 혼천의(渾天儀)
▶ 경직도(耕織圖)
▶ 물대기
▶ 타작기구(打作器具)
▶ 제복(祭服)
▶ 활옷(闊衣)
▶ 도롱이(사의;蓑衣)
▶ 흉배(胸背)
▶ 삼신상
▶ 납폐함
본문내용
꿇고 안부가 전한 목기러기를 상위에 놓고 두 번 절하는데, 이것을 전안례(奠雁禮) 라고 한다.
납폐함
혼례절차의 하나인 납폐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보내는 예장과 예단을 담는 함이다. 일반적으로 '함'은 그 안의 내용물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함에는 혼수(婚需)와 예장(禮狀), 그리고 물목(物目)을 넣는다. 혼수는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다르나 신부의 의상(衣裳) 각 두벌과 패물 및 혼서지는 어느 경우나 반드시 들어간다. 예단은 청색과 홍색의 색깔 있는 치마감으로 한다. 함은 무명 8자로 된 '함질끈'을 마련하여 석자는 땅에 끌리게 하고 나머지로 고리를 만들어 질 수 있도록 만든다. 함을 지고가는 사람은 '함진아비'라고 하여 흔히 첫 아들을 낳은 복많은 사람에게 맡긴다.
함은 마루에 상을 놓고 그 위에 홍보를 덮은 뒤받기도 하고, 상위에 시루를 놓고 그 위에 얹기도 한다. 함을 받은 신부측에서는 함에 손을 넣어 잡히는 옷감 색에 따라 부부의 장래를 점치기도 한다. 신부집에서는 함진애비를 비롯한 신랑측 일행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낸다.
마지막으로 상례와 제례에 관한 것들이 나와 있었다. 여기에서는 사당, 명부전, 동제당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사당은 조상이나 현인(賢人)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원래 일반인들은 가묘를 쓰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주자거래>를 쓴 주희(朱憙)가 일반 가묘를 사당이라고 칭하고 이를 권장한 이후 일반인들도 가묘(家廟) 형식의 사당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왕묘(王廟)가 세워졌던 점으로 미루어 사당은 이때부터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의 내세관과 관련하여 사당을 주로 절안에 세웠다. 가묘 형식의 사당은 고려말 성리학의 유입으로 주자가례가 시행됨에 따라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다락에다 만든 '민간사당'의 등장은 이를 잘 나타내준다. 사당의 내부는 북쪽에 1가(架)를 설치하고 4등분하여 감실(龕室)을 만들고 나무판으로 막아서 구분한다. 감실마다 탁자 위에 주독(主 )을 놓고 그 속에 신주를 모시며, 감실 밖에는 각 각 작은 발을 내리고, 사당 한가운데에 향탁을 놓고 향탁 위에는 향합(香盒)과 향로(香爐) 를 놓는다. 서쪽 감실부터 고조고비(高祖考 ), 증조고비(曾祖考 ), 조고비(祖考 ), 그리고 제일 동쪽에 고비(考 )의 신주를 모신다. 사당건물은 3칸이지만 1칸인 경우도 있다. 마루바닥에는 전돌이나 나무판을 깔고 그 위에 자리를 편다. 그리고 중간 도리밑에 중문(中門)을 만들고 좌우에는 분합문(分閤門)을 단다. 사당 밖에는 담장을 두른다. 사당에서 행하는 의식으로는 신알례(晨謁禮), 출입고(出入告), 삭참(朔參), 망참(望參), 정조 참(正朝參), 동지참(冬至參), 속절다례(俗節茶禮), 천신례(薦新禮), 유사고(有事告)가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러한 의식을 다 행하지는 않고, 새로 신주를 조성하고 사당을 설치하는 집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명부(冥府)란 저승에 있는 법정을 말하며, 명부전이란 명부를 상징적으로 꾸며놓은 사찰 건물의 하나다. 명부전에는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 (十王)이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시왕전 (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주불(主佛)로 되어 있어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구성은 지장보살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명부시 왕상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고, 시왕상 앞에는 각각 동자상을 놓는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녹사(綠事), 장군(將軍) 등의 존상(尊像)
이 갖추어져 있다. 지장보살은 불교적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면서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조상의 천도를 위해 후손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시왕은 죽은 자들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지옥 왕이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염라대왕은 이 가운데 다섯 번째 왕이다. 불교신앙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뒤에는 100일.소상(小祥). 대상(大祥)까지 열 차례에 걸쳐 각 왕에게 생전에 지은 죄를 심판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때마다 죽은 조상이 지장보살의 자비와 시왕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명부전에서 재(齋)를 지내는 것이다.
동제당(洞祭堂)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동제사를 지내는 집, 즉 신당(神堂) 또는 그에 준하는 공간이다. 동제의 역사는 마을 형성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우리나라에서 생산 단위로서의 자연마을이 전국적으로 형성된 때는 조선후기에 들어와서이다. 이때는 유교적 이념과 무속적 관행이 민간으로 확산되는 시기이기도하다. 동제의 형식과 내용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이 흔히 발견된다. 당집을 지어 신체(神體)를 모시는 동제당의 형태는 그 크기나 건축양식에서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상당, 중당, 하당 등 여러 개의 당집이 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단(壇)만 있는 형태, 신목만 있는 형태, 선돌이 있는 형태, 선돌과 신목이 함께 있는 형태 등 당집을 갖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동제의 시기는 정월 14일 밤이 가장 보편적이지만 지역에 따라 정월 초,2월 초,5월 단오, 8월, 10월, 섣달 그믐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동제의 진행은 제관 선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동제 시작 열흘 전쯤 마을사람들이 합의하여 '깨끗한 사람'을 선출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바깥출입을 금하면서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 하고 마을 사람들도 그 마을에서 지켜온 금기(禁忌) 사항들을 지켜야 한다. 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 전체가 제주의 집, 혹은 마을회관에 모여 음복을 하고 제비용을 결산하는 등 마을 일을 상의하는 대동회(大同會)를 갖는다.
이렇게 제 3전시관을 끝으로 하여 나의 박물관 관람은 모두 끝이 났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의 그 찜찜한 마음은 온데 간데 없었고 가슴속에 무엇인가 꽉 찬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간이 된다면 다른 민속 박물관도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인이면서도 우리의 문화를 잘 몰랐던 나에게는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납폐함
혼례절차의 하나인 납폐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보내는 예장과 예단을 담는 함이다. 일반적으로 '함'은 그 안의 내용물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함에는 혼수(婚需)와 예장(禮狀), 그리고 물목(物目)을 넣는다. 혼수는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다르나 신부의 의상(衣裳) 각 두벌과 패물 및 혼서지는 어느 경우나 반드시 들어간다. 예단은 청색과 홍색의 색깔 있는 치마감으로 한다. 함은 무명 8자로 된 '함질끈'을 마련하여 석자는 땅에 끌리게 하고 나머지로 고리를 만들어 질 수 있도록 만든다. 함을 지고가는 사람은 '함진아비'라고 하여 흔히 첫 아들을 낳은 복많은 사람에게 맡긴다.
함은 마루에 상을 놓고 그 위에 홍보를 덮은 뒤받기도 하고, 상위에 시루를 놓고 그 위에 얹기도 한다. 함을 받은 신부측에서는 함에 손을 넣어 잡히는 옷감 색에 따라 부부의 장래를 점치기도 한다. 신부집에서는 함진애비를 비롯한 신랑측 일행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낸다.
마지막으로 상례와 제례에 관한 것들이 나와 있었다. 여기에서는 사당, 명부전, 동제당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사당은 조상이나 현인(賢人)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원래 일반인들은 가묘를 쓰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주자거래>를 쓴 주희(朱憙)가 일반 가묘를 사당이라고 칭하고 이를 권장한 이후 일반인들도 가묘(家廟) 형식의 사당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왕묘(王廟)가 세워졌던 점으로 미루어 사당은 이때부터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의 내세관과 관련하여 사당을 주로 절안에 세웠다. 가묘 형식의 사당은 고려말 성리학의 유입으로 주자가례가 시행됨에 따라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다락에다 만든 '민간사당'의 등장은 이를 잘 나타내준다. 사당의 내부는 북쪽에 1가(架)를 설치하고 4등분하여 감실(龕室)을 만들고 나무판으로 막아서 구분한다. 감실마다 탁자 위에 주독(主 )을 놓고 그 속에 신주를 모시며, 감실 밖에는 각 각 작은 발을 내리고, 사당 한가운데에 향탁을 놓고 향탁 위에는 향합(香盒)과 향로(香爐) 를 놓는다. 서쪽 감실부터 고조고비(高祖考 ), 증조고비(曾祖考 ), 조고비(祖考 ), 그리고 제일 동쪽에 고비(考 )의 신주를 모신다. 사당건물은 3칸이지만 1칸인 경우도 있다. 마루바닥에는 전돌이나 나무판을 깔고 그 위에 자리를 편다. 그리고 중간 도리밑에 중문(中門)을 만들고 좌우에는 분합문(分閤門)을 단다. 사당 밖에는 담장을 두른다. 사당에서 행하는 의식으로는 신알례(晨謁禮), 출입고(出入告), 삭참(朔參), 망참(望參), 정조 참(正朝參), 동지참(冬至參), 속절다례(俗節茶禮), 천신례(薦新禮), 유사고(有事告)가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러한 의식을 다 행하지는 않고, 새로 신주를 조성하고 사당을 설치하는 집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명부(冥府)란 저승에 있는 법정을 말하며, 명부전이란 명부를 상징적으로 꾸며놓은 사찰 건물의 하나다. 명부전에는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 (十王)이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시왕전 (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주불(主佛)로 되어 있어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구성은 지장보살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명부시 왕상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고, 시왕상 앞에는 각각 동자상을 놓는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녹사(綠事), 장군(將軍) 등의 존상(尊像)
이 갖추어져 있다. 지장보살은 불교적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면서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조상의 천도를 위해 후손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시왕은 죽은 자들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지옥 왕이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염라대왕은 이 가운데 다섯 번째 왕이다. 불교신앙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뒤에는 100일.소상(小祥). 대상(大祥)까지 열 차례에 걸쳐 각 왕에게 생전에 지은 죄를 심판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때마다 죽은 조상이 지장보살의 자비와 시왕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명부전에서 재(齋)를 지내는 것이다.
동제당(洞祭堂)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동제사를 지내는 집, 즉 신당(神堂) 또는 그에 준하는 공간이다. 동제의 역사는 마을 형성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우리나라에서 생산 단위로서의 자연마을이 전국적으로 형성된 때는 조선후기에 들어와서이다. 이때는 유교적 이념과 무속적 관행이 민간으로 확산되는 시기이기도하다. 동제의 형식과 내용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이 흔히 발견된다. 당집을 지어 신체(神體)를 모시는 동제당의 형태는 그 크기나 건축양식에서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상당, 중당, 하당 등 여러 개의 당집이 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단(壇)만 있는 형태, 신목만 있는 형태, 선돌이 있는 형태, 선돌과 신목이 함께 있는 형태 등 당집을 갖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동제의 시기는 정월 14일 밤이 가장 보편적이지만 지역에 따라 정월 초,2월 초,5월 단오, 8월, 10월, 섣달 그믐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동제의 진행은 제관 선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동제 시작 열흘 전쯤 마을사람들이 합의하여 '깨끗한 사람'을 선출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바깥출입을 금하면서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 하고 마을 사람들도 그 마을에서 지켜온 금기(禁忌) 사항들을 지켜야 한다. 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 전체가 제주의 집, 혹은 마을회관에 모여 음복을 하고 제비용을 결산하는 등 마을 일을 상의하는 대동회(大同會)를 갖는다.
이렇게 제 3전시관을 끝으로 하여 나의 박물관 관람은 모두 끝이 났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의 그 찜찜한 마음은 온데 간데 없었고 가슴속에 무엇인가 꽉 찬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간이 된다면 다른 민속 박물관도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인이면서도 우리의 문화를 잘 몰랐던 나에게는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