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장 합리와 비합리
제2장 누멘적인 것-종교체험
제3장 누멘적인 것의 여러 가지 요소들
제4장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
제5장 누멘적 찬송들
제6장 매혹성(Fascination)
제7장 어마어마함(das Ungeheure)
제8장 유추적 감정들
제9장 누멘적 가치로서의 거룩함 ― 장엄성
제10장 나가며
제2장 누멘적인 것-종교체험
제3장 누멘적인 것의 여러 가지 요소들
제4장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
제5장 누멘적 찬송들
제6장 매혹성(Fascination)
제7장 어마어마함(das Ungeheure)
제8장 유추적 감정들
제9장 누멘적 가치로서의 거룩함 ― 장엄성
제10장 나가며
본문내용
반발하였다.
오토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란, 종교개혁자들이 본래적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의 핵심인 종교체험의 확신과 그것의 중요성이었다. 오토의 책이 쓰여지게 되었던 역사적 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유주의 신학의 위험성은 영혼의 이러한 누멘적 요소를 평면화 하려는 데 있었다. 그래서 합리주의 신학은 성서의 기록된 기적도 다 부인해 버리고, 영적 세계의 문제도 심리적인 현상으로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들, 그 종교들의 경전, 그 종교들의 상징이나 신화들이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실은 궁극적 실재의 다른 차원을 발견함으로서 가능해지는 이러한 <변화의 체험> 들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화두(話頭)가 되는 것은 종교의 외적 형식이 아니라 내적 체험이다. 참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종교의 교의나 의식, 신학, 상징, 가치체계가 아니라 그것이 본래적으로 말하려 했던 영의 소리, 내적 체험이다. 오토가 "인간 체험의 영역가운데서만 주어지는 특유한 체험의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체험의 영역이다"라고 말했던 그 특유한 영의 체험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내적인 체험의 강한 요청이 현재 한국교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교회부흥운동으로서의 성령운동을 부추기고 정당화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사실 한국 교회 성령운동의 문제는 첫 오순절 사건의 중심적 요소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 관한 신학적 반성과 그것에 기초한 실천보다는, 오히려 물량적 교회 팽창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그 "성령 임재 사건"이 오용되고 남용되어, 이른바 성령사건을 신비한 종교현상의 성령운동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소위 말하는 "성령운동"은 목회의 영력과 교회의 부흥성장을 위한 도구로서 합리화 되어버린 점이 없지 않아 있다. 또한 방언, 치유, 예언, 열광적 찬송, 등등이 잘못된 은사라고 할 수는 없으나 복음의 전달을 통한 인간구원보다는, 그러한 종교현상이나 엑스타시적 은사에 더 큰 비중을 실어서 성령의 활동을 억지로 가시화 시키고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오토가 말하고자 했던 종교체험의 본질과는 다른 것이다.
종교체험의 사건이 지나치게 감성에 매몰될 때, 종교는 <감상주의적 종교>, 과잉흥분을 영적 체험으로 혼동하는 <영적 탐미주의> 또는 <종교적 광기주의>로 변질되어 버린다. 또한 종교체험의 사건이 지나치게 인간의 덕성에 매몰될 때, 종교의 본래적인 자리는 사라지고 근엄하고 무거운 도덕적 바리새주의, 율법주의가 되어버린다. 또한 오토가 그 시대에 비판했던 것처럼 종교체험의 사건이 지나치게 인간의 지성에 매몰될 때, 종교의 본질은 메마른 교리지상주의나 초자연주의를 위장한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이론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건강한 종교는 이런 세가지 요소를 다 살려내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상호교통하며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의 삶이 또한 건강해진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이루어왔던 영성운동의 맹점은 바로 이런 건강한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어느 것 하나만을 강조하면서 나타난 부작용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진정 한국교회가 올바른 영성운동을 실현하고 건강한 영성생활을 지도해 나가기 위해서는, 참 신앙과 참다운 종교체험의 사건이 이러한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되기 쉬운 성향을 방지하고 또한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균형을 잡아나가는데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책임은 일차적으로 향후 한국교회에 지도자가 될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하며 오토가 소망했던 바램일 것이다.
오토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란, 종교개혁자들이 본래적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의 핵심인 종교체험의 확신과 그것의 중요성이었다. 오토의 책이 쓰여지게 되었던 역사적 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유주의 신학의 위험성은 영혼의 이러한 누멘적 요소를 평면화 하려는 데 있었다. 그래서 합리주의 신학은 성서의 기록된 기적도 다 부인해 버리고, 영적 세계의 문제도 심리적인 현상으로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들, 그 종교들의 경전, 그 종교들의 상징이나 신화들이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실은 궁극적 실재의 다른 차원을 발견함으로서 가능해지는 이러한 <변화의 체험> 들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화두(話頭)가 되는 것은 종교의 외적 형식이 아니라 내적 체험이다. 참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종교의 교의나 의식, 신학, 상징, 가치체계가 아니라 그것이 본래적으로 말하려 했던 영의 소리, 내적 체험이다. 오토가 "인간 체험의 영역가운데서만 주어지는 특유한 체험의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체험의 영역이다"라고 말했던 그 특유한 영의 체험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내적인 체험의 강한 요청이 현재 한국교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교회부흥운동으로서의 성령운동을 부추기고 정당화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사실 한국 교회 성령운동의 문제는 첫 오순절 사건의 중심적 요소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 관한 신학적 반성과 그것에 기초한 실천보다는, 오히려 물량적 교회 팽창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그 "성령 임재 사건"이 오용되고 남용되어, 이른바 성령사건을 신비한 종교현상의 성령운동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소위 말하는 "성령운동"은 목회의 영력과 교회의 부흥성장을 위한 도구로서 합리화 되어버린 점이 없지 않아 있다. 또한 방언, 치유, 예언, 열광적 찬송, 등등이 잘못된 은사라고 할 수는 없으나 복음의 전달을 통한 인간구원보다는, 그러한 종교현상이나 엑스타시적 은사에 더 큰 비중을 실어서 성령의 활동을 억지로 가시화 시키고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오토가 말하고자 했던 종교체험의 본질과는 다른 것이다.
종교체험의 사건이 지나치게 감성에 매몰될 때, 종교는 <감상주의적 종교>, 과잉흥분을 영적 체험으로 혼동하는 <영적 탐미주의> 또는 <종교적 광기주의>로 변질되어 버린다. 또한 종교체험의 사건이 지나치게 인간의 덕성에 매몰될 때, 종교의 본래적인 자리는 사라지고 근엄하고 무거운 도덕적 바리새주의, 율법주의가 되어버린다. 또한 오토가 그 시대에 비판했던 것처럼 종교체험의 사건이 지나치게 인간의 지성에 매몰될 때, 종교의 본질은 메마른 교리지상주의나 초자연주의를 위장한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이론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건강한 종교는 이런 세가지 요소를 다 살려내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상호교통하며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의 삶이 또한 건강해진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이루어왔던 영성운동의 맹점은 바로 이런 건강한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어느 것 하나만을 강조하면서 나타난 부작용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진정 한국교회가 올바른 영성운동을 실현하고 건강한 영성생활을 지도해 나가기 위해서는, 참 신앙과 참다운 종교체험의 사건이 이러한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되기 쉬운 성향을 방지하고 또한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균형을 잡아나가는데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책임은 일차적으로 향후 한국교회에 지도자가 될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하며 오토가 소망했던 바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