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하셨다. 그 관점은 이세상의 문제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세상의 해결책으로 진정한 믿음을 제시하고 요구하셨다면 우리가 매달려야 하
는 일도 믿음의 일이지 이세상의 일은 아니지 않는가? 이세상의 문제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
가 누구의 자녀인가에 대한 시험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
니라 이세상 문제들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과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세상의 문제들까지도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복종해야 함을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 보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리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정복 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하
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이 천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터 주셨다. 그리고 이 길로 사람들
을 인도하는 일은 우리에게 맡기셨으며 이 일이 우리의 과제요 천국에서의 우리의 상급이
다. 천국으로 가는 일은 회개와 거듭남의 길이다.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와 거듭남 없
이 단순히 교회에 열심히 하여 사회에 머리가 되도록 만 가르친다면 그들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세상의 일들을 하나님이 마음과 눈으로 판단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천국에서까지
그렇게 필요하고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우선 이세상과 천국이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두 세계 사이에는 본질적인 연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는 천국의 임금이나
손님이나 고객으로 초대 받은 것이 아니라 백성이요 일꾼이요 상속자로 초대 받았기 때문이
다. 천국에 가면 오히려 이세상에서 보다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단지 천국에서는 그 일이
고역이나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요 즐거움일 따름이다.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 그분의 자녀요
상속자로 들어가 그분이 하시던 일에 동참하는 일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영광이요 즐거움
인 것이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에게 더욱 크고 많은 일을 맡기겠다고 하셨다. 작은 일이
란 세상의 일들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일에 충성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
에서 더 크고 많은 일을 담당해야 할 터인데 작은 일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이 크고 많은 일
들을 감당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셨지만 이 세상의
문제들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들은 우리에게 과제로 남기셨다.
그리고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셨는데 그것이 믿음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믿음으로 구하기만 한다면 이세상의 문제들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 반대로 오히려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해 주시기를 원
하신다. 우리에게 믿음과 성령을 주신 까닭이다. 기도는 무심하게 앉아 게신 하나님을 일어
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사명 앞에 놓고도 일어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이 하나
님을 위하여 감연히 일어날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이세상과 천국 사이에 동질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천국이 가까왔다, 내가 속히 오리라
는 말씀을 단순이 시간적 임박이 아니라 우리의 결단의 절박성을 일깨우기 위한 외침이었다
고 보아야 한다. 그 외침은 이세상 일들은 다 벼려라가 아니라 더이 상 죄를 짖지 말고 하
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결단하라는 뜻을 지닌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는 것이지 천국이 임박한 시대에만
적용되는 과도기의 윤리가 아니었다. 그분의 가르침은 천국의 윤리 그 자체였다. 살아 게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의 우리의 모든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이 뒤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5. 기독교 세계관의 형성
우리는 흔히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에 그 토대를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 토
대를 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명확하지 못한 것이 사실
이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책과 과학책, 또는 정치나 경제 서적이지만 또한 그 이상의 것이기
도 하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며 또 어떠했는가에 관한 책이다. 성경
은 인간을 바로잡기 위한 책이다. 성경의 일차적인 목적이 인간 개혁에 있다면, 각각의 문화
영역을 다루는 기독교 세계관들과 성경과의 관련성은 거듭난 인간을 매개로 한 간접적일 수
밖에 없다. 거듭난 사람은 이세상사를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시작
하는데, 그가 지니는 시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본주의의 탈피와 신본주의에로의 전향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본주의의 삶의 생각들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독교 세계관이다.
이처럼 기독교 세계관은 거듭난 사람들의 산물이기 때문에 틀릴 가능성이 있으며, 미숙하
고 불완전하며, 개선과 발전 및 성숙의 여지가 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에 불과하지 그가 곧 완전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
독교 세계관은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롭게 검증되고 비판받아야 하며 계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성숙시켜 나가야 할 대상이지, 믿고 신봉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이러한 과정을 실험적 과정
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의 두 기둥은 성경을 통한 우리의 개혁과 거듭남, 그리고 우리의 삶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하는 우리의 실험적 노력이
다.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의 머리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
는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검증되고 구현되는 기독교 세계관만이 살아 움직
이는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그 기독교 세계관이 검증되며 뿌리 내릴 수 있는 삶의 공동체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기독교 세계관을 신봉하고 숭배하는 고착된 집단이
아니라, 검증하고 실험하고 개혁해 나가는 역동적 집단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갑자기 한두
사람의 신앙 영웅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가운데 끊임없는 검증과 개혁으로 성
장하고 성숙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몇몇 지식인들의 지적 성취 물이 아니라 교회 자
신의 존재 양상이어야 한다.
돌아오지 않고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세상의 해결책으로 진정한 믿음을 제시하고 요구하셨다면 우리가 매달려야 하
는 일도 믿음의 일이지 이세상의 일은 아니지 않는가? 이세상의 문제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
가 누구의 자녀인가에 대한 시험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
니라 이세상 문제들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과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세상의 문제들까지도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복종해야 함을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 보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리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정복 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하
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이 천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터 주셨다. 그리고 이 길로 사람들
을 인도하는 일은 우리에게 맡기셨으며 이 일이 우리의 과제요 천국에서의 우리의 상급이
다. 천국으로 가는 일은 회개와 거듭남의 길이다.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와 거듭남 없
이 단순히 교회에 열심히 하여 사회에 머리가 되도록 만 가르친다면 그들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세상의 일들을 하나님이 마음과 눈으로 판단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천국에서까지
그렇게 필요하고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우선 이세상과 천국이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두 세계 사이에는 본질적인 연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는 천국의 임금이나
손님이나 고객으로 초대 받은 것이 아니라 백성이요 일꾼이요 상속자로 초대 받았기 때문이
다. 천국에 가면 오히려 이세상에서 보다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단지 천국에서는 그 일이
고역이나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요 즐거움일 따름이다.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 그분의 자녀요
상속자로 들어가 그분이 하시던 일에 동참하는 일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영광이요 즐거움
인 것이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에게 더욱 크고 많은 일을 맡기겠다고 하셨다. 작은 일이
란 세상의 일들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일에 충성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
에서 더 크고 많은 일을 담당해야 할 터인데 작은 일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이 크고 많은 일
들을 감당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셨지만 이 세상의
문제들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들은 우리에게 과제로 남기셨다.
그리고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셨는데 그것이 믿음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믿음으로 구하기만 한다면 이세상의 문제들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 반대로 오히려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해 주시기를 원
하신다. 우리에게 믿음과 성령을 주신 까닭이다. 기도는 무심하게 앉아 게신 하나님을 일어
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사명 앞에 놓고도 일어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이 하나
님을 위하여 감연히 일어날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이세상과 천국 사이에 동질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천국이 가까왔다, 내가 속히 오리라
는 말씀을 단순이 시간적 임박이 아니라 우리의 결단의 절박성을 일깨우기 위한 외침이었다
고 보아야 한다. 그 외침은 이세상 일들은 다 벼려라가 아니라 더이 상 죄를 짖지 말고 하
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결단하라는 뜻을 지닌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는 것이지 천국이 임박한 시대에만
적용되는 과도기의 윤리가 아니었다. 그분의 가르침은 천국의 윤리 그 자체였다. 살아 게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의 우리의 모든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이 뒤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5. 기독교 세계관의 형성
우리는 흔히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에 그 토대를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 토
대를 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명확하지 못한 것이 사실
이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책과 과학책, 또는 정치나 경제 서적이지만 또한 그 이상의 것이기
도 하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며 또 어떠했는가에 관한 책이다. 성경
은 인간을 바로잡기 위한 책이다. 성경의 일차적인 목적이 인간 개혁에 있다면, 각각의 문화
영역을 다루는 기독교 세계관들과 성경과의 관련성은 거듭난 인간을 매개로 한 간접적일 수
밖에 없다. 거듭난 사람은 이세상사를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시작
하는데, 그가 지니는 시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본주의의 탈피와 신본주의에로의 전향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본주의의 삶의 생각들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독교 세계관이다.
이처럼 기독교 세계관은 거듭난 사람들의 산물이기 때문에 틀릴 가능성이 있으며, 미숙하
고 불완전하며, 개선과 발전 및 성숙의 여지가 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에 불과하지 그가 곧 완전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
독교 세계관은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롭게 검증되고 비판받아야 하며 계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성숙시켜 나가야 할 대상이지, 믿고 신봉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이러한 과정을 실험적 과정
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의 두 기둥은 성경을 통한 우리의 개혁과 거듭남, 그리고 우리의 삶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하는 우리의 실험적 노력이
다.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의 머리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
는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검증되고 구현되는 기독교 세계관만이 살아 움직
이는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그 기독교 세계관이 검증되며 뿌리 내릴 수 있는 삶의 공동체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기독교 세계관을 신봉하고 숭배하는 고착된 집단이
아니라, 검증하고 실험하고 개혁해 나가는 역동적 집단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갑자기 한두
사람의 신앙 영웅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가운데 끊임없는 검증과 개혁으로 성
장하고 성숙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몇몇 지식인들의 지적 성취 물이 아니라 교회 자
신의 존재 양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