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하이데거에 대하여
-은둔의 철학자 하이데거
-존재의 물음
-세계 - 내 - 존재
-세상 사람
-우리 시대의 하이데거
-들어가는 말
1. 현상학의 출현
2. ≫현상≪(Phanomen)에 대한 ≫학≪(logos)으로서의 현상학
3. 현상학과 철학, 그리고 ≫존재≪
-퐁티에 대하여
-은둔의 철학자 하이데거
-존재의 물음
-세계 - 내 - 존재
-세상 사람
-우리 시대의 하이데거
-들어가는 말
1. 현상학의 출현
2. ≫현상≪(Phanomen)에 대한 ≫학≪(logos)으로서의 현상학
3. 현상학과 철학, 그리고 ≫존재≪
-퐁티에 대하여
본문내용
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학문, 즉 존재론의 전개에 앞서 그것의 탐구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거기에≪ 놓여 있는 장소로서의 ≫이해≪ 자체의 구조와 가능성이 먼저 물어져야 한다고 본다. 존재론에 앞서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에 대한 탐구를 하이데거는 사태에 걸맞게 ≫기초존재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기초존재론의 탐구주제는 - 이미 언급 했듯이 -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장소로서의 ≫존재이해≪ 자체이다.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디로부터, 즉 미리 주어져 있는 어떤 지평으로부터 우리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인가?” (전집 24, 21)
존재론의 가능조건으로서의 존재이해 자체의 근거, 즉 지평을 묻는 이 ≫기초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뜻밖에도 ≫시간≪이다. “존재라고 하는 것의 이해가 가능해지는 지평은 시간이다.” (전집 24, 22) 이로써 우리는 왜 하이데거가 오랜 기간의 침묵 끝에 내놓은 책의 이름이 『존재와 시간』인지 조금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10] 하이데거에게 ≫존재와 시간≪은 단순한 책 제목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 즉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철학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 그리고 시간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이 ≫존재와 시간≪이라는 문제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와 시간, 이 양자의 내밀한 유사성은 은폐되어 있다. 존재와 시간은 아직 문제로서 경험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존재, 시간: 그러나 존재와 시간? 존재와 시간을 묶고 있는 이 ≫와≪야말로 문제의 본래적인 핵심이다.“ (전집 31, 116)[11]
나가는 말
궁극적으로 존재와 시간의 근원적 연관을 해명하려는 의도로 씌어진 『존재와 시간』에서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존재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 까닭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존재와 시간』을 저술할 당시의 하이데거에게 ≫존재 자체≪는 오직 그 것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그 것의 의미를 문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즉 인간을 통해서만 탐구 가능한 것이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탁월함은 이성을 수단으로 하여 다른 존재자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능력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와의 그러한 모든 가능한 관계맺음에 앞서서 ≫존재≪를 이해한다는 사실 자체에 놓여 있다. 존재와의 근원적인 관계 (존재이해) 없이는 존재자와의 어떤 관계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이 ≫능력≪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론적≪ 탁월함을 보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 이후에도 인간 (현존재)와 존재의 상호 공속성은 여전히 하이데거의 철학적 화두로 남는다.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이해≪라 불리웠던 이 ≫능력≪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규정이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예컨대 마르부르크에서 행한 마지막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 이 강의를 끝낸 하이데거는 정년을 맞은 후설의 후임 자리를 메꾸기 위해 모교인 프라이부르크로 금의환향한다 - 동일한 사태를 ≫초월≪이란 말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초월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인식론적 관계 (주체와 객체의 관계)나 신학적인 관계 (신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철두 철미 ≫존재론적으로≪, 즉 존재에로의 넘어섬으로[12] 이해되어져 하는 관계이다. 그러길래 하이데거는 - 분명히 그의 스승의 위대한 발견을 염두에 두고서 - 다시 한번 이렇게 강조해 마지 않는 것이다. “초월의 문제는 지향성의 문제와 결코 같지 않다. 지향성은 존재적 초월로서 그 자체 오직 근원적 초월, 즉 세계-내-존재의 근거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 근원적 초월(Urtranszendenz)은 존재자에 대한 모든 지향적 관계를 가능케 한다.” (전집 26, 170)
퐁티에 대하여
고독과 교제는 양자 택일해야 할 두 가지 용어가 아니고, 유일한 현상의 두 가지 계기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
사실의 모든 진리는 이성의 진리고, 이성의 모든 진리는 사실의 진리다. 이성과 사실의 관계, 영원과 시간의 관계는 반성과 반성되지 않는 것과 사유의 언어나 사유나 지각의 관계처럼 현상학이 정초하기라고 부르는 이중적 의미의 관계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
메를로 퐁티는 그 독창적인 이론의 전개로 주목받는 철학자인데, 이런 평가는 현상학과 실존 철학 및 마르크스주의에 주목하고 이들을 자신만의 사유와 종합시킴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전통적인 철학의 맥락, 그러니까 인간 존재나 의식의 본질, 진리, 자유, 타인과 세계와의 공존 등과 이어지는 고민들과 함께 퐁티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정신과 신체의 관계이다. 이를 통해 그가 도달하려 했던 고지는 바로 관념론과 실재론, 주관과 객관, 지각과 오성, 자아와 타자, 의미와 무의미,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양면을 보이면서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정점이다.
메를로 퐁티의 "인식하는 정신은 하나의 육화된 정신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신체적 실존의 지각현상에의 강조가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그가 보기에 지각을 추상적으로 보편화해버리는 지각일반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세계 속에서 우리의 신체(육체 혹은 몸)가 체험하는 지각만이 있을 뿐이다.육화된 지각의 주체는 항상 변화하고 또한 새롭게 탄생한다. 지각의 확실성을 항상 검증해야 하는 임무는 현상학적 연구에 과제로서 주어지고, 이는 사물과 정신 사이의 의사 소통의 방법을 재정립하는 데 있다.
퐁티는 세계를 인간의 삶이나 지식과 관련시키지 않고 독립된 '저기 밖'에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경향에 저항한다. 그는 인간의식의 본질적인 지향성에 천착하였다. 인간 지각은 수동적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파지하고 변화시킨다는 확신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퐁티는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구체성에 대한 개념적인 추상성의 우위를 거부한 마르크스주의를 유물론이 아니라 인간행동의 철학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경제를 역사의 유일한 법칙이나 원인으로 파악하지 않고, 문화사와 경제사를 역사의 추상적인 양면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둔다.
존재론의 가능조건으로서의 존재이해 자체의 근거, 즉 지평을 묻는 이 ≫기초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뜻밖에도 ≫시간≪이다. “존재라고 하는 것의 이해가 가능해지는 지평은 시간이다.” (전집 24, 22) 이로써 우리는 왜 하이데거가 오랜 기간의 침묵 끝에 내놓은 책의 이름이 『존재와 시간』인지 조금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10] 하이데거에게 ≫존재와 시간≪은 단순한 책 제목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 즉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철학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 그리고 시간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이 ≫존재와 시간≪이라는 문제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와 시간, 이 양자의 내밀한 유사성은 은폐되어 있다. 존재와 시간은 아직 문제로서 경험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존재, 시간: 그러나 존재와 시간? 존재와 시간을 묶고 있는 이 ≫와≪야말로 문제의 본래적인 핵심이다.“ (전집 31, 116)[11]
나가는 말
궁극적으로 존재와 시간의 근원적 연관을 해명하려는 의도로 씌어진 『존재와 시간』에서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존재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 까닭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존재와 시간』을 저술할 당시의 하이데거에게 ≫존재 자체≪는 오직 그 것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그 것의 의미를 문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즉 인간을 통해서만 탐구 가능한 것이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탁월함은 이성을 수단으로 하여 다른 존재자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능력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와의 그러한 모든 가능한 관계맺음에 앞서서 ≫존재≪를 이해한다는 사실 자체에 놓여 있다. 존재와의 근원적인 관계 (존재이해) 없이는 존재자와의 어떤 관계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이 ≫능력≪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론적≪ 탁월함을 보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 이후에도 인간 (현존재)와 존재의 상호 공속성은 여전히 하이데거의 철학적 화두로 남는다.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이해≪라 불리웠던 이 ≫능력≪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규정이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예컨대 마르부르크에서 행한 마지막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 이 강의를 끝낸 하이데거는 정년을 맞은 후설의 후임 자리를 메꾸기 위해 모교인 프라이부르크로 금의환향한다 - 동일한 사태를 ≫초월≪이란 말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초월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인식론적 관계 (주체와 객체의 관계)나 신학적인 관계 (신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철두 철미 ≫존재론적으로≪, 즉 존재에로의 넘어섬으로[12] 이해되어져 하는 관계이다. 그러길래 하이데거는 - 분명히 그의 스승의 위대한 발견을 염두에 두고서 - 다시 한번 이렇게 강조해 마지 않는 것이다. “초월의 문제는 지향성의 문제와 결코 같지 않다. 지향성은 존재적 초월로서 그 자체 오직 근원적 초월, 즉 세계-내-존재의 근거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 근원적 초월(Urtranszendenz)은 존재자에 대한 모든 지향적 관계를 가능케 한다.” (전집 26, 170)
퐁티에 대하여
고독과 교제는 양자 택일해야 할 두 가지 용어가 아니고, 유일한 현상의 두 가지 계기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
사실의 모든 진리는 이성의 진리고, 이성의 모든 진리는 사실의 진리다. 이성과 사실의 관계, 영원과 시간의 관계는 반성과 반성되지 않는 것과 사유의 언어나 사유나 지각의 관계처럼 현상학이 정초하기라고 부르는 이중적 의미의 관계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
메를로 퐁티는 그 독창적인 이론의 전개로 주목받는 철학자인데, 이런 평가는 현상학과 실존 철학 및 마르크스주의에 주목하고 이들을 자신만의 사유와 종합시킴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전통적인 철학의 맥락, 그러니까 인간 존재나 의식의 본질, 진리, 자유, 타인과 세계와의 공존 등과 이어지는 고민들과 함께 퐁티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정신과 신체의 관계이다. 이를 통해 그가 도달하려 했던 고지는 바로 관념론과 실재론, 주관과 객관, 지각과 오성, 자아와 타자, 의미와 무의미,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양면을 보이면서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정점이다.
메를로 퐁티의 "인식하는 정신은 하나의 육화된 정신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신체적 실존의 지각현상에의 강조가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그가 보기에 지각을 추상적으로 보편화해버리는 지각일반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세계 속에서 우리의 신체(육체 혹은 몸)가 체험하는 지각만이 있을 뿐이다.육화된 지각의 주체는 항상 변화하고 또한 새롭게 탄생한다. 지각의 확실성을 항상 검증해야 하는 임무는 현상학적 연구에 과제로서 주어지고, 이는 사물과 정신 사이의 의사 소통의 방법을 재정립하는 데 있다.
퐁티는 세계를 인간의 삶이나 지식과 관련시키지 않고 독립된 '저기 밖'에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경향에 저항한다. 그는 인간의식의 본질적인 지향성에 천착하였다. 인간 지각은 수동적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파지하고 변화시킨다는 확신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퐁티는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구체성에 대한 개념적인 추상성의 우위를 거부한 마르크스주의를 유물론이 아니라 인간행동의 철학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경제를 역사의 유일한 법칙이나 원인으로 파악하지 않고, 문화사와 경제사를 역사의 추상적인 양면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