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문제의 제기
Ⅱ. 대북포용정책의 내용과 특징
1.내용
2. 역대정권의 대북정책과의 차별성
3. 대북포용정책의 국제적 확대: 포괄적 접근
Ⅲ. 대북포용정책 추진의 배경
- 통일에 대한 전망과 북한의 미래 예측
Ⅳ. 대북포용정책 추진 평가
1. 추진경과와 평가
2. 국내 비판의 특징과 문제점
3. 북한의 반응 평가
Ⅴ. 보완점과 과제
Ⅱ. 대북포용정책의 내용과 특징
1.내용
2. 역대정권의 대북정책과의 차별성
3. 대북포용정책의 국제적 확대: 포괄적 접근
Ⅲ. 대북포용정책 추진의 배경
- 통일에 대한 전망과 북한의 미래 예측
Ⅳ. 대북포용정책 추진 평가
1. 추진경과와 평가
2. 국내 비판의 특징과 문제점
3. 북한의 반응 평가
Ⅴ. 보완점과 과제
본문내용
이제는 배제와 제압(〓진압)의 논리가 혁파되고 공존의 논리가 존중받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즉, 상이한 통일운동세력간에도 “나” 아닌 “다름”과의 공존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다름”과의 협력적 경쟁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촉진요인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새로운 문화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각 주]
*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 이 논문은 필자가 1999년 7월 16일 세종민관합동 정책세미나에서 발표한 기조논문 『대북포용정책 16개월, 평가와 과제』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당시 세미나에 참가해서 본 논문과 관련하여 귀중한 토론을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1) 통일부, 『‘국민의 정부’ 대북정책 추진 기조』, 1998. 3. 26, p. 1.
2) 이와 관련해서는 백학순, “최근 북한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며, 우리는 과연 햇볕정책을 지속해야 하는가?,” 『정세와 정책』 99-07, 세종연구소, 1999, pp. 6-7.
3) 이하의 논의는 이종석, “남북대화: 현황과 과제,” 『통일시론』 99년 봄호, 청명문화재단, 1999. 3, pp. 71-73에 기초함.
4) 탈냉전 진행의 비동시성이란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해체와 동북아시아 차원, 그리고 한반도 차원에서의 냉전해체가 시간적 차이를 두고 진행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종석, 『분단시대의 통일학』, 한울아카데미, 1998, p. 39.
5) 이하의 포괄적 접근논의는 이종석, “북핵·미사일 문제의 해법, 왜 포괄적 접근인가,” 『정세와 정책』 99-05, 세종연구소, 1999. 5. 15에 기초함.
6) 이 부분의 논의는 이종석, 『분단시대의 통일학』, pp. 12-14에 기초함.
7) 김일성, “현시기 정무원 앞에 나서는 중심과업에 대하여 (1992. 12. 14),” 『김일성저작집(4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p. 16; 김일성, “당면한 사회주의 경제건설 방향에 대하여(1993. 12. 8),” 『김일성저작집(44)』, p. 279.
8) Turk, Lynn, “Integrating North Korea,” Korea Money, October 1996, pp. 41-43.
9) “조선로동당규약 (1980. 10),” 국토통일원 편, 『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 제4집, 서울, 국토통일원, 1988, p. 150.
10) 김운근 외, 『1998년 북한의 식량생산량 추정』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99. 1), p. 76, pp. 90-93.
11) 이와 관련해서는 『북한의 경제난 실태와 전망』 (세종연구소, 정책과제연구보고서, 1996년 8월) 참조.
12) http://www.unikorea.go.kr/kr/m34.htm (1999. 7. 12).
13) 정주영,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단의 김정일 면담 기사, 『동아일보』, 1998년 11월 1일.
14) 김일성, “사회주의경제건설에서 새로운 혁명적 전환을 일으킬 데 대하여 (1994. 7. 6),” 『김일성저작집(44)』, p. 486.
15) 김정일, “과학기술발전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 (1991. 10. 28),”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문헌집』, pp. 419-420.
16) “분조관리제 도입 30돌,” 『조선신보』, 1996년 10월 24일.
17) 『조선일보』, 1999년 6월 15일.
18) 1997년까지 북한을 방문한 남한사람은 모두 2408명이었다. 이에 비해서 1998년 한 해 동안 북한을 방문한 숫자는 금강산관광객을 제외하고도 3317명에 달했다. 통일부, 『98 통일백서』, 1999년 3월, p. 62.
19) 『98 통일백서』, pp. 119-120.
21) 대북정책은 단순히 북한을 상대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관용도가 낮은, 아직은 냉전적 분위기가 강한 국내 시민사회를 상대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2) 이는 동일사안을 두고 북한과 국내시민사회에 대해서 이중적 설명을 하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북한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용도(寬容度)가 낮은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것이다. 예컨대, 포용정책을 설명할 때도 북한에게는 화해협력을, 국내 시민사회에는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끌어내는 정책이라고 강조점이 다른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다.
23) 『조선일보』, 1996년 12월 30일.
24) 『조선일보』, 1997년 7월 17일.
25) 『조선일보』, 1997년 4월 11일·9월 10일·10월 18일자 참조.
26) 『98 통일백서』, p. 114.
27) 역사적으로 이 문제를 최초로 거론한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71년 4·27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대구 유세에서 3차 5개년계획이 끝날 76년에는 “금강산을 공동개발하기 위해 우리가 3억 달러 북괴(원문 그대로 인용)가 2억 달러 정도를 투자해서 관광이익의 균분을 제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동아일보』, 1971년 4월 17일자 참조.
28) 이와 관련해서는 이종석, “북한의 권력구조재편과 대남전략,” 『국가전략』 제5권 1호,세종연구소, 1999년 3월, pp. 178-181 참조 .
29) “남조선당국과 해내외 정당, 단체 및 각계 인사들에게 보내는 편지,” 『조선중앙통신』,1999년 2월 3일.
30) 이종석, “북한의 대남정책과 남북관계 전망,”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관계 발전전략』, 남북기본합의서 발효 7주년 및 통일부 창설 30주년 기념세미나, 통일부, 1999년 2월, p. 27.
31) 예컨대, 2월 18일 KBS 9시 뉴스에서 보도된 포괄적 접근 3단계안이나 『중앙일보』 1999년 6월 14일자의 서해사태 관련 아군 경비정의 밀어내기 작전에서 북한군 사망설 보도.
32) 예컨대, 북한이 페리 보고서 거부했다는 보도, 『중앙일보』, 1999년 6월 15일.
33) 이러한 관점에서 비록 합의사항이 제대로 지켜지지는 못했으나, 지난 봄에 있었던 차관급회담을 위한 비공식접촉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34) 지난 6, 7월의 차관급회담 기간 중 북미 고위급회담과 장성급회담을 열어, 이 기간 동안 차관급회담을 공전시킨 것이 그 예이다.
[각 주]
*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 이 논문은 필자가 1999년 7월 16일 세종민관합동 정책세미나에서 발표한 기조논문 『대북포용정책 16개월, 평가와 과제』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당시 세미나에 참가해서 본 논문과 관련하여 귀중한 토론을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1) 통일부, 『‘국민의 정부’ 대북정책 추진 기조』, 1998. 3. 26, p. 1.
2) 이와 관련해서는 백학순, “최근 북한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며, 우리는 과연 햇볕정책을 지속해야 하는가?,” 『정세와 정책』 99-07, 세종연구소, 1999, pp. 6-7.
3) 이하의 논의는 이종석, “남북대화: 현황과 과제,” 『통일시론』 99년 봄호, 청명문화재단, 1999. 3, pp. 71-73에 기초함.
4) 탈냉전 진행의 비동시성이란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해체와 동북아시아 차원, 그리고 한반도 차원에서의 냉전해체가 시간적 차이를 두고 진행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종석, 『분단시대의 통일학』, 한울아카데미, 1998, p. 39.
5) 이하의 포괄적 접근논의는 이종석, “북핵·미사일 문제의 해법, 왜 포괄적 접근인가,” 『정세와 정책』 99-05, 세종연구소, 1999. 5. 15에 기초함.
6) 이 부분의 논의는 이종석, 『분단시대의 통일학』, pp. 12-14에 기초함.
7) 김일성, “현시기 정무원 앞에 나서는 중심과업에 대하여 (1992. 12. 14),” 『김일성저작집(4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p. 16; 김일성, “당면한 사회주의 경제건설 방향에 대하여(1993. 12. 8),” 『김일성저작집(44)』, p. 279.
8) Turk, Lynn, “Integrating North Korea,” Korea Money, October 1996, pp. 41-43.
9) “조선로동당규약 (1980. 10),” 국토통일원 편, 『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 제4집, 서울, 국토통일원, 1988, p. 150.
10) 김운근 외, 『1998년 북한의 식량생산량 추정』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99. 1), p. 76, pp. 90-93.
11) 이와 관련해서는 『북한의 경제난 실태와 전망』 (세종연구소, 정책과제연구보고서, 1996년 8월) 참조.
12) http://www.unikorea.go.kr/kr/m34.htm (1999. 7. 12).
13) 정주영,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단의 김정일 면담 기사, 『동아일보』, 1998년 11월 1일.
14) 김일성, “사회주의경제건설에서 새로운 혁명적 전환을 일으킬 데 대하여 (1994. 7. 6),” 『김일성저작집(44)』, p. 486.
15) 김정일, “과학기술발전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 (1991. 10. 28),”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문헌집』, pp. 419-420.
16) “분조관리제 도입 30돌,” 『조선신보』, 1996년 10월 24일.
17) 『조선일보』, 1999년 6월 15일.
18) 1997년까지 북한을 방문한 남한사람은 모두 2408명이었다. 이에 비해서 1998년 한 해 동안 북한을 방문한 숫자는 금강산관광객을 제외하고도 3317명에 달했다. 통일부, 『98 통일백서』, 1999년 3월, p. 62.
19) 『98 통일백서』, pp. 119-120.
21) 대북정책은 단순히 북한을 상대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관용도가 낮은, 아직은 냉전적 분위기가 강한 국내 시민사회를 상대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2) 이는 동일사안을 두고 북한과 국내시민사회에 대해서 이중적 설명을 하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북한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용도(寬容度)가 낮은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것이다. 예컨대, 포용정책을 설명할 때도 북한에게는 화해협력을, 국내 시민사회에는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끌어내는 정책이라고 강조점이 다른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다.
23) 『조선일보』, 1996년 12월 30일.
24) 『조선일보』, 1997년 7월 17일.
25) 『조선일보』, 1997년 4월 11일·9월 10일·10월 18일자 참조.
26) 『98 통일백서』, p. 114.
27) 역사적으로 이 문제를 최초로 거론한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71년 4·27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대구 유세에서 3차 5개년계획이 끝날 76년에는 “금강산을 공동개발하기 위해 우리가 3억 달러 북괴(원문 그대로 인용)가 2억 달러 정도를 투자해서 관광이익의 균분을 제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동아일보』, 1971년 4월 17일자 참조.
28) 이와 관련해서는 이종석, “북한의 권력구조재편과 대남전략,” 『국가전략』 제5권 1호,세종연구소, 1999년 3월, pp. 178-181 참조 .
29) “남조선당국과 해내외 정당, 단체 및 각계 인사들에게 보내는 편지,” 『조선중앙통신』,1999년 2월 3일.
30) 이종석, “북한의 대남정책과 남북관계 전망,”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관계 발전전략』, 남북기본합의서 발효 7주년 및 통일부 창설 30주년 기념세미나, 통일부, 1999년 2월, p. 27.
31) 예컨대, 2월 18일 KBS 9시 뉴스에서 보도된 포괄적 접근 3단계안이나 『중앙일보』 1999년 6월 14일자의 서해사태 관련 아군 경비정의 밀어내기 작전에서 북한군 사망설 보도.
32) 예컨대, 북한이 페리 보고서 거부했다는 보도, 『중앙일보』, 1999년 6월 15일.
33) 이러한 관점에서 비록 합의사항이 제대로 지켜지지는 못했으나, 지난 봄에 있었던 차관급회담을 위한 비공식접촉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34) 지난 6, 7월의 차관급회담 기간 중 북미 고위급회담과 장성급회담을 열어, 이 기간 동안 차관급회담을 공전시킨 것이 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