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 이슬람과 민족주의(民族主義)
2) 이슬람 통일체(統一體)의 붕괴(崩壞)
3)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발생(發生)
4)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목표(目標)
5)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발전(發展)
결론
본론
1) 이슬람과 민족주의(民族主義)
2) 이슬람 통일체(統一體)의 붕괴(崩壞)
3)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발생(發生)
4)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목표(目標)
5)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발전(發展)
결론
본문내용
독립(獨立)을 간직한 반면에 진보(進步)된 아랍 지역에서는 주민의 소망을 무시하고 서구 열강의 신탁통치(信託統治)가 강요된 것은 서구인의 동기(動機)가 그들의 독립을 부정하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일깨웠고 점차적으로 아랍 민족주의(民族主義)에 부정적(否定的)이고 반 자유주의적(反 自由主義的) 인 요소(要素)를 불어 넣었다. 끊임없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독립의 가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 실질적인 독립은 아니지만 형식적으로 독립을 얻었던 이라크를 제외하고는 ) 아랍 민족주의는 결국 또 하나의 반자유주의적 사상(反 自由主義的 思想)인 '통합적 민족주의(統合的 民族主義)'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파시즘과 그 원형에 해당하는 나치즘의 등장은 둘다 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反作用)으로 일어난 것으로서 아랍 민족주의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좌절감에 빠진 아랍 민족주의(民族主義)는 통합적 민족주의(民族主義)를 통하여 무언가 성취할 수 있다는 매력(魅力)에 끌렸던 것이다. 몇몇 사람은 유럽의 지배와 시온주의에 대한 항거(抗拒)로서 아랍 민족주의를 저 새로운 세력과 일치(一致)시키려 했다. 종교층에게는 이 새로운 민족주의는 이슬람에 낯설지 않는 원형적인 종교적 열정의 재생(再生)으로 보였다. 따라서 종교적 그룹들이 정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유럽의 통합적(統合的) 민족주의로부터 따온 몇가지 만족적인 욕구(慾求)에 대해서 젊은 민족주의자들과 의견(意見)을 같이 하였다.
5)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발전(發展)
민족주의(民族主義)의 세가지 중요한 형태가 제 1차 세계대전 이전(以前)의 이슬람 세계(世界)에서 일어 났었다. 첫번째 페르시아의 민족주의(民族主義)는 순니 이슬람 의 다른 교파(敎派)들에 대한 누적된 지배에의 항거(抗拒)로 간주될 수 도 있다. 그러나 여러면에서 그것은 페르시아인의 종족적.문화적 정체의식(停滯意識)이 쉬아파의 교리(敎理)를 입고 근대적 페르시아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바탕을 이룩하면서 주장된 것이기도 했다 두번째와 세번째 경우인 터키와 아랍의 민족주의는 정통(正統) 이슬람에 그들이 순종(順從)했기 때문에 잠재적(潛在的)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들의 민족주의가 일어난 것은 충성심의 대상으로서 이슬람을 대체할만한 새
로운 공동(共同)의 충성심이 만들어지지 못한 데 대한 반동(反動)으로서였다. 따라서 페르시아 민족주의에서는 종교(곧 쉬아파 회교)가 그 바탕을 제공한 반면, 터키와 아랍 민족주의는 종교(곧 순니)에 의해 오히려 저해 되었다. 그러나 이 세가지 형태의 민족주의는 종교적 가치(宗敎的 價値)를 민족적 가치(民族的 價値)에 종속(從屬)시킴으로써 비로소 각기 별개의 충성심의 대상으로 발전할수 있었다. 그중에서 오직 터키 민족주의(民族主義) 만이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종교를 민족주의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그것은 주로 이슬람을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유산(文化的 遺産)으로 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에 다른 둘은 그들의 신앙을 곧 그들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유산(文化的 遺産)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종교(宗敎)를 민족주의(民族主義)로부터 분리할 수 없었다. 넓은 의미(意味)에서 세 가지 민족주의(民族主義)는 보편적인 이슬람 사회가 유럽의 득세(得勢)에 직면해서 자신을 지탱하는 데 실패한 증거로 간주될 수도있다. 처음에 사회 개혁자(社會 改革子)들은 이슬람을 손상시킴이 없이 개혁조치(改革措置)를 채택하려고 했으나 이슬람 세력의 지속적인 쇠퇴(衰退)로 말미암아 후기의 개혁자(改革子)들은 민족주의(民族主義)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민족주의 운동(民族主義 運動)은 아직도 완전한 성숙단계에 이르지 않고 있다.
초기단계(初期段階)에서는 민족주의(民族主義)가 유럽의 자유주의(自由主義)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던 까닭에 유럽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몇개의 이슬람 지역들이 유럽의 지배 아래 들어간 후에 민족주의(民族主義)는 유럽의 득세(得勢)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나타났다.
서양의 민족주의 운동(民族主義運動)처럼, 이슬람세계의 민족주의(民族主義)는 두 중요한 단계(段階)를 거친후에 근대적 민족국가(近代的 民族國家)에 대한 충성이라는 양식으로 성숙(成熟)되었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왕조의 지배 아래 일정한 지역을 가진 국가가 생겼고 왕실의 이해관계(利害關係)가 민족의 이해관계(利害關係)와 일치(一致)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왕조는 '국가이성(國家理性)'으로 합리화 되었고 항상 자신을 외국의 침해로부터 방어하려 했다. 주권이 왕조에서 민족 내지 국민에게 이양된 두번째 단계에서는 국가이익(國家利益)은 인민(人民)의 의지에 의해 결정(決定)되었다. 이같은 발전 단계(發展 段階)에 아랍인들은 아직 도달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결론
유럽의 민족주의(民族主義)와는 달리 이슬람 지역의 (특히 아랍세계의 ) 민족주의는 근본적(根本的)으로 종족적(種族的) 바탕보다는 문화적(文化的) 바탕 위에 자리작고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처럼 이슬람 지역에서도 민족주의는 갈등 관계(葛藤 關係)이 있는 민족(民族)들에 - 이들이 유럽에서는 주로 다른 종족들인데 비해 아랍세계속에서는 종족적.문화적 요소가 작용한다. - 의해 수정(修正)되어왔다. 아랍지역에서는 일부 소수파들, 특히 종교적 소수파들은 다수파의 민족적 단위(民族的 單位)에 대해 본질적(本質的)인 반대 입장(反對立場)을 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종교의 문제에 문화적 차이(文化的 差異)가 추가되었을 때는 전투적(戰鬪的)인 대립 민족(對立民族)이 형성(形成)되는 경향(傾向)이 있다. 이러한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소수파들은 너무나 다양(多樣)하고 혼합(混合)되어 있어 아랍세계는 거의 소수파들의 모자이크를 닮은 감이 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이집트와 비옥한 초생달 지역의 지배층 엘리트들은 민족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전통적 충성관계(忠誠關係)와 제도를 대체하는 실질적(實質的)인 개념(槪念)과 제도(制度)로 받아들였다. 전자(前者) 즉 민족주의는 국가 조직의 바탕으로 되는데 성공했으나 후자(後者)는 다음 장에서 설명할 여러 요인 때문에 전통적인 제도(制度)를 효과적으로 대체하는 이념(理念)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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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발전(發展)
민족주의(民族主義)의 세가지 중요한 형태가 제 1차 세계대전 이전(以前)의 이슬람 세계(世界)에서 일어 났었다. 첫번째 페르시아의 민족주의(民族主義)는 순니 이슬람 의 다른 교파(敎派)들에 대한 누적된 지배에의 항거(抗拒)로 간주될 수 도 있다. 그러나 여러면에서 그것은 페르시아인의 종족적.문화적 정체의식(停滯意識)이 쉬아파의 교리(敎理)를 입고 근대적 페르시아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바탕을 이룩하면서 주장된 것이기도 했다 두번째와 세번째 경우인 터키와 아랍의 민족주의는 정통(正統) 이슬람에 그들이 순종(順從)했기 때문에 잠재적(潛在的)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들의 민족주의가 일어난 것은 충성심의 대상으로서 이슬람을 대체할만한 새
로운 공동(共同)의 충성심이 만들어지지 못한 데 대한 반동(反動)으로서였다. 따라서 페르시아 민족주의에서는 종교(곧 쉬아파 회교)가 그 바탕을 제공한 반면, 터키와 아랍 민족주의는 종교(곧 순니)에 의해 오히려 저해 되었다. 그러나 이 세가지 형태의 민족주의는 종교적 가치(宗敎的 價値)를 민족적 가치(民族的 價値)에 종속(從屬)시킴으로써 비로소 각기 별개의 충성심의 대상으로 발전할수 있었다. 그중에서 오직 터키 민족주의(民族主義) 만이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종교를 민족주의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그것은 주로 이슬람을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유산(文化的 遺産)으로 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에 다른 둘은 그들의 신앙을 곧 그들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유산(文化的 遺産)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종교(宗敎)를 민족주의(民族主義)로부터 분리할 수 없었다. 넓은 의미(意味)에서 세 가지 민족주의(民族主義)는 보편적인 이슬람 사회가 유럽의 득세(得勢)에 직면해서 자신을 지탱하는 데 실패한 증거로 간주될 수도있다. 처음에 사회 개혁자(社會 改革子)들은 이슬람을 손상시킴이 없이 개혁조치(改革措置)를 채택하려고 했으나 이슬람 세력의 지속적인 쇠퇴(衰退)로 말미암아 후기의 개혁자(改革子)들은 민족주의(民族主義)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민족주의 운동(民族主義 運動)은 아직도 완전한 성숙단계에 이르지 않고 있다.
초기단계(初期段階)에서는 민족주의(民族主義)가 유럽의 자유주의(自由主義)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던 까닭에 유럽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몇개의 이슬람 지역들이 유럽의 지배 아래 들어간 후에 민족주의(民族主義)는 유럽의 득세(得勢)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나타났다.
서양의 민족주의 운동(民族主義運動)처럼, 이슬람세계의 민족주의(民族主義)는 두 중요한 단계(段階)를 거친후에 근대적 민족국가(近代的 民族國家)에 대한 충성이라는 양식으로 성숙(成熟)되었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왕조의 지배 아래 일정한 지역을 가진 국가가 생겼고 왕실의 이해관계(利害關係)가 민족의 이해관계(利害關係)와 일치(一致)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왕조는 '국가이성(國家理性)'으로 합리화 되었고 항상 자신을 외국의 침해로부터 방어하려 했다. 주권이 왕조에서 민족 내지 국민에게 이양된 두번째 단계에서는 국가이익(國家利益)은 인민(人民)의 의지에 의해 결정(決定)되었다. 이같은 발전 단계(發展 段階)에 아랍인들은 아직 도달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결론
유럽의 민족주의(民族主義)와는 달리 이슬람 지역의 (특히 아랍세계의 ) 민족주의는 근본적(根本的)으로 종족적(種族的) 바탕보다는 문화적(文化的) 바탕 위에 자리작고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처럼 이슬람 지역에서도 민족주의는 갈등 관계(葛藤 關係)이 있는 민족(民族)들에 - 이들이 유럽에서는 주로 다른 종족들인데 비해 아랍세계속에서는 종족적.문화적 요소가 작용한다. - 의해 수정(修正)되어왔다. 아랍지역에서는 일부 소수파들, 특히 종교적 소수파들은 다수파의 민족적 단위(民族的 單位)에 대해 본질적(本質的)인 반대 입장(反對立場)을 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종교의 문제에 문화적 차이(文化的 差異)가 추가되었을 때는 전투적(戰鬪的)인 대립 민족(對立民族)이 형성(形成)되는 경향(傾向)이 있다. 이러한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소수파들은 너무나 다양(多樣)하고 혼합(混合)되어 있어 아랍세계는 거의 소수파들의 모자이크를 닮은 감이 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이집트와 비옥한 초생달 지역의 지배층 엘리트들은 민족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전통적 충성관계(忠誠關係)와 제도를 대체하는 실질적(實質的)인 개념(槪念)과 제도(制度)로 받아들였다. 전자(前者) 즉 민족주의는 국가 조직의 바탕으로 되는데 성공했으나 후자(後者)는 다음 장에서 설명할 여러 요인 때문에 전통적인 제도(制度)를 효과적으로 대체하는 이념(理念)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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