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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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본론

Ⅰ. 쇼펜하우어의 자살론

Ⅱ. 쇼펜하우어의 생의 철학(생-철학)과 니체와의 비교
<philosophy of life/Lebensphilosophie>

Ⅲ.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음악의 형이상학

Ⅳ.유럽 불교의 개척자 쇼펜하우어

Ⅴ.쇼펜하우어가 남긴 말과 삽화


결론

본문내용

것에 자신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자살하는 자는 삶을 원하며, 그에게 주어진 조건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삶에의 의지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 현상을 파괴하면서 단지 생명만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삶을 원하면 방해받지 않는 신체의 현존재와 긍정을 원한다." 의지는 불멸하기 때문에 자살은 개체의 소멸을 뜻할 뿐 의지 자체의 완전한 파멸을 뜻하지 않는다.
구원 악의 세계에서의 피난처로 3가지 정도가 있다. 삶에 대한 긍정과 부의 축적 또는 욕구의 달성 따위는 고통을 해소시키는 치료법이 아니다. 욕구인 의지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는 지적인 관조가 필요하다. 지혜의 학문인 철학은 의지를 순화시켜준다. 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사물의 본질인 이데아에 대한 관조를 말한다. 이데아란 인간의 경험을 초월한 것에서부터 도달되어진 것이 아니며, 역으로 경험과 현실에서 출발되어진 것이다. 이데아를 인식한다는 것은 역사의 천재들의 사상과 그들의 예술작품을 의지가 아닌 순수한 인식적 차원에서 감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의 해방은 미적이라 할 만하다.
두 번째의 것은 윤리적 구원이라 말할 수 있다. 동정심과 사랑이 핵심이다. 염세주의 세계관은 크리스트교의 전통과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니다. 크리스트교에서 말하는 원죄란 의지의 긍정으로 인해 발생한 고통이 분명하고 구원은 의지의 부정이다. 따라서 인간 자신의 이기적 욕구는 연민과 동정의 원리와 맞닿은 사랑의 실천으로 무마될 수 있다.
앞의 두 가지 방법이 단지 일시적인 의지로부터의 탈출이므로 근본적인 치유책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은 종교적 구원이다. 의지란 지칠 줄 모르는 것이기에 완전한 의지의 단절이 요구된다. 금욕은 크리스트교뿐만 아니라 동양의 불교에서 실천적 원리이다. 의지의 완전한 멸절만이 의지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의 철학은 서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독특한 사상이었다. 그의 사상의 원천은 플라톤과 칸트와 동양의 불교철학이다. 그의 철학적 위치는 서구 전통의 합리주의적 전통에 반기를 든 대표적이고 선구자적인 비합리주의 철학이다. 헤겔 이후의 현대철학 특히 생철학과 실존철학 그리고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력은 현대라는 명칭이 붙는 모든 작금의 학문과 문화영역에 숨어 있다.
쇼펜하우어 연보
1788년 2월 22일, 독일 단치히에서 태어남.
1793년(5세) 단치히가 프러시아에 병합되자 함부르트로 옮김.
1797년(9세) 부친과 함께 프랑스 여행중에 부친의 친구 브레시마르의 집에 남아 프랑스어를 배움.
1799년(11세) 함부르크에서 철학박사 룬게의 사숙에서 4년간 공부함.
1803년(15세) 자신은 학자가 되기 위해 진학하려고 했으나, 유럽 여행후 상인이 되라는 부친의 권유 에 따라 2년간 여행을 다님.
1805년(17세) 여행을 마치고 함부르크로 돌아와 부친과의약속대로 상인이 되기 위해 견습생활을 함. 이 해에 사고로 부친이 세상을 떠남.
1807년(19세) 모친의 친구로부터 진학 권유를 받고 고타의 김나지움에 입학함.
1808년(20세) 바이마르 김나지움으로 전학함.
1809년(21세) 괴팅겐 대학 의과에 입학함.
1810년(22세) 철학과로 옮겨 자연과학을 배우고 슐체의 강의를 들음.
1811년(23세)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피히테와 슐라이에르마허의 강의를 청강함.
1813년(25세)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으로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음. 이 논문을 읽 은 괴테로부터 색채론 연구에 종사하라는 권유를 받음.
1814년(26세) 드레스덴으로 이사. 그곳 도서관과 미술관 등에서 학문과 예술을 연구함.
1818년(30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완성. 이탈리아를 여행함.
1819년(31세) 4월, 로마를 거쳐 베네치아로 가서 애인과 깊은 관계에 빠짐. 바이마르로 돌아와 괴테 를 방문함.
1820년(32세) 베를린 대학의 강사로 출강함.
1821년(33세) 자서전적 산문<하나의 가지>를 씀.
1822년(34세) 이탈리아를 여행함.
1829년(41세) 논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를 발표함.
1831년(43세) 베를린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으로 옮김.
1832년(44세) <처세술 신탁 교육>을 번역함.
1836년(48세) <자연에 있어서의 의지에 대하여>를 출판함.
1839년(51세)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에서 실시한 현상 논문에 <의지와 자유>가 입선
1841년(53세) <윤리학의 두 가지 문제>를 펴내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속편을 씀.
1846년(58세) 철학박사 율리우스 프라웬쉬테트가 그를 방문, 친교를 맺음.
1847년(59세) 학위논문<충족 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대하여>를 대폭 수정하여 재판 펴냄.
1852년(64세) <노령>씀.
1853년(65세) 존 옥센포드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논한 <독일 철학에 있어서의 우상파괴>를 발표하는 한편, 마인츠를 여행함.
1854년(66세) <자연에 있어서의 의지>와 <시각가 색채에 관하여>를 펴냄. 프라웬쉬테트가< 쇼펜하우 어철학에 관한 서간집>을 공표함.
1855년(67세) 프랑스 화가 쥴 룬테쉬츠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함.
1856년(68세)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쇼펜하우어 철학 핵심의 해설 및 비판>이라는 현상 논문을 모집 함.
1857년(69세) 카를G. 베엘이 그 현사 논문에 당선, <쇼펜하우어 철학의 개요 및 비판적 해설>이라는 표제로 출판됨.
1859년(71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3판을 펴냄.
1860년(72세) 9월 21일, 조반을 마친후 식탁에 앉은 채 죽음.
<참고자료>
두산 대백과 사전
삶과 죽음의 번뇌
-쇼펜하우어 지음, 송영택 옮김- 삼진기획 1987
세계 철학사 -분포 출판사, 임석진 역-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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