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마산의 해방
Ⅰ. 해방공간의 마산
1. 해방의 감격과 해외동포의 귀환
2. 미군정하의 마산
1) 미군 당국의 포고문 발동과 군정 실시
2) 마산 미군정청의 시정
3. 건국준비위원회 마산지부의 결성과 경과
4. 마산에서의 국군 창설
Ⅱ. 대한민국 출범과 한국전쟁
1. 정부수립과 항도 마산
2. 한국전쟁과 향토방위전투
1) 해병대 김성은 부대의 승전
(1) 진동지구의 전투
(2) 통영지구의 전투
2) UN군의 전투
3. 전란기의 마산
1) 병참기지로서의 마山
2) 피난도시로의 마산
Ⅰ. 해방공간의 마산
1. 해방의 감격과 해외동포의 귀환
2. 미군정하의 마산
1) 미군 당국의 포고문 발동과 군정 실시
2) 마산 미군정청의 시정
3. 건국준비위원회 마산지부의 결성과 경과
4. 마산에서의 국군 창설
Ⅱ. 대한민국 출범과 한국전쟁
1. 정부수립과 항도 마산
2. 한국전쟁과 향토방위전투
1) 해병대 김성은 부대의 승전
(1) 진동지구의 전투
(2) 통영지구의 전투
2) UN군의 전투
3. 전란기의 마산
1) 병참기지로서의 마山
2) 피난도시로의 마산
본문내용
있었다. 그리고 함안 서쪽일대에는 제 14연대와 새로이 투입된 1개 연대가 공격중이었고, 사천으로부터 진입한 제 106 연대는 배둔리를 거쳐 동진을 계속하여 8월 26일에는 진동리 서쪽 7km지점에서 공격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마침내 8월 31일 북한군은 미 제 3해병연대에 대한 강력한 정찰행동을 시작으로 야밤에 전전선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적은 대구지역과 중동부전선에서 더 이상의 침공작전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병력을 총동원하여 서남부전선에서 일거에 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아군 병참기지인 마산을 점령한 후 부산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부산과 대구간의 아군보급선을 차단하는데 목적을 둔 작전을 시도한 것이다.
최후의 대공방전은 9월 7일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9월 4일과 7일 두 차례의 전투는 너무나도 치열하였다. 9월 4일 적은 미 제 35연대와 미 제 27연대를 정면으로부터 맹렬한 포격과 집중사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사력을 다한 방어는 2시간이나 계속되었고 피아를 가릴 수 없는 백병전으로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적의 최후의 발악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군 각 연대는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여 적의 침공을 좌절시켰다.
9월 7일 또 한 차례 적의 맹공이 감행되었다. 적은 미 제 35연대와 미 제24연대 진지에 대한 대규모의 포격을 가해 왔다. 또한 적 제 14연대는 미 제 24연대를 공격하여 한때 함안 남쪽의 아군 743고지를 점령했으나, 아군은 즉시 반격하여 고지를 재탈환하고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후방지역에서 준동하는 적의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북한군이 최후의 대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이후 14일까지 계속된 치열한 공방전은 일진일퇴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끝내 9월 15일을 고비로 전세는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북한군은 전력을 다한 대공세에서도 아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자 매우 초조해졌으나 나날이 계속한 공격으로 전병력이 피로에 지쳐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아군 방어선에는 더욱 후속부대가 증강되었고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에 뒤따라 아군은 전전선에서 승의 진격을 계속하였다.
18) "킨"특수기동부대는 긴급한 상황아래서 통일적으로 기동능력을 발휘하고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임시편성되는 부대임
3. 전란기의 마산
1) 兵站基地로서의 馬山
6.25 전쟁 발발 불과 한달만에 북한군이 진주지역까지 침공하게 되자 향토마산은 아군의 승패를 가름할 중요병참기지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1950년 7월 마산 앞바다에는 미군수송선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제 1부두와 월영초등학교에는 미군항만사령부와 제 155육군항만수송부대가 주둔을 하였다. 그리고 이후 전선의 추이에 따라 시내의 중요건물들이 미군작전용으로 또는 육군병원 등으로 사용되었다. 미 육군제25사단은 완월초등학교와 마산중학교(현 마산고)에, 미 해병대의 기갑부대는 馬山商業學校(현 마산상고)에 지휘본부와 그 산하기관을 설치하고 마산지역 일대에 군용막사를 쳤다. 성호초등학교는 首都陸軍病院으로 마산시 청사는 제 2육군병원병동으로 제공되었으며 이외의 많은 학교의 校舍들이 미군 막사로 전상자 병동으로 제공되었다. 중앙부두에는 미 제 533부대가, 양덕동 들판에는 補給分敞이 설치되었다. 가포의 옛 일군 중포병대 건물에 陸軍軍醫學校가 설립되었으며 뒷 날 陸軍醫務基地司令部도 이곳에 설치되었다
군인뿐만이 아니라 서부지구전선에서 철수해 온 경찰병력들도 마산에 집결 재편성되었다. 그리고 8월에 접어들어 북한군이 향토 마산에 대한 총공세를 서두르자 아군은 초비상시의 원활한 작전수행을 위하여 시민에 대한 대피령을 내려 시민들을 웅천·구실 ·가덕도 등지로 분산 대피시키고, 진동∼서북산∼함안∼군북을 잇는 최후방어선을 사수하여 적의 마산침공을 용납치 않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마산시민들도 시내유지들과 언론인들을 주축으로 마산시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강태호)를 구성하여 민간인들의 질서있는 대피를 돕는 한편 군의 전투태세확립을 위한 선무활동에 이바지하였다.
한편 국가의 위기를 앞에 둔 마산의 지식인들과 시내 중학교 영어교사들은 전쟁초기부터 군에 종군하며 미군통역 등으로 승전에 기여했고 많은 젊은 학도들은 용감히 군대에 투신하여 고귀한 피를 흘렸다. 이처럼 마산은 승리를 앞당길 수 있는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국군과 연합군의 희생과 시민의 애국정신이 헛되지않아 끝내 우리의 향토 마산에는 적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2) 피난도시로의 馬山
병참기지화한 마산은 지역적 특성으로 戰禍를 피해 밀려드는 피난민의 행렬로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러나 마산의 인심은 이것을 남의 일로만 돌리지 않았다. 마산시민들은 창동 ·오동동거리로 나와 도로 양편에 주먹밥과 음료수를 마련해 놓고 피로와 허기에 지친 피난민과 국민방위군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갈 곳 없이 찾아드는 난민들에게 거처할 공간을 서슴없이 마련해 주면서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피난민의 갑작스런 증가로 인해 마산은 휴전 후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마산에서 생활 터전을 잡고자하는 각지의 피난민으로 마산은 휴전 후 주민을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섰다. 1946년의 마산 인구 8만 명이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에는 60% 이상 증가하여 13만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기껏 미군의 원조물자나 구호양식에 의존해야 하는 당시의 현실에서 경제적 빈곤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밖에도 휴전 이후 여러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휴전 이후 아직 치안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수물자 폐품불하를 둘러싼 부정사건이나 일부 불량배들에 의한 대형군수품 탈취사건을 비롯하여 무질서에 편승하여 독버섯처럼 자라난 소위 깡패집단이 등장하여 치안을 어지럽히기도 했다. 또한 망국적인 밀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경제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같은 어려움에 비해 다른 한편 크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수많은 문화 · 예술인들이 그들의 피난지로서 마산을 택해 모여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전란중에서나마 창조적인 향토문화예술의 창달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겨 전통적인 문학의 고장 · 예술의 도시인 마산을 이룩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마침내 8월 31일 북한군은 미 제 3해병연대에 대한 강력한 정찰행동을 시작으로 야밤에 전전선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적은 대구지역과 중동부전선에서 더 이상의 침공작전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병력을 총동원하여 서남부전선에서 일거에 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아군 병참기지인 마산을 점령한 후 부산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부산과 대구간의 아군보급선을 차단하는데 목적을 둔 작전을 시도한 것이다.
최후의 대공방전은 9월 7일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9월 4일과 7일 두 차례의 전투는 너무나도 치열하였다. 9월 4일 적은 미 제 35연대와 미 제 27연대를 정면으로부터 맹렬한 포격과 집중사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사력을 다한 방어는 2시간이나 계속되었고 피아를 가릴 수 없는 백병전으로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적의 최후의 발악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군 각 연대는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여 적의 침공을 좌절시켰다.
9월 7일 또 한 차례 적의 맹공이 감행되었다. 적은 미 제 35연대와 미 제24연대 진지에 대한 대규모의 포격을 가해 왔다. 또한 적 제 14연대는 미 제 24연대를 공격하여 한때 함안 남쪽의 아군 743고지를 점령했으나, 아군은 즉시 반격하여 고지를 재탈환하고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후방지역에서 준동하는 적의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북한군이 최후의 대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이후 14일까지 계속된 치열한 공방전은 일진일퇴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끝내 9월 15일을 고비로 전세는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북한군은 전력을 다한 대공세에서도 아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자 매우 초조해졌으나 나날이 계속한 공격으로 전병력이 피로에 지쳐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아군 방어선에는 더욱 후속부대가 증강되었고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에 뒤따라 아군은 전전선에서 승의 진격을 계속하였다.
18) "킨"특수기동부대는 긴급한 상황아래서 통일적으로 기동능력을 발휘하고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임시편성되는 부대임
3. 전란기의 마산
1) 兵站基地로서의 馬山
6.25 전쟁 발발 불과 한달만에 북한군이 진주지역까지 침공하게 되자 향토마산은 아군의 승패를 가름할 중요병참기지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1950년 7월 마산 앞바다에는 미군수송선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제 1부두와 월영초등학교에는 미군항만사령부와 제 155육군항만수송부대가 주둔을 하였다. 그리고 이후 전선의 추이에 따라 시내의 중요건물들이 미군작전용으로 또는 육군병원 등으로 사용되었다. 미 육군제25사단은 완월초등학교와 마산중학교(현 마산고)에, 미 해병대의 기갑부대는 馬山商業學校(현 마산상고)에 지휘본부와 그 산하기관을 설치하고 마산지역 일대에 군용막사를 쳤다. 성호초등학교는 首都陸軍病院으로 마산시 청사는 제 2육군병원병동으로 제공되었으며 이외의 많은 학교의 校舍들이 미군 막사로 전상자 병동으로 제공되었다. 중앙부두에는 미 제 533부대가, 양덕동 들판에는 補給分敞이 설치되었다. 가포의 옛 일군 중포병대 건물에 陸軍軍醫學校가 설립되었으며 뒷 날 陸軍醫務基地司令部도 이곳에 설치되었다
군인뿐만이 아니라 서부지구전선에서 철수해 온 경찰병력들도 마산에 집결 재편성되었다. 그리고 8월에 접어들어 북한군이 향토 마산에 대한 총공세를 서두르자 아군은 초비상시의 원활한 작전수행을 위하여 시민에 대한 대피령을 내려 시민들을 웅천·구실 ·가덕도 등지로 분산 대피시키고, 진동∼서북산∼함안∼군북을 잇는 최후방어선을 사수하여 적의 마산침공을 용납치 않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마산시민들도 시내유지들과 언론인들을 주축으로 마산시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강태호)를 구성하여 민간인들의 질서있는 대피를 돕는 한편 군의 전투태세확립을 위한 선무활동에 이바지하였다.
한편 국가의 위기를 앞에 둔 마산의 지식인들과 시내 중학교 영어교사들은 전쟁초기부터 군에 종군하며 미군통역 등으로 승전에 기여했고 많은 젊은 학도들은 용감히 군대에 투신하여 고귀한 피를 흘렸다. 이처럼 마산은 승리를 앞당길 수 있는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국군과 연합군의 희생과 시민의 애국정신이 헛되지않아 끝내 우리의 향토 마산에는 적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2) 피난도시로의 馬山
병참기지화한 마산은 지역적 특성으로 戰禍를 피해 밀려드는 피난민의 행렬로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러나 마산의 인심은 이것을 남의 일로만 돌리지 않았다. 마산시민들은 창동 ·오동동거리로 나와 도로 양편에 주먹밥과 음료수를 마련해 놓고 피로와 허기에 지친 피난민과 국민방위군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갈 곳 없이 찾아드는 난민들에게 거처할 공간을 서슴없이 마련해 주면서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피난민의 갑작스런 증가로 인해 마산은 휴전 후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마산에서 생활 터전을 잡고자하는 각지의 피난민으로 마산은 휴전 후 주민을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섰다. 1946년의 마산 인구 8만 명이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에는 60% 이상 증가하여 13만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기껏 미군의 원조물자나 구호양식에 의존해야 하는 당시의 현실에서 경제적 빈곤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밖에도 휴전 이후 여러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휴전 이후 아직 치안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수물자 폐품불하를 둘러싼 부정사건이나 일부 불량배들에 의한 대형군수품 탈취사건을 비롯하여 무질서에 편승하여 독버섯처럼 자라난 소위 깡패집단이 등장하여 치안을 어지럽히기도 했다. 또한 망국적인 밀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경제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같은 어려움에 비해 다른 한편 크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수많은 문화 · 예술인들이 그들의 피난지로서 마산을 택해 모여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전란중에서나마 창조적인 향토문화예술의 창달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겨 전통적인 문학의 고장 · 예술의 도시인 마산을 이룩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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