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의 마산의 변화
본 자료는 9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해당 자료는 9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9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일제하 마산의 변화
1. 한일합방 이후 마산의 변화
2. 태평양전쟁과 일제의 만행

Ⅱ. 마산의 3·1 민족운동
1. 3·1 마산의거
2. 진동면 고현시장 의거
3. 삼진 의거
4. 청산리 승전보 배포사건

Ⅲ. 마산지역의 대중운동과 민족운동의 발전
1. 민족교육운동과 학생운동
2. 노동운동
3. 사회운동

본문내용

확산시켜 나갔다. 그러나 신간회는 창립 직후부터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전국대회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중앙본부의 활동도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신간회는 중앙본부의 간부들이 지방을 순회강연하고, 또 지회활동을 통해 농민 ·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지도하는 한편,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면서 민중의 정치의식을 높여 나갔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 결과 신간회는 군 단위의 지회 141개와 회원 4만 여명의 조직으로 성장해 갔고 일본의 동경과 오오사카에도 지회가 조직되었다.
1927년 7월 20일 마산에서도 신간회 지회가 설립되었다. 마산지회에는 김용환 · 명도석 · 이형재 · 김철두 등 민족주의자들과 여 해 · 김명규 · 김형두 등 사회주의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마산지회에는 지회가 설립되기까지의 기간 동안에 있었던 노동야학운동과 3 · 1 운동 및 청년 · 노동 ·사상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들이 거의 모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신간회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간부진에는 사회주의계 인물들의 진출이 점점 늘어났지만, 민족주의운동의 중견들인 김용환 · 명도석 · 이형재 등과의 유대는 깨어지지 않았다. 마산지회는 언론 · 집회 · 출판 · 결사의 자유 획득, 조선어 교육의 실현, 토지개량회사의 박멸, 노동 · 농민 · 청년 · 소년 · 부인 · 형평운동의 촉진등을 정책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지회가 설립된지 5개월이 지난 1927년 12월 말의 지회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안건 (회원훈련에 관한 건, 세칙규정의 건, 본부대회 건의안 작성의 건, 재만동포옹호동맹에 관한 건, 마산 사립의신여학교 동맹휴교 사건에 대한 조사검토에 관한 건)이 토의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속에서 대부분 지회의 경우도 그러하였지만 마산지회도 정책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웠으며 또한 신간회 창립시 표방한 정치적 투쟁으로 나아가기도 힘들었다. 마산지회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중앙본부에 회장제를 집행위원 장제로 개정할 것, 각 지회는 반으로 조직할 것, 기관지를 발행할 것 등의 규약 개정안을제출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신간회는 일제의 교묘하고도 끈질긴 탄압과 그 주도세력의 인식상 · 실천상의 한계와 차이로 말미암아 활발한 반일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채 1931년 5월 해체되고 말았다. 1931년 5월 15일 신간회의 마지막 전체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마산지회는 비해소를 주장하는 건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신간회의 해산안이 가결되어 신간회는 창립한지 4년만에 해체되기에 이른다.
4) 馬山靑年聯合會와 馬昌 사회단체협회의 결성
일제하 사회운동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서 신간회 이외에도 일제의 탄압에 공동대처하고 효율적인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비슷한 성격의 단체들이 협의회 혹은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잇따라 결성되었다. 1925년 9월 26일 馬山靑年會 · 馬山修養靑年會 · 魚市場共助靑年會 · 衡平靑年會의 4개 단체가 연합하여 張在輪 · 팽삼진 · 여 해 · 김종신 · 김귀동 · 李鳳壽 · 김기호 · 朴連守 등을 중심으로 한 마산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 청년연합회는 정우회선언 이후 민족운동의 전국적인 방향전환기를 맞아 1927년 4월 馬山靑年同盟으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또 같은 맥락에서 마산지역에 산재해 있는 각종 사회단체들은 상설적인 협의회의 구성을 필요로 하여 이듬 해인 1928년에 창원지역 사회단체들과도 연합하여 馬山社會團體協會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馬昌勞動聯盟·마산청년동맹·昌原衡平社 · 신간회 창원지회· 진해청년회 · 鎭海小作會 ,昌原東面合城會 · 창원여자청년동맹 · 南面農民組合 · 남면청년동맹 등 16개 사회단체가 참여하였다. 창립대회를 창원청년회관에서 개최한 마창사회단체연합회는 준비위원 이주만의 개회선언과 취지설명 및 여 해의 경과보고가 있은 후, 이에 동조한 16개 단체의 대의원 66명이 참석하여 李周洪· 주병화· 崔喆都· 金鎭錫· 여 해 · 설관수 · 김귀동 등 7명의 임시집행부를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어 강령 및 규약을 통과시키고 만세삼창으로 폐회하였다. 이 강령에서 사회단체협의회는 "우리는 마산 ·창원간의 조국해방운동전선의 긴밀한 유기적 연락을 도모하고 구국을 위하여 항일에 앞장선다. "고 결의 하였다.
5) 學生秘密結社體 馬中獨立團
극도의 탄압이 가중되는 일제말기에 이곳 마산지역에서도 깨어있는 청년 학생들에 의해서 학생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투쟁을 하기위해서는 과격하고 무모한 행동보다는 조직적인 힘을 기르는 한편, 정신적 뒷받침이 될 이념무장을 강화해 나가는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자각을 통해 출발 1944년 6월에 결성된 마중독립단을 대표적인 학생운동으로 꼽을 수 있다.
독립단은 당시 5년제인 마산중학교(현 마고전신) 2, 3, 4학년 학생의 주동으로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학교지하 창고를 비밀아지트로 삼아 해외독립운동 상황과 국내외 정세등의 정보를 입수하는 등 각종 활동을 펼쳐나갔다. 조직 구성원으로서는 박기병, 박후식, 감영재, 조이섭, 강성중, 박성수(이상 8회) 김학득, 강순중(이상 7회) 이주국(6회) 등이었다.
이들은 ①조선의 역사를 공부하고 ②한글을 배우며 ③뜻이 통할 수 있는 성격이 심중한 학우를 엄밀히 포섭하며 ④가능한 시기를 택해 해외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한다는 행동강령을 내세우고 포섭 대상자를 물색하는 일방, 접촉을 시도해나갔다.
이러한 접촉과정에서 비밀이 탄로되어 7월 중순 박기병과 김학득이 일본경찰에 붙들리는 바람에 비밀결사체인 마중독립단은 어이없이 와해되고 말았다.
특히 김학득은 주모자로 지목되어 외부와의 관련여부를 추궁당하면서 모진 고문 끝에 몇 차례 실신을 하는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들중 이주국, 박성수는 마산경찰서에서 2개월간의 구류로 풀려나왔지만 나머지 7명은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마산검사국에 송치되어 마산형무소 미결감방에서 구금되었다. 그러다 8·15의 광복을 맞게됨으로써 13개월의 옥고에서 풀려나는 감격을 보게 된 것이다.
마중독립단은 앞서 열거한대로 민족자주독립쟁취를 위해 학생스스로 힙을 규합하여 투쟁의 길을 나서겠다는 열혈 청년들의 구국단체였음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있다.

키워드

일제,   마산,   변화
  • 가격3,300
  • 페이지수26페이지
  • 등록일2002.12.26
  • 저작시기2002.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686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