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말
본론
1.불행의 시대
2.콘스탄츠 공의회
3.루터와 종교개혁
4.츠빙글리와 인문주의적 종교개혁
5.종교개혁의 정치화
6.영국의 종교개혁
맺음말
본론
1.불행의 시대
2.콘스탄츠 공의회
3.루터와 종교개혁
4.츠빙글리와 인문주의적 종교개혁
5.종교개혁의 정치화
6.영국의 종교개혁
맺음말
본문내용
상세하게 다룬다. 그런데 에드워드 6세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헨리 8세에게 이혼당한 캐서린의 딸 메리 1세가 53년 왕위에 오르자 재차 카톨릭화가 실시되었다. 메리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고 이단단속법(異端團束法)을 부활시켰으며 크렌머 등 고위성직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을 처형하였으므로 <피에 굶주린 메리>란 별명을 얻었다. 다음의 엘리자베스 1세는 중도(中道)를 택하여 영국국교회
) Church of England:영국의 국가교회. 2세기 영국의 그리스도교에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16세기 종교개혁 뒤 생긴 성공회의 모체가 되는 교회이다. 종교개혁 신앙의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중세의 영국교회와 앵글로색슨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에 교회행정·전례·관습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틀을 귀중히 여기며 보존하고 있다.
를 확립시켰다. 59년 수장령과 예배통일법을 제정하였는데, 수장령은 헨리 8세 때와 마찬가지로 왕권을 교회보다 우위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국왕을 성속(聖俗) 양면에서의 최고통치자라고 규정하여 국왕의 사제적(司祭的) 권위는 약화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받은 제임스 1세는 카톨릭 교도들을 두둔하여 많은 혜택을 주고, 예식에 있어서도 카톨릭 예식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비국교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60년대부터 비난의 뜻을 담아 청교도라고 불렸던 칼뱅교도는 교회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 행사에 동의하지 않고 국교회 내부에 장로회제도의 설립을 꾀하였다. 또한 단일교회의 자율성을 주장한 회중파(會衆派)가 탄생하고 그 중 분리파는 국교회로부터 분리·독립된 교회조직을 지향하였다. 그 때문에 국교기피자처벌법(1593)의 제정에 의하여 철저하게 탄압받았다.
) 가혹한 탄압은 고위층을 형성하였던 귀족들과 학자들, 상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민의 길을 떠났다. 이와 같은 고급 인력의 해외 유출은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심한 타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청교도를 모두 탄압할 수는 없었으며 청교도혁명에 의해서 영국국교회는 크게 흔들렸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심을 회복시킴으로서 종교적 개인주의를 수립하였다. 또한 성서지상주의는 책과 인쇄술을 발달시켜 사회 문화적 측면의 교육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것은 성직자의 교리문답을 강화시켰고, 학교도 많이 생겨났다. 또한 지방어도 많이 발전했다. 왕권의 강화로 인한 국가의 교회간섭의 정당화는 교회를 약화시켰고, 절대주의 국가를 출현에 이바지 했다. 현실에서의 적극적 이윤 추구는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가족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 이유는 공동체 속에서 정신적 순결유지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참고 문헌
올리비에 크리스텡(Olivier Christin) 著, 채계병 譯, 1998 〈종교개혁-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시공사
오연수 著, 2000 〈종교개혁사〉, 한글
Norman F.Cantor , Samuel Berner 共編, 陳元淑 譯, 1990 〈西洋近代史의 諸問題〉, 계명대학교 출판부
) Church of England:영국의 국가교회. 2세기 영국의 그리스도교에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16세기 종교개혁 뒤 생긴 성공회의 모체가 되는 교회이다. 종교개혁 신앙의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중세의 영국교회와 앵글로색슨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에 교회행정·전례·관습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틀을 귀중히 여기며 보존하고 있다.
를 확립시켰다. 59년 수장령과 예배통일법을 제정하였는데, 수장령은 헨리 8세 때와 마찬가지로 왕권을 교회보다 우위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국왕을 성속(聖俗) 양면에서의 최고통치자라고 규정하여 국왕의 사제적(司祭的) 권위는 약화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받은 제임스 1세는 카톨릭 교도들을 두둔하여 많은 혜택을 주고, 예식에 있어서도 카톨릭 예식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비국교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60년대부터 비난의 뜻을 담아 청교도라고 불렸던 칼뱅교도는 교회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 행사에 동의하지 않고 국교회 내부에 장로회제도의 설립을 꾀하였다. 또한 단일교회의 자율성을 주장한 회중파(會衆派)가 탄생하고 그 중 분리파는 국교회로부터 분리·독립된 교회조직을 지향하였다. 그 때문에 국교기피자처벌법(1593)의 제정에 의하여 철저하게 탄압받았다.
) 가혹한 탄압은 고위층을 형성하였던 귀족들과 학자들, 상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민의 길을 떠났다. 이와 같은 고급 인력의 해외 유출은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심한 타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청교도를 모두 탄압할 수는 없었으며 청교도혁명에 의해서 영국국교회는 크게 흔들렸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심을 회복시킴으로서 종교적 개인주의를 수립하였다. 또한 성서지상주의는 책과 인쇄술을 발달시켜 사회 문화적 측면의 교육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것은 성직자의 교리문답을 강화시켰고, 학교도 많이 생겨났다. 또한 지방어도 많이 발전했다. 왕권의 강화로 인한 국가의 교회간섭의 정당화는 교회를 약화시켰고, 절대주의 국가를 출현에 이바지 했다. 현실에서의 적극적 이윤 추구는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가족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 이유는 공동체 속에서 정신적 순결유지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참고 문헌
올리비에 크리스텡(Olivier Christin) 著, 채계병 譯, 1998 〈종교개혁-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시공사
오연수 著, 2000 〈종교개혁사〉, 한글
Norman F.Cantor , Samuel Berner 共編, 陳元淑 譯, 1990 〈西洋近代史의 諸問題〉, 계명대학교 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