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모든 것] 만해 한용운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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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생애 (1879. 8.29~1944. 6.29)

1. 인물 소개와 배경 묘사
2. 역사의 새벽을 예감하는 시
3. 시집 `임의 침묵` 탈고
4. 독립 선언과 독립 만세
5. 선생의 의연한 독립 의지
6. 옥중 `독립 선언의 서` 작성
7. 선생의 정신적 기백과 여유
8. 조국애의 신념과 용기 고취
9. 조국의 독립에 대한 굳은 의지
10. 출옥 후의 청소년 계몽 활동
11. 맑은 심성과 빛나는 의기
12. 선생의 검소한 생활과 참을성
13. 선생의 강직한 절개와 지조
14. 시집 `임의 침묵` 저술
15. `임의 침묵`의 해석과 의의
16. 선생의 지조, 의리와 인정미
17. 선생의 죽음
18. `임의 침묵` 뒷부분
19. 선생의 조국애와 지절

참고자료

본문내용

中),또 한번견성대각(見性大覺)을 하였다고 한다.
40세 때에는 월간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기 시작하였고, 심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완성하였다.
41세가 되는 기미년(己未年),일본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이 2월 8일 독립선언을 한데 이어 국내에서도 천도교(天道敎)의 손병희(孫秉熙),최린(崔麟)등이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최린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한 개의 종교단체가 할 것이 아니라 각계 인사를 망라해서 거족적인 행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33인의 민족대표로 독립을 선언하는데 주동적 활동을 하였다.
그는 선언서에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첨가하였고 명월관 지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사식(私食)과 변호인(辯護人)을 거부하고 3년의 형기를 마치는 중에 옥중에서 '독립의 서(獨立의 書)'를 써 독립선언서와 같이 쌍벽을 이루는 명문을 남겼다.
47세가 되던 해에 다시 설악산에 들어가 『님의 침묵』이라는 88편으로 된 시집을 탈고(脫稿)하였다.
48세가 되던 해에는 불교전문대학교에서 교수직의 교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 만당(卍黨)등 지하단체를 조직하고 불교의 유신과 항일투쟁을 하다가 여러 차례에 걸쳐 투옥되었다.
49세에는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 겸 경성지부장에 선임되었고 52세가 되던 해에는『불교』라는 월간잡지사에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55세가 되던 해에는 다시 입산하였다가 57세가 되던 해에 보령(保寧)출생의 유숙원(兪淑元)과 재혼하였다. 한편으로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그리고 '후회(後悔)'라 는 장편소설을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다.
이 해에 재혼한 유숙원이 딸 영숙(英淑)을 낳았다.
60세에 장편소설 '박명(薄命)'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는데 이 해에 유씨부인이 66세로 별세하여 망우리 산정에 안장하였다.
64세때에 일제가 우리의 청년 학도들을 학도병이나 지원병으로 데려가는 것을 반대하였고 배급하는 쌀을 받지 않았다.
66세가 되는 5월 9일 심우장(尋牛莊)에서 입적(入寂)하기까지 전 생애를 통하여 일제와의 추호의 타협도 없었고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묘지는 망우리 정상에 유씨와 같이 쌍봉으로 안장되었다.
참고자료:::
1. 한용운연구?, 박노준인권환, 통문관, 1990.
2. 님의 침묵―전편해설, 송욱, 과학사, 1973.
3. 한용운문학연구 1, 김재홍, 일지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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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3.05.15
  • 저작시기2003.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3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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