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부 원시고대
2부 중세
2부 중세
본문내용
)와 야마또(大和)에서 두 파 전란이 장기화되었다
야마나 모찌또요는 요시나리를, 호소까와 카쯔모또는 마사나가를 지지했다. 1467년 1월에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전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전란에 휩쓸려 들어간 다이묘오(大名)은 야마또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사정을 각기 자기 지역에 안고 있었다. 1473년 양군의 총수 야마나 소오젠과 호소까와 카쯔모또가 연이어 사망함으로써 쿄오또를 무대로 한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대란에 참가한 군사력에는 지역지배를 강화해 나가고 있던 코꾸진(國人)영주층, 촌락에서 새로이 사무라이 신분을 주장하기 시작한 지자무라이층, 아시가루처럼 벌이를 찾아다니는 다양한 민중 등 세 계층이 있었다.
이 무렵에는 또 도잇끼의 지도자였던 유력 묘오슈우층이 지자무라이로서 일반농민들과의 차이를 확대해 나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코꾸진은 카마꾸라 시대의 지또오 고께닌과 같은 계통의 재지영주인데, 남북조내란 이후 한 곳으로 소령을 집중시켜 할거하게 되면서 때로는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동시에 쿠니를 공동의 세계로 간주하여 그를 지키기 위해 연대하는 모순된 행동을 취하였다.
지자무라층의 소오고오 연합은 코꾸진영주의 코꾸진잇끼와 농민의 소오손 결합 등 양쪽 모두와 관련을 가지면서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1485년 12월 야마시로국(山城國) 남부의 코꾸진이 집회를 열고 그곳에서 교전중이던 하따께야마 마사나가와 요시나리의 군대에 철수를 요구하여 그것을 실현시켜 버렸다.
이것을 기록한 남도(南都) 다이죠오인의 진손의 일기에는 위로 60세 아래로 15세의 토민(土民)들이 코꾸진집회(國人集會)에 군집하였다라고 썼다.
평등성원리에 입각한 잇끼권력은 코꾸진영주가 소령지배를 상호 보증하는 코꾸진잇의 형태로 남북조시대 이래 때때로 등장했지만, 이들은 슈고 다이묘오와의 관계가 개선되어 영주로서의 계급적 이익이 보증되면 단기간에 해산했다.
1488년 6월 카가국의 잇꼬오잇끼가 슈고 토가시 마사찌까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잇꼬오잇끼의 기반은 농민의 소오손 결합이었지만 몇 개의 촌락을 하나로 합친 소오고오에 해당하는 쿠미, 또 그 위에 5,6개의 쿠미로 구성되는 군(郡)이 있으며 조직은 코꾸진 문도나 유력승려가 차지했다.
1487년 쇼오군 요시히사는 사사본소령의 회복을 대의명분으로 내걸고, 오오미의 슈고 롯까꾸 타가요리를 토벌하기 위해 다이묘오들에게 호령을 내리고 스스로도 출진했다. 그러나 장기전이 되어 요시히사는 사망하고 요시끼도 오오미 친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07년 호소까와 마사모또는 스미모또와 스미유끼 두 양자 사이에 항쟁 와중에 암살 당하고, 스미유끼를 타도한 제3양자 타까꾸니와 스미모또 등 2대 파벌이 성립되었다.
1532년 하루모또가 미요시 모또나가를 타도하기 위해 홍간지에 도움을 요청한 것 때문에 키나이 일원에 잇꼬오잇끼가 대두했다. 그 후, 법화잇끼가 대두하여홍간지를 불태웠고 자립하여 쿄오또를 제압했다. 이로써 명실공히 호소까와 정권에서 미요시 정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가 해체되고 미요시산닌슈우와 마쯔나가 히사히데의 항쟁이 계속되는 사이에오다 노부나가의 상경을 맞이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군웅할거(群雄割據)라고 일컬어지는 셍고꾸시대이지만 16세기 전반은 다이묘오들이 경제적으로 분국을 형성하려고 한 시기이며, 이는 1550년경에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마가와 요시모또를 운 좋게 무너뜨린 후 급성장을 거듭한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천재성뿐 아니라 시대의 기세를 표현하고 있다.
다이묘오·코꾸진·농민 등 여러 계층이 지역의 활동무대를 확보하고 그 거점을 지키기 위해 구축한 각종 성곽은 격화됨에 따라 증가했다.
각 계층은 영역지배의 실력에 따라 각기 성을 쌓았다. 코꾸진 영주는 산성과 산록의 관이 짝을 이루는 성곽을, 지지무라이는 인접한 구릉을 깍아 만더 관성을, 소오손 농민들은 환호(環豪)촌락을 쌓았다.
영국 내부만 보자면, 축성의 자유경쟁 시대는 개별영주차원에서 막을 내렸다. 다이묘오 차원에서 막을 내린 것은 천하인이 등장한 이후이다.
다이묘오 영국간의 경쟁이 한창일 때도 그 사이에는 소오꼬꾸잇끼 내지 그 모체가 되는 지역적인 잇끼가 각기 등장했다.
코야마또의 잇끼슈우는 '코야마또슈우'라는 이름으로 다이묘오 키따바따께씨의 군사력 중 일익을 담당했다. 그들 대부분은 코야마또슈우처럼 소오고오 전체의 의사에 의거하는 잇끼였을 가능성이 있다.
1503년 이즈미국 히네노 장원 이리야마다촌(入山田村)이라는 산촌과 이즈미산맥 너머의 키이국 이께다항 사이에서 소송이 벌어졌다.이는 유력 촌민이 쿠니 밖 이께다향의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벌채하여 재를 팔았는데 그것이 발각되어, 보복조치로 소송이 걸린 것이다. 이는 특정 토이야와의 거래 관계를 강화해 나간 사실을 알려주는 사례다.
토이야를 매개로 하는 배타적인 교역관계만 있었던 것으 아니다. 이리야마다 촌민은 근처 사노의 5일장에 가서 다양한 교역과 교류를 했다.
영주 경영의 시장이 도시화를 이룬 경우는 있어왔지만 후세에는 계승되지 않았다 현재에는 지역 사회의 사람들이 긴밀히 협조하여 좌(座)와 시(市)이라는 교역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자연스러운 변천을 따라 더욱 큰 교역권이 형성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쿄오또가 자리하였다.
쿄오또 주민은 유력상인인 쬡오쇼우를 중심으로 기옴마쯔리의 호꼬마찌의 기워이 되는 다수의 쬡오 공종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연합하여 카미교오·시모교오의 소오쬡오 공종체를 결성했다.
셍고꾸다이묘오(戰國大名)의 죠오까마찌(城下町)도 지역사회의 활기를 조직하려고 했지만, 상공업자 지구와 시정(市町)이 분리되어 통일성이 없었다.
14세기에 쿄오또 기옴마쯔리의 쥰꼬오가 화려해졌다. 춤과 연극장치가 대규모의 쯔꾸리야마와 호꼬로 발전했다. 인사상의 반목이 있기도 했지만 기옴마쯔리가쬡오슈우의 마쯔리가 되었다.
이리야마다촌을 구성하는 4개의 소촌은 여름 마쯔리에 각기 후류우 팀을 내어 촌 내를 순회하고 마지막에는 소오쟈인 타끼미야 신사에 집한하여 사루가꾸노오를 봉납했다.
생고꾸(戰國)의 동란은 민중에 참화를 가져다준 반면, 영주나 권문사사(權門寺社)의 제례로부터 소오손·소오고오의 제례로의 전환을 촉진시켰다.
야마나 모찌또요는 요시나리를, 호소까와 카쯔모또는 마사나가를 지지했다. 1467년 1월에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전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전란에 휩쓸려 들어간 다이묘오(大名)은 야마또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사정을 각기 자기 지역에 안고 있었다. 1473년 양군의 총수 야마나 소오젠과 호소까와 카쯔모또가 연이어 사망함으로써 쿄오또를 무대로 한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대란에 참가한 군사력에는 지역지배를 강화해 나가고 있던 코꾸진(國人)영주층, 촌락에서 새로이 사무라이 신분을 주장하기 시작한 지자무라이층, 아시가루처럼 벌이를 찾아다니는 다양한 민중 등 세 계층이 있었다.
이 무렵에는 또 도잇끼의 지도자였던 유력 묘오슈우층이 지자무라이로서 일반농민들과의 차이를 확대해 나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코꾸진은 카마꾸라 시대의 지또오 고께닌과 같은 계통의 재지영주인데, 남북조내란 이후 한 곳으로 소령을 집중시켜 할거하게 되면서 때로는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동시에 쿠니를 공동의 세계로 간주하여 그를 지키기 위해 연대하는 모순된 행동을 취하였다.
지자무라층의 소오고오 연합은 코꾸진영주의 코꾸진잇끼와 농민의 소오손 결합 등 양쪽 모두와 관련을 가지면서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1485년 12월 야마시로국(山城國) 남부의 코꾸진이 집회를 열고 그곳에서 교전중이던 하따께야마 마사나가와 요시나리의 군대에 철수를 요구하여 그것을 실현시켜 버렸다.
이것을 기록한 남도(南都) 다이죠오인의 진손의 일기에는 위로 60세 아래로 15세의 토민(土民)들이 코꾸진집회(國人集會)에 군집하였다라고 썼다.
평등성원리에 입각한 잇끼권력은 코꾸진영주가 소령지배를 상호 보증하는 코꾸진잇의 형태로 남북조시대 이래 때때로 등장했지만, 이들은 슈고 다이묘오와의 관계가 개선되어 영주로서의 계급적 이익이 보증되면 단기간에 해산했다.
1488년 6월 카가국의 잇꼬오잇끼가 슈고 토가시 마사찌까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잇꼬오잇끼의 기반은 농민의 소오손 결합이었지만 몇 개의 촌락을 하나로 합친 소오고오에 해당하는 쿠미, 또 그 위에 5,6개의 쿠미로 구성되는 군(郡)이 있으며 조직은 코꾸진 문도나 유력승려가 차지했다.
1487년 쇼오군 요시히사는 사사본소령의 회복을 대의명분으로 내걸고, 오오미의 슈고 롯까꾸 타가요리를 토벌하기 위해 다이묘오들에게 호령을 내리고 스스로도 출진했다. 그러나 장기전이 되어 요시히사는 사망하고 요시끼도 오오미 친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07년 호소까와 마사모또는 스미모또와 스미유끼 두 양자 사이에 항쟁 와중에 암살 당하고, 스미유끼를 타도한 제3양자 타까꾸니와 스미모또 등 2대 파벌이 성립되었다.
1532년 하루모또가 미요시 모또나가를 타도하기 위해 홍간지에 도움을 요청한 것 때문에 키나이 일원에 잇꼬오잇끼가 대두했다. 그 후, 법화잇끼가 대두하여홍간지를 불태웠고 자립하여 쿄오또를 제압했다. 이로써 명실공히 호소까와 정권에서 미요시 정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가 해체되고 미요시산닌슈우와 마쯔나가 히사히데의 항쟁이 계속되는 사이에오다 노부나가의 상경을 맞이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군웅할거(群雄割據)라고 일컬어지는 셍고꾸시대이지만 16세기 전반은 다이묘오들이 경제적으로 분국을 형성하려고 한 시기이며, 이는 1550년경에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마가와 요시모또를 운 좋게 무너뜨린 후 급성장을 거듭한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천재성뿐 아니라 시대의 기세를 표현하고 있다.
다이묘오·코꾸진·농민 등 여러 계층이 지역의 활동무대를 확보하고 그 거점을 지키기 위해 구축한 각종 성곽은 격화됨에 따라 증가했다.
각 계층은 영역지배의 실력에 따라 각기 성을 쌓았다. 코꾸진 영주는 산성과 산록의 관이 짝을 이루는 성곽을, 지지무라이는 인접한 구릉을 깍아 만더 관성을, 소오손 농민들은 환호(環豪)촌락을 쌓았다.
영국 내부만 보자면, 축성의 자유경쟁 시대는 개별영주차원에서 막을 내렸다. 다이묘오 차원에서 막을 내린 것은 천하인이 등장한 이후이다.
다이묘오 영국간의 경쟁이 한창일 때도 그 사이에는 소오꼬꾸잇끼 내지 그 모체가 되는 지역적인 잇끼가 각기 등장했다.
코야마또의 잇끼슈우는 '코야마또슈우'라는 이름으로 다이묘오 키따바따께씨의 군사력 중 일익을 담당했다. 그들 대부분은 코야마또슈우처럼 소오고오 전체의 의사에 의거하는 잇끼였을 가능성이 있다.
1503년 이즈미국 히네노 장원 이리야마다촌(入山田村)이라는 산촌과 이즈미산맥 너머의 키이국 이께다항 사이에서 소송이 벌어졌다.이는 유력 촌민이 쿠니 밖 이께다향의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벌채하여 재를 팔았는데 그것이 발각되어, 보복조치로 소송이 걸린 것이다. 이는 특정 토이야와의 거래 관계를 강화해 나간 사실을 알려주는 사례다.
토이야를 매개로 하는 배타적인 교역관계만 있었던 것으 아니다. 이리야마다 촌민은 근처 사노의 5일장에 가서 다양한 교역과 교류를 했다.
영주 경영의 시장이 도시화를 이룬 경우는 있어왔지만 후세에는 계승되지 않았다 현재에는 지역 사회의 사람들이 긴밀히 협조하여 좌(座)와 시(市)이라는 교역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자연스러운 변천을 따라 더욱 큰 교역권이 형성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쿄오또가 자리하였다.
쿄오또 주민은 유력상인인 쬡오쇼우를 중심으로 기옴마쯔리의 호꼬마찌의 기워이 되는 다수의 쬡오 공종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연합하여 카미교오·시모교오의 소오쬡오 공종체를 결성했다.
셍고꾸다이묘오(戰國大名)의 죠오까마찌(城下町)도 지역사회의 활기를 조직하려고 했지만, 상공업자 지구와 시정(市町)이 분리되어 통일성이 없었다.
14세기에 쿄오또 기옴마쯔리의 쥰꼬오가 화려해졌다. 춤과 연극장치가 대규모의 쯔꾸리야마와 호꼬로 발전했다. 인사상의 반목이 있기도 했지만 기옴마쯔리가쬡오슈우의 마쯔리가 되었다.
이리야마다촌을 구성하는 4개의 소촌은 여름 마쯔리에 각기 후류우 팀을 내어 촌 내를 순회하고 마지막에는 소오쟈인 타끼미야 신사에 집한하여 사루가꾸노오를 봉납했다.
생고꾸(戰國)의 동란은 민중에 참화를 가져다준 반면, 영주나 권문사사(權門寺社)의 제례로부터 소오손·소오고오의 제례로의 전환을 촉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