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대]-친일파에 대하여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인문대]-친일파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Ⅰ.서론


Ⅱ.본론


♠친일인명사전이란 무엇인가

1.불행의 근원, 민족 반역자 그리고 식민잔재

2.민족 단결의 요체는 민족반역자의 심판에 있다.

3.왜 친일인명사전인가

4.친일인명사전의 의의와 효능


♠일제의 대한침략기(1876∼1904)의 `친일`의 논리와 실태

1.`친일`과 `친일파`의 역사적 개념

2.근대화의 모델 문제와 `친일`개화파

3.`삼국공영론`의 논리적 전환

4.일본의 문화정책과 유학생 파견


♠지배체제 구축기(1905∼1919)의 친일파와 그 논리

1.일제의 동화주의적 식민정책론

2.친일파의 육성


♠민족말살기 일제의 황민화정책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과 협력의 논리

1.민족말살기 때의 친일파

2.민족주의자들의 성향과 변절

3.개량주의 민족주의자들의 최후

4.종교적 믿음마저 배신한 종교계의 전향


Ⅲ.결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였거나, 만주침략 이후 이미 심정적으로는 변절하였으나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았던 자들로, 1937년 이후 황민화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일제의 정신적, 신체적 억압과 협박을 받는 가운데 폐쇄된 정보에 의한 그릇된 정세판단 아래 사상솨 신념을 포기하고 이른바 확실히 '전향'을 표방하여 자신의 영달을 꾀하며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이들이다. 대표적인 이로는 박인덕, 장덕수, 정인과, 정춘수, 이종린, 윤치영, 백관수, 신흥우, 유억겸, 주요한, 김활란 등이다.
3.개량주의 민족주의자들의 최후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된 이래 민족주의 계열로서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한 단체로는 동우회와 흥업구락부가 있었다. 동우회는 미주 흥사단의 지부인 상해원동임시위원부의 지소인 수양동우회가 1929년 11월에 수양이라는 두 자를 빼고 개칭된 것이다. 원동위원부가 도산의 직접 주도하에서 혁명운동과 흥사단운동을 아울러 전개한 데 비하여 국내 동우회는 실력양성과 개조운동이 주된 활동이었다.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수양동우회 내부에서는 '수양단체로서는 청년투사를 획득할 수 없으므로 실력양성주의를 버리고 정치적 훈련투쟁을 거쳐 직접적 혁명운동을 단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수렴되는 등 내부에서부터 혁명운동으로의 전환을 강력히 요구하였던 것이다.
당시 동우회는 학계, 언론계, 산업계 등에서 확약하는 부르주아계층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회원으로 가입하였지만 이들 부르주아계층은 일본 식민지통치를 보완해 주는 계층이었으므로 일제는 그들을 큰 위협세력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대륙침략의 정세와 황민화운동 시기에 좀더 확실하게 전향을 보장받고자 동우회를 "저 상해임시정부 기타의 민족주의단체와 같이 급진적은 아닐지라도 진정 조선독립을 열망하는 동지를 획득하고 그 실력을 양성하고 영구적 사업으로 활동을 계속하여 왔으며……"라고 운운하며 동우회를 신간회 해소 이후 가장 유력한 단체로 부각시켜 억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우회가 표면 수양단체를 가장하여 교묘히 당국의 취체를 면하고 이면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집요한 운동을 계속해 왔다고 경계하면서 탄압의 구실로 1936년에 총독부에서는 동우회 이사회 소집통지서를 일본어로 쓰고 회의도 일본어로 진행하라고 요구하였다. 동우회에서는 일제의 태도 변화에 대한 대책을 숙의하는 과정에서 1937년 6월에 동우회 회원들이 총검거되었다.
흥업구락부는 YMCA 총무인 신흥우가 1921년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제1회 태평양교육대회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었을 때 이승만을 만나 동지회의 자매단체를 구상하였다가 1925년에 가서야 이상재, 장두현, 이갑성, 유억겸, 오화영, 구자옥, 신흥우가 모여 조직한 결사이다. 신흥우 신문조서에 의하면 "흥업구락부라는 명칭에서 대업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즉 조선독립의 의미"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실력에 의하여 어떤 시기에 조선의 독립을 실현을 조직 목적으로 하였다.
흥업구락부의 주요 회원은 종교계, 교육계, 언론계의 인물들로 동우회 회원들과 별다른 구분이 없는 성격상 동일 집단이다. 그러나 이 양 단체는 각각 안창호 계열의 미주 흥사단과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를 모단체로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뚜렷한 노선상의 혹은 방략상의 차이없이 대결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양 단체의 반목은 지식분자들의 자유주의, 개인주의의 한계를 보게 한다. 검거된 동우회와 흥업구락부 단원들은 모진 고문과 위협, 그리고 일제의 회유에 굴복하여 전향을 선언하였다.
4.종교적 믿음마저 배신한 종교계의 전향
3·1운동이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전개된 것으로 보아도 종교교단의 지도력과 조직력을 능가하는 결사는 없었다. 일제는 3·1운동이후 한국 민중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종교계의 친일화 획책에 심혈을 기울여 투자하였다.
종교계의 대량 전향은 1937년 천도교 인사 7천명이 검거되었다가 전쟁협력을 약속한 것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계는 1938년 동우회와 흥업구락부원의 전향이 기독교인들의 전향을 부추겼으며 이들의 경쟁적인 일본교회 종속화 과정은 바로 한국 기독교의 부끄러운 역사이다.
윤치호, 양주삼 등이 지도자로 있었던 조선기독교연합회가 1935년 세계연맹에서 탈퇴하여 일본기독교연맹 산하로 들어가면서 기독교의 친일화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천주교단에서는 1936년 5월 로마 교황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려 신사참배를 허용한 바 있다. 감리교에서는 1936년 6월에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이 총독부 좌담회 참석 후 일제의 요구에 순응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감리교 내부에서 문제가 제기되자 1938년 9월에 신사참배는 국민의식이지 종교가 아니므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구애됨이 추호도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주장을 대변하였다.
Ⅲ.결론
앞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한 규정이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 친일파의 행태가 어떠했는가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친일적 흐름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청산은커녕 오히려 식민성 구조와 인맥, 이데올로기가 온존함으로써 친일파 재생산 구조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그 동안 우리는 냉전체제 분단체제에 짓눌려서 올바른 민족사를 논의조차 해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 구조로부터 긴급하게 탈출하지 않으면 미래의 민족국가는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안은 친일파 문제를 정면에서 철저하게 청산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친일파 청산의 규정이란 원칙을 이제부터 체계적으로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는 변화하고 있고 강대국의 지배양식도 바뀌고 있다. 과거의 난폭한 폭력적 지배로부터 정보와 기술, 문화를 통한 예속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주체성 확립, 정체성 확립에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이런 세계사의 도전 앞에서 과거를 감추거나 남의 것을 차용하는 방식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할 것이다. 친일파 청산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유도 바로 우리 민족의 미래 때문이다.
<참고 문헌>
서명
저자
출판사
친일파란 무엇인가
민족문제연구소
아세아문화사
20세기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쟁점
박환
국학자료원

키워드

  • 가격1,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3.07.15
  • 저작시기2003.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450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