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침탈과 서남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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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왜구침탈과 서남해안
1. 왜구의 명칭과 그 기원
2. 왜구의 발호원인
1) 왜국내의 전란
2) 왜국내의 흉년
3) 고려의 교역금지
4) 당시 고려의 정치·경제·군사적 약화
3. 왜구의 본거지와 침구목적
1) 왜구의 본거지
2) 왜구의 침구목적
4. 왜구의 침입 (남해안 지역)

Ⅲ. 왜구 정책과 영향
1. 고려의 정책
1) 토벌 격퇴
2) 회유책
3) 외교적 노력
4) 대마도 정벌
2. 왜구의 영향

Ⅲ. 맺은말

본문내용

시킬 수는 없었다.
2. 왜구의 영향
1388년 고려의 마지막 왕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에게 요동을 정벌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군사를 이끌고 위화도까지 갔던 이성계는 "요동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면 그 틈을 타서 왜구가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와 같은 명분을 들어 군사를 돌립니다. 우리역사에서 새 왕조가 탄생하는 급박한 순간에, 왜구의 존재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80년에 걸친 몽고의 지배와 계속된 외침으로 고려의 국력은 쇠퇴할 대로 쇠퇴해져있었다. 몽고가 물러가자마자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고 왕궁을 불태운다. 한편 남쪽에서는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민심이 피폐해지는 등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었다.
고려는 원나라가 1270년부터 1351년까지 80여년간 지배를 했다. 원나라가 지배를 하면서 고려의 저항을 우려해서 지방군 체제를 완전히 와해시켰다. 그리고 수도 개성을 지키는 치안 수준의 경군만을 유지했다. 그러니까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나타난 왜구에 대해 고려가 무방비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왜구의 침입을 맞아 고려가 먼저 힘을 쏟은 건 외교적 노력이었다.
고려는 정몽주 등을 외교사절로 큐슈에 보내 왜구를 근절시키라고 엄중히 요구했다. 적지 않은 성과를 보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 없었다.
해안은 연일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스러웠다. 고려는 수군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관리들의 상소가 이어졌고 결국 공민왕 3년, 고려는 수군제도를 마련하고 지방군을 정비하게 된다. 해변주민 세 명을 한호로 정하고 수군 한 명씩을 내게 했다. 또 지방군으로 진수군을 편성했다.
왜구의 침입이 잦은 해안가에는 성을 쌓고 경비를 강화했다. 장암진성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금강하구에 지어진 성이다.
와해됐던 지방군을 재정비해서 진수군을 편성하고 바다해군을 선기군을 양성하다. 동시에 전쟁에 필요한 화약이라든지 병기를 개발하면서 대략 1370년대 후반기가 되면 왜구와 전면전을 벌여 승리할 만큼 군사체제가 재정비된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일은 화포의 개발이었다.
1377년 우왕 3년 10월.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이 설치된다. 화약과 함께 대장군 이장군 석포 신포 등 각종 화기가 잇따라 개발되었다. 화약무기의 개발 이후 고려의 전투력은 눈부시게 발전한다.
1380년 8월.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의 수군은 백 척의 적은 선단으로 500척 왜구의 대선단을 격파한다. 대 왜구전의 양상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가장 효율적인 왜구격퇴의 해답을 찾은 것이 최무선의 진포대첩이다. 그것은 화포라는 최신식 무기를 개발 처음으로 사용한 곳이 이곳이다. 그래서 화포전법으로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또 승리를 거뒀다. 진포대첩은 왜구승리의 해답을 찾은 전투였다. 진포대첩이 바다의 주도권을 잡은 첫 승리이었다면, 운봉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은 왜구토벌사에 한 획을 긋는 전투였다.
1380년 9월. 진포에서 배를 모두 잃은 왜구의 대부대는, 인월면쪽에서 몰려와 진을 치고 있었다. 이성계는 적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움을 지휘해, 왜구 대부분을 사상시키고 말 1,600필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성계는 죽기를 각오하고 많은 군사를 독려해서 여기서 힘든 싸움을 하게 되는데 말을 2번이나 갈아타고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가면서 싸움을 해서 전쟁을 결국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이때 흘린 왜구의 피가 강을 물들여 일주일동안이나 그 물을 마시지 못했고 여기서 승리한 이성계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왜구출몰로 인한 피해... 이것은 이성계와 같은 신흥무장을 성장시켰고 사대부들이 그로 인해 조정에 재정적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서 사전혁파를 주장하게 되고 구세력을 물리치고 새왕조를 개창하는데 성공했다.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것은 왜구와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불 수 있다.
고려말 왜구와의 싸움을 통해 얻어진 경험들은 이후 조선의 대왜구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된다.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무력으로 응징하면서, 조선은 초기 100년 이상 주도적으로 왜구와의 관계를 이끌어간다. 자신감 있는 조선의 왜구정책은 고려말 40년의 시련속에서 얻어낸 열매였던 것이다.
고려왕조는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화포가 개발되었고 지방군 체제도 정비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역설적으로 고려의 국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성과는 고려가 아니라 다음왕조인 조선에서 나타나게 된다. 조선의 건국주체였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이 왜구토벌 과정을 통해 민심과 권력을 동시에 거머쥐게 된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새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역사의 변동기, 왜구는 그 흐름을 가속화시킨 촉매같은 존재였다
Ⅲ. 맺은말
왜구들은 침탈에 위해 이득을 보았겠지만 그로 인해 고려가 입은 피해와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다. 개경에 자주 계엄령이 내려지고 내지 인 철원으로의 천도론이 대두되는 등 여러 가지 정치문제가 제기되었고 많은 지역에 행정적 공백이 초래되었다. 뿐만 아니라 왜구는 요동정벌 불가론의 한 이유로 등장했는가 하면 조운을 원할치 못하게 하여 군수와 녹봉 등 국가재정의 곤난을 가속화 시켰다.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고 피난과 유리등으로 연해지역은 텅 비고 농토는 황폐화되었다. 또한 화척, 재인 등 천민들이 왜구를 가장하여 구도행위를 한 이른바 '가왜'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발생한 사회현상의 하나였다. 요컨대 왜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악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이 결국 고려의 운명을 재촉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참고 문헌
이현종 「왜구」, 『한국사』 국사 편찬위원회 1997
신석호 「여말선초의 왜구와 그 대책」『국사상의 제문제』 국사편찬위원회 195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0 -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탐구당 문화사 199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2 -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탐구당 문화사 1994
참고 미디어
역사스페셜 제 83회『고려말 비상계엄. 왜구를 격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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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7.24
  • 저작시기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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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24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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