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석탑양식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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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 차 ☆



서 론 ..........................................1p


본 론 ..........................................2p-11p


1. 탑파와 석탑 발생의 고찰........................2p-3p
2. 고려시대 석탑의 석탑의 전국적 분포 원인 고찰...3p-5p
3. 고려시대의 석탑의 양식에 따른 고찰.............5p-11p
1) 고구려계석탑
2) 백제계석탑
3) 신라계석탑
4) 고려계석탑
5) 특수형석탑

결 론...........................................11p-12p

본문내용

권위와 중앙집권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왕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지배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여겨진다.
질지왕은 즉위하자마자 왕실의 권위를 신성화하기 위해 시조왕의 왕후를 기리고 명복을 비는 '왕후사'를 세우고, 또 허황후의 동생 보옥선인을 기리는 '장유사'를 세웠던 것이다. 또한 <숭선전지(崇善殿志)>에, 허황후가 폐백드린 곳에 수로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명월사의 수로왕 창건사실이 명월사 중수비의 발견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 비문에 따르면 명월사는 144년 수로왕 때 창건되었는데 장유화상이 서역에서 불법을 받들고 오니 왕이 이 도를 중시하여 부처를 받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바로 가야가 된다.
이러한 가야를 통합한 신라에서 또한 가야의 불교문화가 통합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탑양식 또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야의 강역이 정확히 밝혀지지가 않은 문제점이 생긴다. 통일신라 9세기의 각 지방에서 삼국시대의 각 탑 양식상의 모습이 재현되었다면 가야에서 역시 재현되지 않았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야의 불교 수용이 고구려, 백제, 신라 보다 먼저 이루어졌다면 고구려, 백제보다 고작해야 100여년 먼저 멸망(562년)한 가야의 탑양식은 고구려, 백제의 탑양식 재현과 함께 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알 수가 없는 것인지 의문점을 갖게 한다.
) 1994, 임혜봉, 『한 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장면』, 가람기획, pp 56-59
9) 2001,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pp496-500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세가지의 추론을 할 수 있다. 첫째는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가야의 불교 역시완전히 하나로 합쳐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까닭은 가야의 왕실 계통이었던 김유신이 신라의 중앙에서 활약했음을 볼 때 가야인과 신라인이라는 구별적 요소가 없이, 또는 차별이 없이 하나로 합쳐졌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가야불교의 전래 년도가 기존의 일반적 인식처럼 뒤늦게 됨으로써 탑양식 자체가 정형화되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셋째로는 아직까지 연구가 되지 못하여 우리가 알지 못할 가능성이다.
결 론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한 나라의 멸망이 그리고 한 나라에 의한 재통일이 외부적 모습으로 보이는 변화가 단순하게 이루어졌다고 생각되어질지 몰라도, 내부적인 모습은 결코 쉽게 변화하는 것이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건탑의 지역적인 복고는 아무리 나라가 멸망되어져, 그 나라가 없어진다 해도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의식은 쉽게 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9세기는 정치적인 면에서 중앙 귀족의 치열한 왕위쟁탈전 및 호족 세력의 난립으로 인한 통일신라의 해체기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고려 초기 호족들의 난립으로 인한 혼란스럼운 사회로 인식한다. 그러나 어떤 시기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고립적으로가 아니라 전체로서 예술사의 맥락 속에서, 역사적 발전의 계기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에 비추어 볼 때, 그 시대 역시 나름대로 정치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탄생되어야 할 필요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불교 조형물은 그간의 통념과 같이 양식적 쇠퇴기의 소산이 아니라, 수적인 증가와 함께 전국적인 확산과 새로운 양식의 탄생과 유행에 의하여 독창적인 예술 의욕이 더욱 활발히 발휘된 시기에 탄생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양성이 존중되며, 다양한 사고와 다양한 의견이 서로 공유되어지는 시기가 바로 통일신라후기, 고려시대 초기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꼭 어느 획일적인 전체주의적 왕권의 강화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문화의 발전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왕조의 불안정한 분쟁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안정은 정체를, 그리고 정체는 부패를 낳는다. 이와는 반대로 불안정과 분쟁은 분명 새로운 시도와 활력적인 사고를 불어넣어 준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고려시대 탑을 고찰하면서 삼국시대 사람들에 자기 문화의 대한 자긍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바로 배워야 할 점은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적인 서구문화에 대한 수용에서 벗어나 우리의 옛 것에 대한 자긍심과 비판을 통한 외래 문화 수용을 했던 옛 선조의 모습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1969, 1970, 정영호, 『한국석탑의 특수양식 고찰』, 단국대학교 논문집 제 3,4집
·1974, 황수영, 『불탑과 불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정영호, 『고려시대 석탑의 특성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논문집 제 11집
·1992, 김희경, 『한국의 미술 2』, 열화당
·1994, 임혜용,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장면』, 가감기획
·1994, 정영호, 『석탑』, 대원사
·1995, 목정배, 『한국문화와 불교』, 불교시대사
·1995, 진홍섭, 『한국의 석조미술』, 문예출판사
·1998, 정영호, 『한국의 석조 미술』,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박경식, 『우리나라의 석탑』, 역민사
·2000, 천득염, 『백제계 석탑 연구』,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2, 서정희, 『동해안 일대의 발해 유적에 대한 연구』, 중심출판
·2002, 서성희, 『고려초 예천 개심사 석탑 건립』, 부산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http://www.encyber.com/
☆ 목 차 ☆
서 론 ..........................................1p
본 론 ..........................................2p-11p
1. 탑파와 석탑 발생의 고찰........................2p-3p
2. 고려시대 석탑의 석탑의 전국적 분포 원인 고찰...3p-5p
3. 고려시대의 석탑의 양식에 따른 고찰.............5p-11p
1) 고구려계석탑
2) 백제계석탑
3) 신라계석탑
4) 고려계석탑
5) 특수형석탑
결 론...........................................11p-12p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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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3.08.26
  • 저작시기2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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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24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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