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수취체제와 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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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전기의 수취체제와 양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수취체계의 해이

2. 임진왜란과 의병활동

3. 제해권의 장악과 왜군의 패퇴

4. 병자호란

5. 전란의 영향

본문내용

오게 하였다. 병자호란은 명분론이 강조된 외교정책의 실패에 1차적 원인이 있겠다.
5. 전란의 영향
조선, 명, 일본은 왜란을 통해서 모두 큰 영향을 입었으나, 그 중에서 직접 전장이었던 조선의 피해가 가장 컸다. 7년에 걸친 대란에 의해 전국이 거의 전장화 하였지만,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특히 경상도가 심하게 피해를 입었다. 인구는 감소하였고 농촌은 황폐해졌으며 기아와 질병이 수반되었다. 식량 부족으로 말미암은 국가의 재정 곤란을 구하기 위해 일정한 양의 납속을 하고는 그 대가로 관작을 주는 매관을 하기도 하였으며 난중에 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몽학의 난이다. 전국의 농토는 격감하였고, 줄어든 농토는 좀처럼 복구되지 않았으며 토지대장과 호적도 대부분 소실되어 조세나 요역의 징수가 곤란하여 국가재정의 수입은 아주 궁핍해졌다. 재정의 궁핍은 양반관료의 정권 획득용, 나아가서는 토지소유욕을 자극하였으며 당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궁방과 국가기관이 각기의 재정확보에 골몰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정수라는 이름아래 사령지를 확대해갔으며 납속책을 써서 관직을 매매하고 서얼의 차대를 완화해 주며 노비종량의 법을 실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사회신분제의 해이를 크게 가져온다. 또 한 문화적인 손실도 적지 않았는데, 경복궁과 여러 궁전, 관아가 소실되고 홍문관의 장서가 소실 되었으며, 4개처의 사고도 전주의 것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 되었고, 서적, 미술품 등 많은 문화재가 약탈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한편, 왜와의 대항을 위해 절강병법의 수입과 같은 전술의 발달, 비격진천뢰나 화차와 같은 무기의 발달도 있었다.
임진왜란은 조선뿐 아니라 동아시아를 뒤흔든 대전란이었다. 이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청에 의해 명이 멸망당하는 원인이 되었고, 일본에서도 풍신씨가 몰락하고 덕천씨가 새로운 무신정권을 건설하게 되었다. 왜군으로 포로로 간 조선인 중에는 도자 기술자가 다수 있었는데, 이 후 일본의 도자기는 크게 발달 할 수 있었으며, 왜군이 훔쳐간 활자는 일본의 인쇄기술의 발달을 초래하게 되었고 약탈 되어간 서적은 일본의 주자학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병자호란은 왜군의 침입에 비하여 기간도 짧고 국토의 적은 일부만이 전장화 하였기에 피해가 적은 편이었으나 약탈과 살육에 의해 서부지방은 황폐해졌으며 이로 말미암은 적개감과 문화적인 우월감이 겹쳐져 청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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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3.10.05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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