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동학의 발생과 발전
Ⅱ. 제1차 동학농민전쟁
1. 교조신원운동과 공주, 삼례집회
2. 복합상소와 삼남집회
3. 고부민란
4. 제 1차 농민전쟁
Ⅲ. 제 2차 동학농민전쟁
1. 2차 농민전쟁의 배경
2. 2차 농민전쟁의 봉기 및 경과
3. 최후의 항전 - 우금치 전투
Ⅳ. 동학농민 전쟁의 결과 및 의의
Ⅱ. 제1차 동학농민전쟁
1. 교조신원운동과 공주, 삼례집회
2. 복합상소와 삼남집회
3. 고부민란
4. 제 1차 농민전쟁
Ⅲ. 제 2차 동학농민전쟁
1. 2차 농민전쟁의 배경
2. 2차 농민전쟁의 봉기 및 경과
3. 최후의 항전 - 우금치 전투
Ⅳ. 동학농민 전쟁의 결과 및 의의
본문내용
군은 공주성을 향한 총공세를 펼치기 위한 주 공격로로 우금치를 잡는 한편 그 밖의 진입로는 보조 공격로로 잡았다. 즉 곰터가 그 첫번재 보조 공격로이고 두번째가 검상마을에서 새재를 넘어 일락산에 공주를 내려치는 공격로, 세번째가 곰나루쪽에서 웅진동을 거쳐 현재의 금성여중 앞을 지나 하고개를 넘거나 바로 봉황산 뒤편에서 감영을 치는 공격로이다. 마지막 공격로가 주미산에서 우금치와 곰더사이의 금학동으로 빠지는 골짜기가 긴 곳이다.
전봉준은 11월 초 드디어 노성과 경천쪽으로 대군을 진격시켰다. 농민1대는 경천에서 무너미고개를 넘어 공주성으로 돌격해 갔다. 다른 1대는 이민으로 진격하여 이인에 주둔해 있다가 미처 회진하지 못한 성하영 부대를 포위 공격하여 우금치로 밀어 붙였고, 무너미 고개를 지키던 구상조 부대를 공격해 곰더족으로 후퇴케 했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감영에서는 일본군을 우금치로 급파하여 우금치 방어에 주력하게 하였다. 농민군의 거대한 기세에 눌린 감영은 최후의 방어선을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로 이어지는 전선으로 잡아 관군을 배치했다. 그날 밤 농민군은 산위에 올라 한꺼번에 횃불을 밝혔다. 날이 밝자 농민전쟁 최대의 격전인 우금치 전투가 벌어졌다.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우금치를 지키고 있는 관군과 우금치 옆 뱁세울 앞산에 있는 일본군을 향하여 진격해 갔다. 이때의 상황이 관군측 기록
《선봉진 일기》 11월초 동학란길로 上
에 이렇게 적혀있다. “9일 날이 밝아 적세을 상세하게 탐지하니 각 진이 서로 발보이는 곳에 각종의 기를 두루 꽂고, 동족 무너미고개 뒷산으로부터 서쪽 봉황산 뒷기슭에 이르기까지 3,40리를 연이어 산위에 진세를 펼치니 사람으로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이 그 세력이 엄청나게 크다, 금학, 곰티, 효포를 넘어오는 비도는 10리 거리의 서로 바라보이는 높은산에 나란히 진을 치고 있는데 때로 고함치고 때로 포를 쏘면서 곧 침범할 기세를 보이고 있다”
농민군은 관군 방어선의 이곳 저곳을 헤집어 놓고 물러가길 여러 차례하여 관군의 주의를 흩어 놓았다.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우금치가 바라보이는 산 아래 있었다. 이들은 효포아 곰터를 주요 목표로 삼아 공격하는 척 효포쪽에서 먼저 싸웠다. 이사이 주력부대는 드디어 우금치를 향해 움직였다. 정부, 일본군은 우금치 고개로 올라오는 농민군에게 뛰어난 화력의 신식무기롤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6, 7일간 4, 50회의 공방전이 전개되고 동학농민군은 끝까지 분투하였으나 끝내 일본군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농민군 다수의 사상자만 내고 후퇴하였으니 그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아날 우금치 전투에 대해서 전봉준은 “2차 접전 후 1만명의 군병을 점고하니 남은자는 3천여명을 넘지 않았으며, 그 후 다시 2차로 접전하후 점고하니 5백명을 넘지 않았다”하여 장렬한 싸움이었음을 회상했다.
또 관군 선봉 이규태도 이 말의 싸움을 묘사하기를 “아 수만이나 되는 비도가 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알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가고하면 뼈가 떨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를 하지 못하여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하여 비록 막아내기는 했으나 엄청난 농민군의 기세를 인정하였다. 이리하여 공주는 전봉준의 큰 뜻과 농민군의 발목을 낚아챈 잊을 수 없는 땅이 되었다. 들판을 꽉 메운 농민군의 피끓는 함성은 관군과 일본군의 총소리에 파묻혀갔으며 농민군은 공주를 누앞에 두고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 우금치 전투의 패전이후 농민군은 노성, 논사, 은진 및 금구, 태인, 장성을 위시한 전라도 각지의 전투에서 패하고 결국 세를 만회하지 못하였다. 전국으로 번진 2차 농민봉기는 1895년 1월 각도에서의 일본군과 관군의 섬멸작전과 이에 더하여 집강소 활동기에 수모를 당한 향촌의 보수양반과 민보군에 의해 거의 패산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전봉준 등의 농민군 지도층 인사들도 하나둘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그렇다면 갑오농민전쟁의 결정적 실패요인이라고 할수 있는 우금치 전투의 패배를 무엇 때문이었을까? 크게 네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 화력이나 병력으로 보아 열세인데도 무리한 정면공격을 시도한 것이 어떤면에서는 무모했다.
둘째 : 화력이 우수하고 잘 훈련된 일본군이 전면에 나섰고 농민군이 신무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셋째 : 당시 계절적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다.
넷째 : 통신장비 등 정보체계가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보다 아주 뒤덜어 졌다.
Ⅳ. 동학농민 전쟁의 결과 및 의의
동학 농민전쟁은 이전의 농민봉기와는 다른 전반적 성격을 가졌다. 이는 지역적인 농민봉기가 동학조직과의 결합에 의하여 그 지역적 분산성을 극복하였으며 동학조직은 지역적인 농민봉기의 혁명적 에너지를 흡수하여 종교적 표지를 극복하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역적 민란에서든 동학조직에서든 그것을 지탱하는 계급적 기반이 모두 같은 농민 천민이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해로운 것이었다. 국토는 전쟁으로 황폐해졌고 양편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넓은 지역이 전장이 되었고 또 많은 농민들이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농업활동이 중단되었다. 가장 심각한 결과는 구체적 영역에 있었다. 그 이유는 일본정부가 한반도에 군대를 진주 시킬 수 있는 구실을 준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왔다. 민족주의의 정의는 사회적 조화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엄격한 사회적 차별이 무너지는 것은 민족주의가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한편 일본이 우세해졌기 때문에 조선 민중은 새롭고 통합된 모습으로 뭉쳐야 할 필요성이 늘어났고 그 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민족주의가 바로 그러한 상징이 되었다. 제 2차 농민전쟁은 몇 가지 원인들의 복합으로 일단 실패했지만, 그것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고 한국 근대사와 한국 민족운동사에 커다란 사회적 역사적 의의를 가진 운동이었다.
전봉준은 11월 초 드디어 노성과 경천쪽으로 대군을 진격시켰다. 농민1대는 경천에서 무너미고개를 넘어 공주성으로 돌격해 갔다. 다른 1대는 이민으로 진격하여 이인에 주둔해 있다가 미처 회진하지 못한 성하영 부대를 포위 공격하여 우금치로 밀어 붙였고, 무너미 고개를 지키던 구상조 부대를 공격해 곰더족으로 후퇴케 했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감영에서는 일본군을 우금치로 급파하여 우금치 방어에 주력하게 하였다. 농민군의 거대한 기세에 눌린 감영은 최후의 방어선을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로 이어지는 전선으로 잡아 관군을 배치했다. 그날 밤 농민군은 산위에 올라 한꺼번에 횃불을 밝혔다. 날이 밝자 농민전쟁 최대의 격전인 우금치 전투가 벌어졌다.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우금치를 지키고 있는 관군과 우금치 옆 뱁세울 앞산에 있는 일본군을 향하여 진격해 갔다. 이때의 상황이 관군측 기록
《선봉진 일기》 11월초 동학란길로 上
에 이렇게 적혀있다. “9일 날이 밝아 적세을 상세하게 탐지하니 각 진이 서로 발보이는 곳에 각종의 기를 두루 꽂고, 동족 무너미고개 뒷산으로부터 서쪽 봉황산 뒷기슭에 이르기까지 3,40리를 연이어 산위에 진세를 펼치니 사람으로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이 그 세력이 엄청나게 크다, 금학, 곰티, 효포를 넘어오는 비도는 10리 거리의 서로 바라보이는 높은산에 나란히 진을 치고 있는데 때로 고함치고 때로 포를 쏘면서 곧 침범할 기세를 보이고 있다”
농민군은 관군 방어선의 이곳 저곳을 헤집어 놓고 물러가길 여러 차례하여 관군의 주의를 흩어 놓았다.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우금치가 바라보이는 산 아래 있었다. 이들은 효포아 곰터를 주요 목표로 삼아 공격하는 척 효포쪽에서 먼저 싸웠다. 이사이 주력부대는 드디어 우금치를 향해 움직였다. 정부, 일본군은 우금치 고개로 올라오는 농민군에게 뛰어난 화력의 신식무기롤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6, 7일간 4, 50회의 공방전이 전개되고 동학농민군은 끝까지 분투하였으나 끝내 일본군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농민군 다수의 사상자만 내고 후퇴하였으니 그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아날 우금치 전투에 대해서 전봉준은 “2차 접전 후 1만명의 군병을 점고하니 남은자는 3천여명을 넘지 않았으며, 그 후 다시 2차로 접전하후 점고하니 5백명을 넘지 않았다”하여 장렬한 싸움이었음을 회상했다.
또 관군 선봉 이규태도 이 말의 싸움을 묘사하기를 “아 수만이나 되는 비도가 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알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가고하면 뼈가 떨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를 하지 못하여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하여 비록 막아내기는 했으나 엄청난 농민군의 기세를 인정하였다. 이리하여 공주는 전봉준의 큰 뜻과 농민군의 발목을 낚아챈 잊을 수 없는 땅이 되었다. 들판을 꽉 메운 농민군의 피끓는 함성은 관군과 일본군의 총소리에 파묻혀갔으며 농민군은 공주를 누앞에 두고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 우금치 전투의 패전이후 농민군은 노성, 논사, 은진 및 금구, 태인, 장성을 위시한 전라도 각지의 전투에서 패하고 결국 세를 만회하지 못하였다. 전국으로 번진 2차 농민봉기는 1895년 1월 각도에서의 일본군과 관군의 섬멸작전과 이에 더하여 집강소 활동기에 수모를 당한 향촌의 보수양반과 민보군에 의해 거의 패산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전봉준 등의 농민군 지도층 인사들도 하나둘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그렇다면 갑오농민전쟁의 결정적 실패요인이라고 할수 있는 우금치 전투의 패배를 무엇 때문이었을까? 크게 네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 화력이나 병력으로 보아 열세인데도 무리한 정면공격을 시도한 것이 어떤면에서는 무모했다.
둘째 : 화력이 우수하고 잘 훈련된 일본군이 전면에 나섰고 농민군이 신무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셋째 : 당시 계절적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다.
넷째 : 통신장비 등 정보체계가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보다 아주 뒤덜어 졌다.
Ⅳ. 동학농민 전쟁의 결과 및 의의
동학 농민전쟁은 이전의 농민봉기와는 다른 전반적 성격을 가졌다. 이는 지역적인 농민봉기가 동학조직과의 결합에 의하여 그 지역적 분산성을 극복하였으며 동학조직은 지역적인 농민봉기의 혁명적 에너지를 흡수하여 종교적 표지를 극복하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역적 민란에서든 동학조직에서든 그것을 지탱하는 계급적 기반이 모두 같은 농민 천민이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해로운 것이었다. 국토는 전쟁으로 황폐해졌고 양편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넓은 지역이 전장이 되었고 또 많은 농민들이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농업활동이 중단되었다. 가장 심각한 결과는 구체적 영역에 있었다. 그 이유는 일본정부가 한반도에 군대를 진주 시킬 수 있는 구실을 준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왔다. 민족주의의 정의는 사회적 조화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엄격한 사회적 차별이 무너지는 것은 민족주의가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한편 일본이 우세해졌기 때문에 조선 민중은 새롭고 통합된 모습으로 뭉쳐야 할 필요성이 늘어났고 그 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민족주의가 바로 그러한 상징이 되었다. 제 2차 농민전쟁은 몇 가지 원인들의 복합으로 일단 실패했지만, 그것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고 한국 근대사와 한국 민족운동사에 커다란 사회적 역사적 의의를 가진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