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과 공주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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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1차 농민 전쟁기의 공주

3. 2차 농민 전쟁기의 공주전투

4. 결론

본문내용

군측 보고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노획품 가운데 화승총과 창의 비율은 1대 10이었다. 이것으로 당시 농민군의 화력을 추정해보면 농민군 열 명 가운데 화승총을 가진 사람은 겨우 한 명에 불과하였다. 농민군은 숫적으로 관군과 일본군에 비해 7.4배라는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으나, 화승총의 사정 거리가 일본군 양총 사정거리의 5분의 1에 불과했던 점 등을 상기하면 화력의 열세가 농민군의 패배 1차적인 원인 이었다고 보여진다. 이와같이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공주지역의 농민군은 전체 농민봉기 지역 가운데 1894년 7월 가장 먼저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하였고, 이후 11월초 이땅에 침입한 외세에 대해 우금치 전투라는 최대의 저항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Ⅳ. 결론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동학농민운동은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운 커다란 민중적 사건이었다. 비록 결과론 적으로는 실패로 끝났다고는 하나 일본등 열강의 침입을 막고 우리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민중들의 자발적 혁명이었던 것이다.
한국근대사의 맥을 외세의 침략에 직면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저항의 역사라고 한다면, 1894년 동학농민군이 우금치를 비롯한 공주 일원에서 벌인 활동과 전투야말로 한국 근대사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 처럼 공주지역 농민군의 활동은 7월 초부터 활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7월3일 공주의 대교·공수원·반송 등지에는 농민군 천여명이 '위국위민'(爲國爲民)을 내걸고 봉기한 이래, 이인도회(利仁都會)(5·6일)·동천점(銅川店)(12일) 집회를 거쳐 8월1일 정안면 궁원 대도회(大都會)에 만여명의 농민군이 모였고, 다음날 마침내 공주부내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7월 초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농민전쟁의 중심세력이었던 남접 세력의 경우 집강소를 설치하고 관민이 연합하여 봉건적 수탈의 제거에 주력하고 있었던 시기였음을 비추어 볼 때 공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농민군이 반외세 전쟁에 들어간 시기는 남접 세력보다 앞선 것이다.
이와 같이 알아보았으나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역사적 의의에 비해 아직 우리는 그에대한 전문적이고 깊이있는 연구가 미흡한 실정이다. 이처럼 근현대사의 획을 긋는 민중들의 역사적 사건에 더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고 더욱이 미흡했던 동학농민전쟁 당시 공주전투가 차지하는 역사적인 의의를 생각하면 공주지역 농민군의 활동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과 연구가 한층 더 깊이있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공주대학교박물관, 1995, 『공주의 역사와 문화』
동학농민전쟁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편, 1994, 『동학농민전쟁사료대계』, 여강,
최덕수, 『동학농민전쟁과 공주전투』
이이화,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향토연구회, 『향토연구-甲午記事』,
배항섭, 1994, 『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과 동학교단』, 백제문화
최덕수, 1993, 『개항 이후 일본의 조선정책』『1894년 농민전쟁연구3』, 역사비평
유영익, 1990, 『갑오경장연구』, 일조각
박맹수, 『동학농민전쟁과 공주전투』, 백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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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17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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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38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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