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고조선
1. 경제수준
2. 농업과 목축업
3. 수공업과 상업
4. 경제의 생산 담당자
Ⅲ. 예맥
Ⅳ. 부여
Ⅴ. 읍루
Ⅵ. 고구려
1. 정치제도
2. 사회제도
3. 풍속
Ⅶ. 옥저
Ⅷ. 동예
Ⅸ. 삼한
1. 통치제도
2. 경제
3. 생활양식 및 풍습
Ⅹ. 결 론
Ⅱ. 고조선
1. 경제수준
2. 농업과 목축업
3. 수공업과 상업
4. 경제의 생산 담당자
Ⅲ. 예맥
Ⅳ. 부여
Ⅴ. 읍루
Ⅵ. 고구려
1. 정치제도
2. 사회제도
3. 풍속
Ⅶ. 옥저
Ⅷ. 동예
Ⅸ. 삼한
1. 통치제도
2. 경제
3. 생활양식 및 풍습
Ⅹ. 결 론
본문내용
한데 묶어 열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들 50여 국은 목지국의 진왕을 최고 맹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정치적으로 하나의 큰 연합체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國)은 한 부족의 거주지역을 뜻하는 말로, 그 영역과 인구가 낙랑(樂浪) 대방(帶方) 등 한 군현(郡縣)의 1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대국(大國:목지국과 같은 것)이 1만여 가(家), 소국이 수천 가(家)라 하고 이들 50여 국의 총 호수가 10여 만 호라 하였는데, 이 호(戶)란 혈연적인 가부장제(家父長制)의 공동체였다.
1. 통치제도
삼한 소국들의 사회체제는 아직도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로 부족공동체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소위 대국이라야 여러 부족의 연맹체에 불과하였으며 정치와 제사(祭祀)는 분리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위지》 <변진조(弁辰條)>에 보면 격이 높은 것부터 열거하여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 등의 군장(君長)의 칭호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삼한 전체에 공통된 것이었고 격의 차이는 있으나 이들은 모두 한 부족국가의 우두머리에 대한 칭호였다. 각 부족국가는 이들 우두머리가 통솔하였으나 아직 도시와 촌락의 구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을은 미분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부락 단위 공동체적 조직은 매우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2. 경제
삼한은 농업과 양잠·길쌈 등이 널리 행하여졌으며 평야가 많고 토지가 비옥하여 일찍부터 벼농사가 행해졌고, 수리시설로서 저수지가 많이 마련되었다. 그 한 예로 김제(金堤)의 벽골지(碧骨池),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제천(堤川)의 의림제(義林堤) 등은 이 때의 저수지이다. 목축도 성했으며 해안지대에서는 어업이 성행하였다. 특히 진한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산출되어 널리 쓰였다. 철은 물품매매에 화폐처럼 사용되고 낙랑 방면과 일본에까지 수출하였다고 한다.
3. 생활양식 및 풍습
삼한시대에는 농업이 그들 경제의 최대 근본이었으므로 씨를 뿌리는 봄과 추수하는 가을에는 계절적인 제사가 성행하였다. 씨를 뿌리고 난 5월에는 부락 전체의 군중이 모여 신에게 제사하고 가무(歌舞)와 음주로 밤낮을 즐겁게 놀았고 추수가 끝난 10월에도 그러하였다.
집은 대개 평지에 움집, 산지에는 귀틀집이 많았는데, 의복은 삼베 모시 명주 등으로 만들어 입었다. 남자는 도포처럼 된 웃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 가죽신 또는 짚신을 신었으며 이때부터 지게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구슬을 재보(財寶)로 삼았고, 또 그것을 치레로 옷에 달기도 하였으며 귀고리와 목걸이도 사용하였다. 이러한 유물은 지금도 당시의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혼인과 예절에 있어서 남녀의 구별이 있었으며, 법과 형벌은 일반적으로 엄하였다. 장례는 대개 후하게 지냈는데, 마한에서는 장사에 관(棺)만 쓰고 곽(槨;外棺)을 쓰지 않았으며 소와 말을 순장(殉葬)하는 풍속이 있었다. 변진에서는 큰 새의 깃털을 장례에 사용하고 죽은 자가 승천하는 것으로 믿었다 한다. 남부지방에서는 남자 가운데 편두 및 문신(文身)을 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방 해양족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한의 여러 나라에서는 소도(蘇塗)라고 하는 신역(神域)을 두고 제사하였는데, 소도는 도망하여 들어간 죄인도 잡지 못할 정도로 법률의 힘이 미치지 못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삼한의 풍속은 뒷날 신라 백제 가야문화의 기초가 되었으며 자연환경이 온화하고 곡식이 풍부하여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노래 춤 음주가 성행하였으며 특히 변한 마한 지역에는 비파와 같은 악기도 있었다고 한다.
Ⅹ. 결 론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농업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밭에서 잡곡을 재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논에서 벼농사(도작, 稻作)를 짓기도 하였다. 벼농사는 특히 삼한에서 성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수리(水利)를 위한 저수지가 이미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농업이 당시의 주된 산업이었음은, 부여에서 흉년이 되면 왕이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거나 죽음을 당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하여 주고 있다.
물론 농업 이외에도 여러 가지 경제 활동을 하였다. 가령 부여에서는 목축(牧畜)이 크게 행해지고 있어서, 관직의 이름에도 소·말·돼지·개 등의 가축 이름이 붙여질 정도였다. 남쪽 삼한에서도 소와 말이 가축으로 길러졌으며, 그 뼈가 김해패총(金海貝塚)에서도 발견되었다. 또 삼한에서는 꼬리가 긴 닭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한편 사냥(수렵, 狩獵)도 널리 행해졌는데, 고구려와 같이 산이 많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김해패총에서 멧돼지·사슴 등 동물의 뼈가 나온다든지 울주(蔚州)의 반구대 암각화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동물 그림이 발견되는 것도 사냥을 중요시한 증거가 된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나 그 밖의 물고기 그림도 나오며, 따라서 해안지역에서는 고기잡이(어로, 漁撈)도 했음을 말해 준다. 동해안에 자리잡고 있던 옥저나 동예 같은 나라에서 고기잡이가 특히 중요시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주된 산업은 역시 농업이었다. 그리고 촌락은 농업을 영위하는 기본적인 단위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촌락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농민은 중국인들이 하호(下戶)라고 부른 양인(良人) 신분의 소유자들이었다. 이 양인농민의 위에는 호민(豪民)이 있었고, 밑에는 노비(奴婢)가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시기 즉, 원시부족국가 시기에는 농민의 개인적인 토지 사유는 이미 생겨나 있었으며 이들 양인농민은 촌락의 공유지를 경작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농업은 이 시기 주된 산업이었으며 각 나라들의 특성에 따라 목축과 수렵과 어로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청동기(철기)의 사용은 이들 국가의 경제적인 변화는 물론 사회 전반에 일대 변혁을 불러왔다.
[ 참 고 자 료 ]
이기백「한국사신론」일조각 2003
김옥근 「한국경제사」 신지서원 1997
http://www.encyber.com/ 두산세계대백과
http://www.historyworld.org 우리역사 바로알기 시민연대
http://www.hongik.ac.kr/~yoksa/ 역사학회DB
1. 통치제도
삼한 소국들의 사회체제는 아직도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로 부족공동체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소위 대국이라야 여러 부족의 연맹체에 불과하였으며 정치와 제사(祭祀)는 분리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위지》 <변진조(弁辰條)>에 보면 격이 높은 것부터 열거하여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 등의 군장(君長)의 칭호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삼한 전체에 공통된 것이었고 격의 차이는 있으나 이들은 모두 한 부족국가의 우두머리에 대한 칭호였다. 각 부족국가는 이들 우두머리가 통솔하였으나 아직 도시와 촌락의 구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을은 미분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부락 단위 공동체적 조직은 매우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2. 경제
삼한은 농업과 양잠·길쌈 등이 널리 행하여졌으며 평야가 많고 토지가 비옥하여 일찍부터 벼농사가 행해졌고, 수리시설로서 저수지가 많이 마련되었다. 그 한 예로 김제(金堤)의 벽골지(碧骨池),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제천(堤川)의 의림제(義林堤) 등은 이 때의 저수지이다. 목축도 성했으며 해안지대에서는 어업이 성행하였다. 특히 진한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산출되어 널리 쓰였다. 철은 물품매매에 화폐처럼 사용되고 낙랑 방면과 일본에까지 수출하였다고 한다.
3. 생활양식 및 풍습
삼한시대에는 농업이 그들 경제의 최대 근본이었으므로 씨를 뿌리는 봄과 추수하는 가을에는 계절적인 제사가 성행하였다. 씨를 뿌리고 난 5월에는 부락 전체의 군중이 모여 신에게 제사하고 가무(歌舞)와 음주로 밤낮을 즐겁게 놀았고 추수가 끝난 10월에도 그러하였다.
집은 대개 평지에 움집, 산지에는 귀틀집이 많았는데, 의복은 삼베 모시 명주 등으로 만들어 입었다. 남자는 도포처럼 된 웃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 가죽신 또는 짚신을 신었으며 이때부터 지게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구슬을 재보(財寶)로 삼았고, 또 그것을 치레로 옷에 달기도 하였으며 귀고리와 목걸이도 사용하였다. 이러한 유물은 지금도 당시의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혼인과 예절에 있어서 남녀의 구별이 있었으며, 법과 형벌은 일반적으로 엄하였다. 장례는 대개 후하게 지냈는데, 마한에서는 장사에 관(棺)만 쓰고 곽(槨;外棺)을 쓰지 않았으며 소와 말을 순장(殉葬)하는 풍속이 있었다. 변진에서는 큰 새의 깃털을 장례에 사용하고 죽은 자가 승천하는 것으로 믿었다 한다. 남부지방에서는 남자 가운데 편두 및 문신(文身)을 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방 해양족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한의 여러 나라에서는 소도(蘇塗)라고 하는 신역(神域)을 두고 제사하였는데, 소도는 도망하여 들어간 죄인도 잡지 못할 정도로 법률의 힘이 미치지 못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삼한의 풍속은 뒷날 신라 백제 가야문화의 기초가 되었으며 자연환경이 온화하고 곡식이 풍부하여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노래 춤 음주가 성행하였으며 특히 변한 마한 지역에는 비파와 같은 악기도 있었다고 한다.
Ⅹ. 결 론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농업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밭에서 잡곡을 재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논에서 벼농사(도작, 稻作)를 짓기도 하였다. 벼농사는 특히 삼한에서 성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수리(水利)를 위한 저수지가 이미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농업이 당시의 주된 산업이었음은, 부여에서 흉년이 되면 왕이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거나 죽음을 당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하여 주고 있다.
물론 농업 이외에도 여러 가지 경제 활동을 하였다. 가령 부여에서는 목축(牧畜)이 크게 행해지고 있어서, 관직의 이름에도 소·말·돼지·개 등의 가축 이름이 붙여질 정도였다. 남쪽 삼한에서도 소와 말이 가축으로 길러졌으며, 그 뼈가 김해패총(金海貝塚)에서도 발견되었다. 또 삼한에서는 꼬리가 긴 닭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한편 사냥(수렵, 狩獵)도 널리 행해졌는데, 고구려와 같이 산이 많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김해패총에서 멧돼지·사슴 등 동물의 뼈가 나온다든지 울주(蔚州)의 반구대 암각화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동물 그림이 발견되는 것도 사냥을 중요시한 증거가 된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나 그 밖의 물고기 그림도 나오며, 따라서 해안지역에서는 고기잡이(어로, 漁撈)도 했음을 말해 준다. 동해안에 자리잡고 있던 옥저나 동예 같은 나라에서 고기잡이가 특히 중요시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주된 산업은 역시 농업이었다. 그리고 촌락은 농업을 영위하는 기본적인 단위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촌락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농민은 중국인들이 하호(下戶)라고 부른 양인(良人) 신분의 소유자들이었다. 이 양인농민의 위에는 호민(豪民)이 있었고, 밑에는 노비(奴婢)가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시기 즉, 원시부족국가 시기에는 농민의 개인적인 토지 사유는 이미 생겨나 있었으며 이들 양인농민은 촌락의 공유지를 경작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농업은 이 시기 주된 산업이었으며 각 나라들의 특성에 따라 목축과 수렵과 어로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청동기(철기)의 사용은 이들 국가의 경제적인 변화는 물론 사회 전반에 일대 변혁을 불러왔다.
[ 참 고 자 료 ]
이기백「한국사신론」일조각 2003
김옥근 「한국경제사」 신지서원 1997
http://www.encyber.com/ 두산세계대백과
http://www.historyworld.org 우리역사 바로알기 시민연대
http://www.hongik.ac.kr/~yoksa/ 역사학회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