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십만양병설의 출전과 지금까지의 입장
2. 진위문제 제기의 내용과 근거
3. 양병설제기 당시의 상황
4. 결어
2. 진위문제 제기의 내용과 근거
3. 양병설제기 당시의 상황
4. 결어
본문내용
기 때문에 항시 삼대의 이상정치를 말하면서 언제나 개혁의 내용으로는 공안의 개정과 군적의 개정을 먼저 역설했던 것이다.
그는 벼슬길에 나온 이래로 끊임없이 위기를 강조하며 경장을 역설해왔다. 먼저 명종 20년 그의 나이 30세때 올린 상소를 보면
하물며 지금의 국사는 비유하면 큰 병을 앓고 난 뒤에 원기가 아직 회복되지 않아 백마디가 다 아픈 것과 같습니다.
) 『율곡전서』1, p50,「辭正言疏」
하였고, 또 명종 22년 퇴계에게 올린 편지에서도
民力은 이미 고갈되고 나라의 비축은 이미 텅 비었으니 만약 경장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라 하였다. 이런 주장은 선조 즉위 후에도 계속되어, 재변이 생기는 것도 경장해야 할 때에 경장하지 않은 잘못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 『율곡전서』1, p74,「擬陳時弊疏」
또 백성의 안위는 폐단을 개혁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고도 하였다.
) 『율곡전서』1, p93,「玉堂陳戒箚」
그러나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신하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율곡은 '만약 제도들을 고쳐 바로잡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릴 방법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며
) 『경연일기』. 선조 2년 2월조
그리고 이를 위해 수신을 토대로 用賢하고 用賢함으로써 경장을 할 것을 계속 역설하게 된다.
또한 국방문제에 대한 관심은 서북 2도의 수비를 강화하라는 것
) 선조 2년에 올린 「陳 災五策箚」
을 비롯하여 「만언봉사」에서도 '군정을 개혁하여 내외의 방비를 견고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또 중국에서 의주와 20여리 떨어진 長甸子에 진을 설치하자 후환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중지하게 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 『경연일기』 선조 7년 4월조. 이때 왕을 비롯한 대신 및 조정신하들의 비웃음을 받았다고 쓰고있다.
또 「陳海西民弊疏」에서는 황해도는 樞要之地이므로 精兵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선조 11년 4월의 기록엔 군정이 매우 문란함을 걱정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 『경연일기』
그리고 선조 15년 12월에 병조판서에 제수되자 본격적으로 군정개혁을 논의하게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군정 개혁을 위해 율곡은 선조 16년 그의 나이 48세때 병조판서의 자리에 있으면서 친구인 송구봉에게 경장의 계책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하였다.
) 『율곡전서』 p.236 「與宋雲長」
그 내용은 변방의 성이 함락되었으니 나라의 치욕이 크다. 文恬武嬉한 지 백여년이라 無兵無食이니 백가지로 헤아려 도 계책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왕의 마음이 변하여 경장 하려 하니 좋은 계책이 있으면 말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전후의 사정과 당시의 상황을 보면 율곡이 군병을 많이 길러야 함을 역설했던 것을 잘 짐작할 수 있다.
4. 결어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서인들의 부회억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지나친 듯 하다. 앞에서도 본 것처럼 십만이란 군병의 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 『현종개종실록』현종 4년 7월 26일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도성안의 군대가 일만명을 웃돈다고 하였다.
또 지나치게 많은 군병을 기르려 한다는 반대나 비판이 있었던 것에서도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그 일을 기록한 것이 私撰記錄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은 그러한 기록을 남긴 사람에 대한 지나친 모독이며, 또한 諡狀의 경우는 왕에게 올린 글이므로 그렇게 조작된 내용이 함부로 들어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 십만양병을 거론한 시기에 대한 기록이 차이가 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즉 율곡이 십만양병을 건의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시기는 과연 언제일까? 율곡이 십만양병을 주청한 시기를 처음으로 분명히 밝힌 곳은 율곡의 연보이다. 물론 연보는 기본적으로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그 사람의 생애를 정리한 것이므로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간적인 선후문제는 연보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병조판서 당시의 상황과 연결해보아도 연보의 기록이 제일 정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조수정실록』의 그 부분을 보면 실록의 수정을 주도한 서인들이 율곡을 높이고, 그러한 율곡에 반대한 서애의 행동을 부각시키기 위해 유사한 사건을 연결시킨 것으로서 당파적인 흔적이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수정실록에서는 시간적인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된 것 같지는 않다.
다음으로 '李文成은 참으로 성인이다'와 '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라는 두가지의 표현에 대한 의문이다. 文靖은 宋 眞宗時의 재상인 李 沆의 시호로써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 이 항은 진종이 장차 토목공사를 일으킬 것을 경계하면 서 그의 후배인 王旦에게 말하기를 '나는 미처 볼수가 없지 마는 나이 젊은 參政은 후일에 이 일을 근심할 것이요'라고 했는데 과연 후일에 진종이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니 왕단 은 이항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 '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 다'라고 말한 고사가 있음. 상게 이재호 교수의 논문에서 재 인용.
그러므로 만약 서애가 율곡에 대해 그런말을 했다면 당연히 '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후일에 그 말이 바로 율곡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율곡이 시호를 받게 된 이후 율곡의 시호로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신도비명의 경우는 금석문이기 때문에 함부로 바꿀 수 없었으므로 신도비명에만 그대로 기록된 것 같다. 그러나 이문성으로 그 표현이 바뀌어진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 『연려실기술』권18, 「宣祖朝故事本末」선조조유현, 이이편 참조. 이긍익은 영조 12년(1736년)에서 순조 6년(1806년)까 지 생존하였다.
에서도 이문성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인조 2년(1624) 율곡의 시호가 내려진 이후 바뀌어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율곡의 다른 군정책에 십만양병에 관한 언급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은 앞에서 본 것 처럼 결정적인 부정의 근거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율곡은 병조판서가 된 이후 양병의 필요와 방법에 대해 계속 역설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그는 벼슬길에 나온 이래로 끊임없이 위기를 강조하며 경장을 역설해왔다. 먼저 명종 20년 그의 나이 30세때 올린 상소를 보면
하물며 지금의 국사는 비유하면 큰 병을 앓고 난 뒤에 원기가 아직 회복되지 않아 백마디가 다 아픈 것과 같습니다.
) 『율곡전서』1, p50,「辭正言疏」
하였고, 또 명종 22년 퇴계에게 올린 편지에서도
民力은 이미 고갈되고 나라의 비축은 이미 텅 비었으니 만약 경장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라 하였다. 이런 주장은 선조 즉위 후에도 계속되어, 재변이 생기는 것도 경장해야 할 때에 경장하지 않은 잘못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 『율곡전서』1, p74,「擬陳時弊疏」
또 백성의 안위는 폐단을 개혁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고도 하였다.
) 『율곡전서』1, p93,「玉堂陳戒箚」
그러나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신하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율곡은 '만약 제도들을 고쳐 바로잡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릴 방법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며
) 『경연일기』. 선조 2년 2월조
그리고 이를 위해 수신을 토대로 用賢하고 用賢함으로써 경장을 할 것을 계속 역설하게 된다.
또한 국방문제에 대한 관심은 서북 2도의 수비를 강화하라는 것
) 선조 2년에 올린 「陳 災五策箚」
을 비롯하여 「만언봉사」에서도 '군정을 개혁하여 내외의 방비를 견고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또 중국에서 의주와 20여리 떨어진 長甸子에 진을 설치하자 후환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중지하게 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 『경연일기』 선조 7년 4월조. 이때 왕을 비롯한 대신 및 조정신하들의 비웃음을 받았다고 쓰고있다.
또 「陳海西民弊疏」에서는 황해도는 樞要之地이므로 精兵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선조 11년 4월의 기록엔 군정이 매우 문란함을 걱정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 『경연일기』
그리고 선조 15년 12월에 병조판서에 제수되자 본격적으로 군정개혁을 논의하게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군정 개혁을 위해 율곡은 선조 16년 그의 나이 48세때 병조판서의 자리에 있으면서 친구인 송구봉에게 경장의 계책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하였다.
) 『율곡전서』 p.236 「與宋雲長」
그 내용은 변방의 성이 함락되었으니 나라의 치욕이 크다. 文恬武嬉한 지 백여년이라 無兵無食이니 백가지로 헤아려 도 계책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왕의 마음이 변하여 경장 하려 하니 좋은 계책이 있으면 말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전후의 사정과 당시의 상황을 보면 율곡이 군병을 많이 길러야 함을 역설했던 것을 잘 짐작할 수 있다.
4. 결어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서인들의 부회억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지나친 듯 하다. 앞에서도 본 것처럼 십만이란 군병의 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 『현종개종실록』현종 4년 7월 26일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도성안의 군대가 일만명을 웃돈다고 하였다.
또 지나치게 많은 군병을 기르려 한다는 반대나 비판이 있었던 것에서도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그 일을 기록한 것이 私撰記錄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은 그러한 기록을 남긴 사람에 대한 지나친 모독이며, 또한 諡狀의 경우는 왕에게 올린 글이므로 그렇게 조작된 내용이 함부로 들어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 십만양병을 거론한 시기에 대한 기록이 차이가 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즉 율곡이 십만양병을 건의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시기는 과연 언제일까? 율곡이 십만양병을 주청한 시기를 처음으로 분명히 밝힌 곳은 율곡의 연보이다. 물론 연보는 기본적으로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그 사람의 생애를 정리한 것이므로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간적인 선후문제는 연보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병조판서 당시의 상황과 연결해보아도 연보의 기록이 제일 정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조수정실록』의 그 부분을 보면 실록의 수정을 주도한 서인들이 율곡을 높이고, 그러한 율곡에 반대한 서애의 행동을 부각시키기 위해 유사한 사건을 연결시킨 것으로서 당파적인 흔적이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수정실록에서는 시간적인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된 것 같지는 않다.
다음으로 '李文成은 참으로 성인이다'와 '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라는 두가지의 표현에 대한 의문이다. 文靖은 宋 眞宗時의 재상인 李 沆의 시호로써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 이 항은 진종이 장차 토목공사를 일으킬 것을 경계하면 서 그의 후배인 王旦에게 말하기를 '나는 미처 볼수가 없지 마는 나이 젊은 參政은 후일에 이 일을 근심할 것이요'라고 했는데 과연 후일에 진종이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니 왕단 은 이항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 '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 다'라고 말한 고사가 있음. 상게 이재호 교수의 논문에서 재 인용.
그러므로 만약 서애가 율곡에 대해 그런말을 했다면 당연히 '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후일에 그 말이 바로 율곡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율곡이 시호를 받게 된 이후 율곡의 시호로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신도비명의 경우는 금석문이기 때문에 함부로 바꿀 수 없었으므로 신도비명에만 그대로 기록된 것 같다. 그러나 이문성으로 그 표현이 바뀌어진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 『연려실기술』권18, 「宣祖朝故事本末」선조조유현, 이이편 참조. 이긍익은 영조 12년(1736년)에서 순조 6년(1806년)까 지 생존하였다.
에서도 이문성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인조 2년(1624) 율곡의 시호가 내려진 이후 바뀌어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율곡의 다른 군정책에 십만양병에 관한 언급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은 앞에서 본 것 처럼 결정적인 부정의 근거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율곡은 병조판서가 된 이후 양병의 필요와 방법에 대해 계속 역설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