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정철의 일생
2.정철의 문학 세계
3.정철의 생애
4.술을 사랑한 송강
2.정철의 문학 세계
3.정철의 생애
4.술을 사랑한 송강
본문내용
서는 것이다.
타협과 조화를 모르는 그의 성품은 정치 및 다른 당 이들과의 관계에도 나타난다. 그때마다 그가 조언을 구하고 또 그에게 조언을 해주며 서로 의논상대가 되어준 이가 바로 율곡 이이다. 율곡은 붕당정치를 실현코자 중립적 입장을 지키지만, 나중에는 서인쪽 편을 들게 된다. 그 정도로 그 당시 당쟁은 심각했다. 선조임금의 각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승의 자리에서 하루 아침에 유배를 가고 다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정치가는 관용과 포용력이 있어야 하는데 송강은 이와 거리가 먼 편이었다. 따라서 그가 서인의 투사로 나선 건 당연한 일이다. 거침없고 격정적인 성격을 지닌 그가 사태를 차분히 관망하는 일이란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송강의 평가는 으레 양면으로 나뉘어 극단적인 성격을 띤다. 긍정적인 평가는 '충직하고 맑으며 의로운 인물'이라는 것이고, 부정적인 평가는 '성격이 편협하고 복수심이 강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강직하여 타협으로기에 이런 부정적인 평가를 들은 그이기에 사후 100여 년에 걸쳐 그의 행적과 명예가 거듭 삭탈·회복된 일도, 결국 이런 인식에 기초한 동인세력의 원한과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정에서 보는 정철
정철은 지극한 효자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치룰 때 주위에 물어 모든 의례와 절차를 예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란 부모의 상을 당하여 봉분한 다음, 그 서쪽에 초가를 짓고 상주가 3년 동안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이다. 이는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가장 효성스런 행위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고려 말 정몽주의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송강은 정실부인으로부터 4남 3녀, 측실 부인으로부터 1남 1녀 이렇게 모두 5남 4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 4명이 일찍 세상을 뜬다. 생전에 이렇게 많은 자식을 잃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흔치 않은 일이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송강으로서는 그만큼 수심이 컸겠다.
그는 자녀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는데 지금 남아 전하는 것만 해도 70통이 넘는다. 건강이 나쁜 자녀에게 건강을 당부하고 공부에 힘쓸 것을 독려하는 등 자식 사랑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술을 사랑한 송강
송강은 아주 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술을 그저 사랑한 게 아니라 술과 자신은 하나라고 단언하던 사람이다. 그의 시조와 가사에도 술과 관련된 게 상당히 많다. 그 술 때문에 그는 모함도 많이 받았다. 송강은 자기가 술을 즐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술을 즐기는 이유가 넷 있으니, 불평이 하나요, 흥취가 둘이요, 빈객을 대접하는 것이 셋이요, 남이 권하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 그 넷이다."
모진 정치판에서 맘이 많이 상하고 속을 털어놓을 데가 없었던 것도 그가 술을 즐긴 이유 중 하나가 될 듯 하다.
송강은 이렇게 여러 면을 보인 사람이다. 흔히 문학인으로서만 알고, 당파 싸움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이면에는 이렇듯 여러 면이 있다. 이참에 송강에 대한 인식을 좀 바꿔봤으면 한다.
타협과 조화를 모르는 그의 성품은 정치 및 다른 당 이들과의 관계에도 나타난다. 그때마다 그가 조언을 구하고 또 그에게 조언을 해주며 서로 의논상대가 되어준 이가 바로 율곡 이이다. 율곡은 붕당정치를 실현코자 중립적 입장을 지키지만, 나중에는 서인쪽 편을 들게 된다. 그 정도로 그 당시 당쟁은 심각했다. 선조임금의 각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승의 자리에서 하루 아침에 유배를 가고 다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정치가는 관용과 포용력이 있어야 하는데 송강은 이와 거리가 먼 편이었다. 따라서 그가 서인의 투사로 나선 건 당연한 일이다. 거침없고 격정적인 성격을 지닌 그가 사태를 차분히 관망하는 일이란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송강의 평가는 으레 양면으로 나뉘어 극단적인 성격을 띤다. 긍정적인 평가는 '충직하고 맑으며 의로운 인물'이라는 것이고, 부정적인 평가는 '성격이 편협하고 복수심이 강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강직하여 타협으로기에 이런 부정적인 평가를 들은 그이기에 사후 100여 년에 걸쳐 그의 행적과 명예가 거듭 삭탈·회복된 일도, 결국 이런 인식에 기초한 동인세력의 원한과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정에서 보는 정철
정철은 지극한 효자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치룰 때 주위에 물어 모든 의례와 절차를 예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란 부모의 상을 당하여 봉분한 다음, 그 서쪽에 초가를 짓고 상주가 3년 동안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이다. 이는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가장 효성스런 행위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고려 말 정몽주의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송강은 정실부인으로부터 4남 3녀, 측실 부인으로부터 1남 1녀 이렇게 모두 5남 4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 4명이 일찍 세상을 뜬다. 생전에 이렇게 많은 자식을 잃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흔치 않은 일이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송강으로서는 그만큼 수심이 컸겠다.
그는 자녀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는데 지금 남아 전하는 것만 해도 70통이 넘는다. 건강이 나쁜 자녀에게 건강을 당부하고 공부에 힘쓸 것을 독려하는 등 자식 사랑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술을 사랑한 송강
송강은 아주 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술을 그저 사랑한 게 아니라 술과 자신은 하나라고 단언하던 사람이다. 그의 시조와 가사에도 술과 관련된 게 상당히 많다. 그 술 때문에 그는 모함도 많이 받았다. 송강은 자기가 술을 즐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술을 즐기는 이유가 넷 있으니, 불평이 하나요, 흥취가 둘이요, 빈객을 대접하는 것이 셋이요, 남이 권하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 그 넷이다."
모진 정치판에서 맘이 많이 상하고 속을 털어놓을 데가 없었던 것도 그가 술을 즐긴 이유 중 하나가 될 듯 하다.
송강은 이렇게 여러 면을 보인 사람이다. 흔히 문학인으로서만 알고, 당파 싸움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이면에는 이렇듯 여러 면이 있다. 이참에 송강에 대한 인식을 좀 바꿔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