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기호학 서론
Ⅱ. 기호 구조
Ⅲ. 기호와 의미
Ⅳ. 기호학에 입각한 커뮤니케이션
Ⅱ. 기호 구조
Ⅲ. 기호와 의미
Ⅳ. 기호학에 입각한 커뮤니케이션
본문내용
표피를, 범주는 현실체 간의 유사성을, 은유는 문화적 체험의 유사성을, 환유는 현실과의 접촉점을
표상한다.
그러나 이런 수단도 현실의 일부만을 표상하고 있을 뿐이다. 표상된 현실체의 모습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표상 되지 못한 부분은 아직도 우리 지식의 건너편에 숨어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것이 아직 인류의 오랜
역사를 성공적으로 지탱시켜 왔고,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 왔다.
- 나는 표현한다. 나는 존재한다 -
기호는 물질적인 것에서 관념적인 것까지, 존재하는 것에서 허구적인 것까지 무엇이든 대표할 수 있다.
기호의 이 같은 엄청난 대표력 내지 표상력은 기호의 자의성과 더불어 기호의 무한한 생산을 하용한다.
실제로 수 많은 가공적 기호들이 철학자, 수학자, 예술가, 미디어 종사자 등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진리, 정의, 무한, 허수, ET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기호의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공상력과 창의력을 무한히 확장시켜 준다. 물질적 따라서 자연계와 우주는 유한한 것 같고, 인간이 창조하는 가공의 세계는 무한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현대 미디어 시대의 사람은 점점 자연을 떠나 환상적 가공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과현실적 세계에 한없이 미혹되고 있다. TV가 보여주는 과실재성(hyperreality)과 과공간성(hyperspace)이 TV 시대에 태어나는 아동들의 '자연'이 되고 있고, 신이 창조한 저 밖의 자연은 흥미없는 제 2의 자연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기호의 유혹에 사로잡혀 인조기호의 세계에 침잠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꽃잎의 세포조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보다는 TV 화면에 나타나는 가공의 이미지들, 즉 니가자 거북이, 터미네이터, 비디오 게임 쪽을 택한다. 정상배들은 가공의 통계숫자를 갖고서 민심을 조작하고, 텅빈 정치공약을 갖고서 민심을 선동한다. 신기하게도 그런 것이 시민들에게 잘 먹혀든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점점 가공적 기호의 세계에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거짓'이 가공적인 것을 표상 하는 기호의 기계적 능력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없는 것을 기호를 통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거짓까지도 포함한다.
보들리야르는 이런 조작을 모조(simlulation)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호는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만드는 능력도 있다 이를 비모조(dissimulation)라고 부른다.
- 나는 표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현대는 정보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지식을 축적하지 못하고 있다. 피상적 정보는 '폐기성'의 것이기 때문이다.
(J. Ellul. The Technological Bluff, trans. G. W. Bromiley, Grand Rapids, Michigna: William B. Eerdmans, 1990).
자본주의 경제의 산물인 광고는 차이를 무한정 변조(modulation)하는 제도이다.
광고는 실제상 같은 것을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인위적인 돌연변이의 기구이다.
같은 재료를 쓴 커피인데도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붙여 서로 다른 상품인 것처럼 만든다.
이 모든 것에서 차이란 피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광고는 이 피상적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투자하며 소비자들은 바로 이 피상적 차이를 산다.
의미의 동일성 보다 차이의 조작에 더 신경을 쓰는 사회가 현대사회이다.
차이의 변조가 극성할대로 극성하고 있다.
사람은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광고는 바로 이것을 이용한다.
사람들에게 개성 있는 차이를 만들어주기 위하여 수많은 장신구들이 생산되어 판매된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미디어에 의해 기호의 교란이 극에 달하고 있다
사람들은 기표의 교란에 혼미해지는 동시에 그것에 점점 더 미혹되고 있다.
. 문화적 차이=기호의 차이
일본의 한 무사에게 아들이 있었다.
하루는 그 아들이 떡집 주인에게 쫓겨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 왔다.
그 무사는 무슨 일이냐고 떡집 주인에게 물었다.
떡집 주인은 아들이 자기 집 떡을 훔쳐먹었다고 했다.
무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떡집 주인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훔쳐먹었다고 다그쳤다. 하는 수 없이 무사는 한가지 제안을 했다.
자기가 검으로 아들의 배를 갈라 위를 꺼내 보고
그 속에 떡이 있으면 그 놈은 도둑이니 죽어 마땅하고,
만약 위 속에 떡이 없으면 떡집 주인은 무고한 생명을 죽게 했으니 목을 내놓으라고 했다.
떡집 주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아들에게도 목숨을 걸고 정직을 입증하겠느냐고 다그쳤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는 검을 휘둘러 아들의 배를 갈라 위를 꺼냈고, 떡집 주인이 위 속을
들여다보았지만 떡은 거기에 없었다. 떡집 주인은 약속대로 목을 내밀었고, 무사는 검을 내리쳤다.
한번에 두 목숨이 사라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일본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지키는 정직과 약속의 고결함을 가르치는
자랑스런 우화로 삼는다.
그런데 은근과 끈기를 좋아하는 느긋한 한국인의 시각에서 볼 때 이것은 어리석고 졸속한 것이다.
<김소운 수필집에서>
- 왜 이렇게 다른 해석이 나오는가 - 기호학의 문제
<예 2: 김대중 대통령 옷 사건 해석과 김영삼 대통령의 성수대교 붕괴 해석>
- 기호학적 해석이 결핍되어 나온 실패이다 -
<예 3: 정의, 자유, 평화 모두 상징이다>
이런 상징들의 대상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대상체는 과연 존재하는가?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관념의 조각인가, 텅 빈 기표에 지나지 않는가?
아무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기호에 의해서 인생을 의미 있게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도 인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것이다.
이 모든 체험에 기호는 함께 있었고, 우리는 기호의 울타리를 넘어본 적이 없다.
우리가 기호의 울타리를 넘어가려고 공상하는 것만큼 기호는 울타리를 넓힐 따름이다.
우리는 언제나 기호의 피안(彼岸:이쪽)에 갇혀 있다.
그리고 기호의 피안은 의미의 세계이다.
오늘날 기호학은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상한다.
그러나 이런 수단도 현실의 일부만을 표상하고 있을 뿐이다. 표상된 현실체의 모습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표상 되지 못한 부분은 아직도 우리 지식의 건너편에 숨어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것이 아직 인류의 오랜
역사를 성공적으로 지탱시켜 왔고,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 왔다.
- 나는 표현한다. 나는 존재한다 -
기호는 물질적인 것에서 관념적인 것까지, 존재하는 것에서 허구적인 것까지 무엇이든 대표할 수 있다.
기호의 이 같은 엄청난 대표력 내지 표상력은 기호의 자의성과 더불어 기호의 무한한 생산을 하용한다.
실제로 수 많은 가공적 기호들이 철학자, 수학자, 예술가, 미디어 종사자 등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진리, 정의, 무한, 허수, ET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기호의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공상력과 창의력을 무한히 확장시켜 준다. 물질적 따라서 자연계와 우주는 유한한 것 같고, 인간이 창조하는 가공의 세계는 무한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현대 미디어 시대의 사람은 점점 자연을 떠나 환상적 가공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과현실적 세계에 한없이 미혹되고 있다. TV가 보여주는 과실재성(hyperreality)과 과공간성(hyperspace)이 TV 시대에 태어나는 아동들의 '자연'이 되고 있고, 신이 창조한 저 밖의 자연은 흥미없는 제 2의 자연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기호의 유혹에 사로잡혀 인조기호의 세계에 침잠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꽃잎의 세포조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보다는 TV 화면에 나타나는 가공의 이미지들, 즉 니가자 거북이, 터미네이터, 비디오 게임 쪽을 택한다. 정상배들은 가공의 통계숫자를 갖고서 민심을 조작하고, 텅빈 정치공약을 갖고서 민심을 선동한다. 신기하게도 그런 것이 시민들에게 잘 먹혀든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점점 가공적 기호의 세계에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거짓'이 가공적인 것을 표상 하는 기호의 기계적 능력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없는 것을 기호를 통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거짓까지도 포함한다.
보들리야르는 이런 조작을 모조(simlulation)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호는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만드는 능력도 있다 이를 비모조(dissimulation)라고 부른다.
- 나는 표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현대는 정보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지식을 축적하지 못하고 있다. 피상적 정보는 '폐기성'의 것이기 때문이다.
(J. Ellul. The Technological Bluff, trans. G. W. Bromiley, Grand Rapids, Michigna: William B. Eerdmans, 1990).
자본주의 경제의 산물인 광고는 차이를 무한정 변조(modulation)하는 제도이다.
광고는 실제상 같은 것을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인위적인 돌연변이의 기구이다.
같은 재료를 쓴 커피인데도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붙여 서로 다른 상품인 것처럼 만든다.
이 모든 것에서 차이란 피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광고는 이 피상적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투자하며 소비자들은 바로 이 피상적 차이를 산다.
의미의 동일성 보다 차이의 조작에 더 신경을 쓰는 사회가 현대사회이다.
차이의 변조가 극성할대로 극성하고 있다.
사람은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광고는 바로 이것을 이용한다.
사람들에게 개성 있는 차이를 만들어주기 위하여 수많은 장신구들이 생산되어 판매된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미디어에 의해 기호의 교란이 극에 달하고 있다
사람들은 기표의 교란에 혼미해지는 동시에 그것에 점점 더 미혹되고 있다.
. 문화적 차이=기호의 차이
일본의 한 무사에게 아들이 있었다.
하루는 그 아들이 떡집 주인에게 쫓겨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 왔다.
그 무사는 무슨 일이냐고 떡집 주인에게 물었다.
떡집 주인은 아들이 자기 집 떡을 훔쳐먹었다고 했다.
무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떡집 주인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훔쳐먹었다고 다그쳤다. 하는 수 없이 무사는 한가지 제안을 했다.
자기가 검으로 아들의 배를 갈라 위를 꺼내 보고
그 속에 떡이 있으면 그 놈은 도둑이니 죽어 마땅하고,
만약 위 속에 떡이 없으면 떡집 주인은 무고한 생명을 죽게 했으니 목을 내놓으라고 했다.
떡집 주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아들에게도 목숨을 걸고 정직을 입증하겠느냐고 다그쳤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는 검을 휘둘러 아들의 배를 갈라 위를 꺼냈고, 떡집 주인이 위 속을
들여다보았지만 떡은 거기에 없었다. 떡집 주인은 약속대로 목을 내밀었고, 무사는 검을 내리쳤다.
한번에 두 목숨이 사라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일본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지키는 정직과 약속의 고결함을 가르치는
자랑스런 우화로 삼는다.
그런데 은근과 끈기를 좋아하는 느긋한 한국인의 시각에서 볼 때 이것은 어리석고 졸속한 것이다.
<김소운 수필집에서>
- 왜 이렇게 다른 해석이 나오는가 - 기호학의 문제
<예 2: 김대중 대통령 옷 사건 해석과 김영삼 대통령의 성수대교 붕괴 해석>
- 기호학적 해석이 결핍되어 나온 실패이다 -
<예 3: 정의, 자유, 평화 모두 상징이다>
이런 상징들의 대상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대상체는 과연 존재하는가?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관념의 조각인가, 텅 빈 기표에 지나지 않는가?
아무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기호에 의해서 인생을 의미 있게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도 인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것이다.
이 모든 체험에 기호는 함께 있었고, 우리는 기호의 울타리를 넘어본 적이 없다.
우리가 기호의 울타리를 넘어가려고 공상하는 것만큼 기호는 울타리를 넓힐 따름이다.
우리는 언제나 기호의 피안(彼岸:이쪽)에 갇혀 있다.
그리고 기호의 피안은 의미의 세계이다.
오늘날 기호학은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